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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근대 민족의식 태동

1. 19세기 후반 근대 민족의식 태동

19세기 이전까지 한국은 동일한 역사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통일 왕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유교 중심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주변 민족을 야만시하였다. 조공 관계를 맺고 있는 청나라에 대해서는 이중적이었다. 청의 종주권은 인정하였으나 이는 의례적인 것에 머물렀고, 내치와 외교는 자주적이었다. 명나라 이후 중화 문명은 오직 조선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어와 역사 등 문화적인 면에서는 독자적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자존 의식으로 청의 문화를 야만시하였다.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 자존 의식은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해 거부와 저항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흥선대원군(李昰應, 1820~1898)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통해 서양 세력의 침략을 무력으로 물리쳤고, 그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쇄국양이책(鎖國攘夷策)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새롭게 수립된 정권은 일본의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하여 개항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중국 중심의 계서적인 세계질서에서 서구 중심의 힘에 의한 세계질서로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880년대까지 한국인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첫째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대응이다. 이는 주로 보수적인 유림이 주도했으며, 농민층이 지지하였다. 전통적인 중화주의에 의거하여 유학을 정학으로 서양 기독교 및 근대 문명을 사학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경제적으로는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고 자급자족적인 농촌경제 체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둘째는 개화파의 대응이다. 개화파 관료들 중심으로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 문물을 수용하고 부강을 추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전통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 기술 문명의 수용을 주장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점진주의적 개화파에 대해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삼고 정치적 변혁을 통한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들 개화파는 종래 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국제법에 의거한 독립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1894년은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 의미를 지니는 시기였다. 우선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농촌 지식인과 농민층이 동학이 라는 종교 조직으로 결집하여 기존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정치사회적 개혁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은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본 제국주의에 무장하여 저항했다. 이 점에서 동학농민항쟁은 반제반봉건의 과제를 동시에 제기한 민족운동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개화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제기된 개혁안은 개화파 정권에서 추진한 갑오개혁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갑오·을미개혁은 일본의 통제 아래에서 추진된 한계가 있지만, 그동안의 개화파와 농민층의 개혁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화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은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양화된 일본에 대한 반대운동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 침입에 저항하여 전통적인 농촌 경제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기도 하였다. 개화파 정권에 반대하고 농촌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점에서는 동학농민항쟁과 동일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항쟁은 양반 지배 체제를 비판하는 사회개혁운동 이라는 점에서 의병전쟁과 차이가 있었다.
1896년에는 관료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조직되었다. 독립협회는 시민들이 참여한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민주주의적 대중 시위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그 결과 입헌군주제로의 정치개혁을 지향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이러한 개혁 요구를 탄압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1896년 대한제국이 성립 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국의 간섭에 대해 근대 국가로서의 대외적 주권 확립을 표방하였지만,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군주주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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