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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등장과 청일전쟁

2. 일본 제국주의 등장과 청일전쟁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청국 중심의 전통적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제국주의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인들에게 큰 충격과 동요를 가져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근대화 정책을 통해 근대국민국가 수립에 나서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두각을 나타난 것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청국을 넘어 동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그 위치를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는 청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반면, 점차 일본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며 지역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이 변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이후 서양제국주의 국가들과 잇따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자본주의체제에 편입하였다. 군사적 위협에 따른 개항은 쇄국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던 일본의 막부정권에게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일본의 봉건사회가 급격히 붕괴되어 갔고, 일본은 서구제국주의국가들의 반식민지 시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국가적 독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서구열강들처럼 제국주의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유일한 것임을 확신하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근대화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주장하며 막부정권을 반대하는 도막파(倒幕派)가 형성되었다. 도막파는 천황을 내세우는 ‘왕정복고’ 를 주장하며 1868년 메이지[明治]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였다.주 782
각주 782)
조병한 (2006), 「19 세기 서구적 세계체제와 동북아질서」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 292~29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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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신정부는 1871년에는 정권기반을 확고하게 수립할 목적과 동시에 근대문물의 수용을 목적으로 대규모 외교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하였다. 신분제도의 폐지, 거주이전과 직업의 자유, 화폐제도의 통일, 학제 반포, 징병령 실시, 식산흥업(殖産興業)정책 등 근대화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주 783
각주 783)
김용덕 (1991),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 서울: 지식산업사, 36~4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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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제’ (天皇制)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국가로 발전하며 국가의 구성원들을 국가 및 국민, 종교의 이름으로 통합시키는데 나름대로 성공하였으나, 일본에는 국민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통합시킬만한 보편적인 종교나 이념이 부재하다는 현실적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즉 근대화 과정에서 동요하는 구성원들을 통합시키고 제국주의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합의 상징이 필요했던 것이다.주 784
각주 784)
박태준 (1999), 「일본제국주의 성격과 그 교육적 특징」 『교육사연구』제9집, 124~12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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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이들이 찾아낸 것이 전통적으로 익숙한 ‘천황’ 이란 존재였고, 이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 을 절대적 권위가 부여된 현인신(賢人神)으로 설정하고 제국헌법에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이것은 국민(國民)을 제국주의적 활동에 동원하는 근거로 활용되었고,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를 지배하는데 사용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핵심 논리로 자리 잡았다.
근대 국가체계의 기반을 세운 일본은 다른 서구제국주의국가들처럼 자본주의 상품시장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원료공급지의 획득을 모색하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수 없었고, 미국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필리핀을 침략할 수 없었던 일본은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타이완, 서쪽으로 조선과 중국대륙 지역에 대한 침략을 지향하게 되었다.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대외팽창을 시도하며 단기적으로 조선을, 장기적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일본의 대외침략은 1876년 강화도조약의 강제 체결 이후 가시화되었다. 일본은 쇄국정책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수립하게 되자, 조선정부를 압박하며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876년 9월에는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 포대 근처에 불법 침입시켜 조선 측이 발포하도록 유인하고, 곧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구실로 개국과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주 785
각주 785)
강재언 (1990), 『한국근대사』, 서울: 한울, 32~3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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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식은 서구제국주의 국가들이 상대국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수법이었다. 일본이 이를 습득하여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개국요구를 실현하는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대외침략은 1889년 제국헌법 공포이후부터 시작되었다. 근대적 국민국가건설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새로운 대외적 방향을 수립하였다. 당시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顯有朋]는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가의 독립과 방위는 일본의 주권선에만 그치지 않고 전략적으로 긴요한 주변지역까지를 지키는 데에 있다’ 고하였다.주 786
각주 786)
가토 요코 저·박영준 역 (2003), 『근대일본의 전쟁논리』, 서울: 태학사, 68~7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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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을 비롯한 중국대륙까지 ‘무력’ 을 통해서라도 이익선(利益線)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한편,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894년 청일전쟁이다. 오랫동안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강한 불신과 경계를 하고 있었다.
1882년 7월 조선의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국군이 조선내에 계속 주둔하며 내정간섭을 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의 젊은 개화파들은 청불 전쟁으로 청국군이 약화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군의 원조아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주 787
각주 787)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이광린 (1981), 『개화당연구』,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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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즉각적인 청국군 개입과 기대했던 일본이 청과의 전면적 무력 충돌이 불리하다며 그 태도를 바꾸자,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장차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청국과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10년 동안 계획적인 군제개혁과 군비확장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 청일전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군사적 대외침략의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894년 2월, 조선에서는 부패한 관리 척결과 무거운 세금에 반발한 농민군이 봉기하여, 그 세력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주 788
각주 788)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엮음 , 『한국근대사 강의』, 서울: 한울, 158~16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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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4월 30일 청국에 원병을 공식 요청하였다. 조선정부가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따른 일본군의 조선파병을 우려한 농민군은 조선정부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5월 7일 조선정부군과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체결, 휴전하였다. 농민군은 그 이튿날 전주성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우려대로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조선에 대한 일본군 파병의 계기가 되었다. 조선정부의 청국군 파병이 통고되자,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해 조선에 대한 일본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일본정부는 조선 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공식 요청하기 하루 전 내각의 결정과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이미 일본군의 조선파병에 대한 재가를 받은 상태였다. 일본군이 청국군과 거의 동시에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군 파병에 놀란 조선정부는 동학군의 기세가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 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조선정부는 일본군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 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군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테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군사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은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조선의 ‘자주독립’ 을 선포케 하고, 과거에 조선과 청국이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어 7월 25일 선전포고 없이 서해의 청국 함대에 대한 대대적인 기습,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도발했다. 육지에서는 일본 육군이 평양에 주둔한 청국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개입했다. 식량·부식물·군수 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국가적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다시 봉기한 농민군을 진압한 일본군은 9월 서해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하였다. 승리감에 한껏 고취된 일본군은 열강들의 강화 알선 제안까지도 무시하며, 10월 랴오둥반도로 진격하였다. 부패한 청군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뤼순[旅順]이 점령되었다.주 789
각주 789)
최재희(1989), 「중화민국질서의 동요」 『강좌 중국사Ⅴ』, 서울: 지식산업사, 244~24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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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잔혹한 행위는 국제적으로 큰 지탄을 받았다. 1895년 1월 일본군은 산둥성으로 진격하여 웨이하이웨이[威海衛]의 군항(軍港)을 함락시키고 청의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청 정부는 이홍장을 대표로 일본에 파견해 강화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주 790
각주 790)
오기평(2008), 『세계외교사』, 서울: 법문사, 227~230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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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은 일본이 요구한 타이완 지역(타이완과 펑후제도)의 할양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1895년 6월 1일 일본과 청국은 타이완을 접수하는 교섭과 공문의 조인식을 해상에서 거행했는데, 이는 청국 관리가 타이완 주민들의 거센 저항이 두려워 상륙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주 791
각주 791)
조훈(1999), 『강좌 중국근현대사』, 서울: 역사교양사, 78~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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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에 타이페이에 입성한 일본군은 압도적 무력임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인의 저항을 힘겹게 진압해 나갔다. 타이완에 살고 있던 청나라 관리와 중국계 이민의 일부가 청국에 반발하면서 타이완 민주국을 건국하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진압으로 타이완 민주국은 결국 멸망하였다. 이후에도 타이완인은 게릴라전을 계속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897년부터 1901년 사이에 타이완인 가운데 체포된 자 8,030명, 사살당한 자 3,473명이었다. 1902년 한 해 동안 실시된 이른바 대토벌에서는 포로를 재판에서 사형 시킨 자가 539명, 즉결처분으로 사살당한 자가 4,303명 등 많은 타이완인이 일본의 지배에 맞서 저항하다 희생당하였다.주 792
각주 792)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저·박원호 역 (1998), 중국근현대사, 서울: 지식산업사, 4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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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청일전쟁에서 식민지를 확보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식민지 보유국이 되었다. 획득한 배상금과 이윤으로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국제무대에서는 제국주의 패권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조선은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제압당하며 좌절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서구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적인 제국주의시대가 본격화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 각주 782)
    조병한 (2006), 「19 세기 서구적 세계체제와 동북아질서」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서울: 일조각, 292~293 쪽. 바로가기
  • 각주 783)
    김용덕 (1991),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 서울: 지식산업사, 36~43 쪽. 바로가기
  • 각주 784)
    박태준 (1999), 「일본제국주의 성격과 그 교육적 특징」 『교육사연구』제9집, 124~125 쪽. 바로가기
  • 각주 785)
    강재언 (1990), 『한국근대사』, 서울: 한울, 32~36 쪽. 바로가기
  • 각주 786)
    가토 요코 저·박영준 역 (2003), 『근대일본의 전쟁논리』, 서울: 태학사, 68~70 쪽. 바로가기
  • 각주 787)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이광린 (1981), 『개화당연구』, 서울: 일조각을 참조할 것 바로가기
  • 각주 788)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엮음 , 『한국근대사 강의』, 서울: 한울, 158~160 쪽. 바로가기
  • 각주 789)
    최재희(1989), 「중화민국질서의 동요」 『강좌 중국사Ⅴ』, 서울: 지식산업사, 244~245 쪽. 바로가기
  • 각주 790)
    오기평(2008), 『세계외교사』, 서울: 법문사, 227~230 쪽. 바로가기
  • 각주 791)
    조훈(1999), 『강좌 중국근현대사』, 서울: 역사교양사, 78~79 쪽. 바로가기
  • 각주 792)
    코지마 신지·마루야마 마츠유키 저·박원호 역 (1998), 중국근현대사, 서울: 지식산업사, 49 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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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등장과 청일전쟁 자료번호 : edeah.d_0005_002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