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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사회주의 운동

6. 사회주의 운동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러시아혁명의 영향과 급진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인하여 한국 독립운동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년경부터 국외 특히 노령의 한인 교포사회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1920년대 전반 중국의 독립운동계와 국내 민족운동계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전반 국내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운동 단체는 한결같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인사회당은 약법에서 ‘사회주의적 국가를 조직한다’고 했고,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모든 계급을 타파한 소비에트정부 수립’ 을 지향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도 역시 소비에트정부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국내 전조선청년당대회에서도 무산계급 해방과 계급타파를 제일의적 목표로 제시했다.
1920년대 전반 사회주의운동은 이념적 지향성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민족주의운동과의 차별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즉 국가건설 지향의 차이가 강조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당 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 공작과 함께,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화에 노력하는 한편, 사상운동을 통한 이념의 전파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아직 미약한 세력에 불과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운동 단체 내부에서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따라서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의 특징은 비록 민족주의와의 이념적 차별화를 꾀했지만, 운동 방법론에 있어서의 본질적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는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 급진적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등 각종의 신사조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1925년 국내에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면서 사회주의운동세력은 조직적 기반을 갖게 되고 이에 따라 자신들의 이념과 투쟁 방략에 대한 구체 적 논의에 들어갔다.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Comintern ; Communist International) 의 반제통 일전선 전략과 전술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전반 전개한 사상운동과 대중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어떻게 조직화하며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일어나게 된다.
이 결과 사회주의운동의 국가건설 지향과 독립운동 방법론이 구체화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운동 진영에서는 정치적 독립과 사회 해방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민족해방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제1, 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직접, 비밀, 보통 선거로 성립된 입법부에 기초한 민주공화국 건설’ 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전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하여 ‘민족혁명유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통일전선에서는 노농계급을 기초로 하고 도시의 소자본가, 지식인뿐만 아니라 부르주아까지 동맹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26년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화요파에서 엠엘파로 넘어가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1926년 중반이후화 요파를 대신한 엠엘파가 제3, 4차 조공을 이끌어가면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방침을 마련하였다. 이때 채택된「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에 나타난 국가건설론을 살펴 보면, 소비에트건설론은 좌익소아병적 견해이며, 시민적 공화국 건설론은 우경적 견해라고 비판하면서 ‘노농대중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 건설론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신간회라는 민족협협동전선 조직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민공화국 건설론은 제2차 조공의 민주공화국 건설론을 폐기한 것으로 토지문제에 있어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민주공화국 건설론에서는 지주제의 잠정적 존속을 인정했지만, 혁명적 인민공화국 건설론에서는 노농계급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토지혁명의 즉각적 실현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즉 현 단계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로 규정하면서도, 부르주아계급이 취약하므로 노농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하여 민족혁명과 토지혁명을 직결시켰던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있어서도 철저한 계급분석에 기초하여 각 계급과 계층의 역할을 보다 분 명하게 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농계급의 주도권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하였으며, 이를 위한 토지혁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서는 기존 조선공산당이 소수 지식인 중심이며 파벌투쟁의 온상이라는 이유로 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노농 계급에 기초한 당 재건 방침을 지시하였다. 이후 1930년대 전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당 재건이 제일의적 과제로 설정되었고, 이에 따라 민족해방투쟁을 위한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협동전선은 부차적으로 취급되었다. 오히려 민족주의에 대한 투쟁이 당면과제로 설정되었으며,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의 노농계급의 주도권 획득을 무엇보다도 중시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는 타협파와 비타협파를 막론하고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1930년대 전반 국내에서는 노농소비에트건설 노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좌편향적 노선이라고 비판하면서 여전히 민족협동전선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집단도 있었다. 여 운형(呂運亨, 1886~1947).배성룡(裵成龍, 1896~1964) 등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좌편향적 노선을 따르지 않고 민족적 현실에 적합한 운동 노선을 정립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이었다. 언론계, 교육계 등에서 활동한 이들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민중 계몽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의 이념적 지향성은 대체로 사회민주주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해외 사회주의 운동계에서는 과거의 극좌주의 노선을 청산하고 보다 현실적인 민족해방운동노선을 정립하게 되었다. 즉 1930년대 후반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1940년대 초반의 화 북조선독립동맹은 공통적으로 전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한 민족해방운동 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종전의 노농소비에트국가 건설을 지양하고 장래 수립할 국가 형태를 ‘조선인민정부’ 라든가 ‘민주공화국’ 이라고 표현하는 등 좌편향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국가건설 노선은,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를 일부 수용하면서 발전적 변모를 하였던 민족주 의 세력의 국가건설 노선에 접근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서로 연합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와 함께 좌우익이 이념적으로 수렴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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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운동 자료번호 : edeah.d_0005_0030_002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