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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만주침략과 국제 이해관계

1. 만주침략과 국제 이해관계

1929년 10월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본격적인 과잉생산에 따라 일어난 공황은, 이후 4년여에 걸쳐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각국은 무역을 통제하고 해외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정책을 찾기 시작하였다. 세계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군축회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제국주의 열강들은 경제적 정책 측면에서 군사화에 의한 경제위기 탈출을 모색하였다. 또 여기에 민족배외주의 및 자민족중심주의적 경향이 노골화 되면서 열강들은 밖으로 군축을 논의하면서도 안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었다.
세계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상대적 안정을 취하는 배경이 되었던 워싱턴체제가 와해되는데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워싱턴체제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미국과 일본이 세계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일본경제는 세계대공황에 큰 타격을 받고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1930년 초부터 걷잡을 수 없는 불황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해외무역 의존도가 30% 가 육박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세계대공항의 영향으로 상품주식시장이 폭락하고, 거리에는 300 만의 실업자가 넘치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다. 물가상승과 쌀값 폭락으로 농민생활이 비참해지고, 소작쟁의가 확산되었다. 수출도 당연히 정체되었다. 이를 기회로 일본 국내 우익운동이 활발해 졌다. 만성적 농촌피폐와 국민혁명에 따라 일본의 대륙지배가 흔들리는 가운데 나오는 위기감이 그 배경이 되었다.주 832
각주 832)
피터 두으스, 22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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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일본 군부 내에서는 만주와 내몽고 전역을 식민지화하여 국내 모순을 밖으로 돌리고 대 소련전의 무력적 준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중들의 힘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만주 관동군 작전주임 참모였던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는「만몽문제사건(滿蒙問題私見, 1931. 5)」이란 글을 통해 만주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주 833
각주 833)
『太平洋戰爭への道』別卷資料編 ,朝日新聞社, 1963, 99~101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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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일본정신·일본주의라는 경직된 민족배외주의로 흐르는 우익운동이 일어났다.
만주와 내몽고에 대한 지배권을 수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이후 일본이 지 속적으로 추진해온 정책이었다. 이 때문에 포츠머스 조약, 21개조 조약, 니시하라 차관 등으로 많은 권익을 획득하여 왔으며, 만주 봉천을 중심으로 한 군벌을 양성하여 그 울타리로 삼았다.
1931년 9월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만주 펑텐 북방에 있는 류타오호[柳條湖]에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철도 선로를 계획적으로 폭파시켰다.주 834
각주 834)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1998), 124~12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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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중국 측의 파괴공작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만주 남부 일대로 군사적 침략행동을 확대한 일본군은 약 4개월 만에 주요 도시, 철도 연선지대 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였다. 11월에는 소·만 국경을 이루는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1월 초에는 만주남부 최후의 도시인 진저우를 함락시킴으로써 러허성을 제외한 만주 전역을 일본의 군사지배 하에 넣게 되었다.
일본 군사침략에 격분한 중국 민중이 전국 각지에서 거센 항의를 계속하자, 1932년 1월 일본군은 중국 내외의 눈을 다른곳으로 돌리고 동시에 반일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반일운동의 거점이었던 상하이로 무력전쟁을 확대하였다. 상하이에서 제19로군이 노동자와 농민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자 일본군은 예상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민중의 참전을 금지하고, 민중이 조직한 의용군을 해산시키자 제19로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일본은 3월 1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으로 하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수행하기 위한 괴뢰국가였다.주 835
각주 835)
이에 대해 윤휘탁 (1996), 『滿洲國硏究』,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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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기관 장관에는 중국인을 취임시켰으나, 관동군의 지휘 하에 있는 일본인 관리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군사·경찰도 일본이 지배하 였다. 법률·예산을 집행하는 입법원이 정부조직법상 있었으나, 만주국 최후까지 실제 설치되지 않아 형식적으로도 중국인의 정치적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에서는 전쟁 준비를 위한 광공업, 중공업에 중점을 두고 침략 확대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같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본격적인 무력침략에 대해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오히려 서구 열강의 국제적 압력과 직간접적인 개입을 기대하며 현지 중국군에 무저항을 지시할 정도였다. 1931년 9월 중순은 국제연맹 제12회 총회가 열리고 있던 때였다. 총회에서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된 중국은 국제연맹에 이를 제소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비난하였다. 국제연맹은 1932년 1월 리튼[Lytton]을 대표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보고서를 10월에 공개하도록 하였다.주 836
각주 836)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145~14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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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제스의 기대와 달리 서구제국주의 열강은 이 문제를 ‘국지적’ 분쟁으로 처리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권익에 ‘유불리(有不利)’ 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은 무력침략행동을 자행하는 일본을 오히려 두둔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미국 역시 일본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방어벽이란 관점에서 이를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소련도 일본의 대소공격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서구열강들은 일본의 만주침략을 강대국간의 권력정치 틀 안에서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반면에 국제연맹 내에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국가들은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며 강대국들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것은 이들 국가들에게 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행동이 큰 선례가 되어 자국의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튼 조사보고서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기 때문에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만주국의 대안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열강도 참여하여 공동으로 만주를 지배하는 절충안까지 제시하였다.주 837
각주 837)
비즐리 (2004), 28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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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현실적 힘으로 작동하는 결정이 될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강제된 힘이 동반되지 못한 국제사회의 결의는 한낱 선언에 그칠 공산이 컸다. 이 결정을 비웃기나 하듯이 일본군은 1933년 1월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하는 등 만주에서 화북까지 침략의 대상지역을 확대시켰다. 리튼 보고서가 1933년 3월 국제연맹에 채택됨에 따라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이후 일본은 화북지역에서 자원을 획득하고 만주지역 항일운동에 대한 중국 본토로부터의 지원을 끊기 위한 무력침략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렇게 일본은 서구제국주의 열강과의 국제관계가 더욱 멀어지면서 동시에 만주지배의 독점적 지배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중국 대륙에 대한 전면적 침략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 각주 832)
    피터 두으스, 220 쪽. 바로가기
  • 각주 833)
    『太平洋戰爭への道』別卷資料編 ,朝日新聞社, 1963, 99~101 쪽. 바로가기
  • 각주 834)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1998), 124~125 쪽. 바로가기
  • 각주 835)
    이에 대해 윤휘탁 (1996), 『滿洲國硏究』,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바로가기
  • 각주 836)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145~146 쪽. 바로가기
  • 각주 837)
    비즐리 (2004), 284 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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