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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맺음말

서구문물수용 태도 차이가 국민 국가 수립과 좌절에 미친 영향

Ⅳ. 맺음말 : 서구문물수용 태도 차이가 국민 국가 수립과 좌절에 미친 영향

이상과 같이 서세동점기(1840~1910)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개항이 갖는 의미와 이에 따른 근대국민국가 수립과 좌절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 시기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 세 나라의 견외(遣外)사절과 유학생들이 보인 서구 문물수용 태도의 차이점이 국민국가 수립과 좌절에 미친 영향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결론에 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각 국의 서구 근대 수용 태도에 있어서의 차이점이 이들 나라들이 걸어 나간 판연히 다른 진로 제국(일본)·식민지(조선)·반식민지(중국)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이 서구문물의 우월성을 자각하고 그 수용에 나선 기점은 1860년 중화제국의 수도 북경이 영불연합군의 군홧발에 유린당한 다음이었다.주 771
각주 771)
동아시아 네 나라 중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구를 가장 먼저 접했던 베트남의 경우 아편전쟁이 터진 1840 년에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시도가 있긴 하였다 . 아편전쟁 이 터지자 서구열강의 침략이 베트남에도 곧 미치리라 생각한 민 망 황제는 몇몇 사절단을 페낭·바타비아·캘커타·파리·런던 등지로 보내 서구의 침략 가능성을 탐 지하는 한편 총포와 화약 등의 국방용 물자를 사들이고 서양 증기선을 구입해 개 량하기도 했다 . 그러나 유교 전통을 고수하면서 서구기술의 단면만을 모방하려한 그의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또한 1883 년에 이미 실질적으로 프랑 스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비교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 유인선, 앞의 책, p.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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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이 서양 문물 수용에 열중하던 1860년부터 20여년 동안 조선은 외부로 향한 창을 굳게 닫고 미몽에 사로잡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시간을 허송했다. 조선은 1880년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세운 이후 서구문물 수용의 길로 나섰지만, 중국은 이보다 19년 전인 1861년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수용하려는 양무(洋務)운동을 시작하였고,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문물과 제도, 정신 모두를 배우려 하였다. 서구 문물 수용에 나선 시기의 앞섬과 늦음의 차이와 함께 그 수용 태도의 다름도 삼국의 향후 진로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특히 삼국이 이 시기에 근대문물 수용을 위해 보낸 견외사절과 유학생의 파견시기, 회수, 인적구성, 인원수, 견문 또는 수학내용, 그리고 귀국 후 진로에 보이는 차이는 삼국의 운명이 엇갈리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구문물 수용에 가장 적극적이었고 시기도 빨랐던 일본은 이미 도쿠가와 막부 말에 서구열강에 사절단을 파견한 바 있었다. 1860년 60명의 사절이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62년에 유럽국가들을 순방한 사절단의 규모는 38명이었다, 그리고 1862년 네덜란드, 1865년 러시아에 유학생을 보냈으며,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죠슈[長州]와 사쓰마[薩摩]도 이 시기에 영국에 유학생을 밀파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는 1862년 유럽 시찰 경험을 바탕으로 서구 근대문명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면서 새로운 국가구상의 비전을 제시한 『서양사정(西洋事情)』(1866)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은 그 무렵 15만에서 2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은 일본인들에게 서구 근대의 산물인 국민국가 수립의 꿈을 효과적으로 전파한 최고의 매체였다. 일본에 서구 근대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은 비단 후쿠자와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부 말기에 외국의 공기를 쐰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열망이었다. 1864년 양이론자의 주장에 밀려 요코하마 쇄항을 담판하기 위해 유럽에 간 제3차 사절단 의 이케다 죠하츠[池田長發, 1837~1879]는 소기의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급거 귀국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막부에 헌책했다. 유럽 각국에 상주공사 파견, 모든 독립국과 화친조약 체결, 신문명 섭취를 위한 프랑스 유학생 파견, 서구 각지 신문과의 정보 교환, 일본 국민의 상업·학술을 위한해외 도항 허가 등, 유럽을 직접 보면서 얻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1865년 사쓰마 번의 유학생을 인솔하고 유럽에 갔던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1835~1885]는 교토~오사카간의 철도 및 전신 시설 가설, 조선과 총포 제조시설 설치를 계약하였으며, 1867년 프랑스에 파견된 구리모토 죠운[栗本鋤雲, 1822~1897]은 나폴레옹 대법전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서구 신문명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효창추록(曉窓追錄)』(1869)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나폴레옹 법전의 내용을 비롯해서 도시계획, 철도, 의회, 공채, 군대, 집약농업, 교육제도 등 구리모 토가 경탄과 선망을 금치 못했던 서양 문물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록 이런 사절과 유학생들이 섭취해온 서구 문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기에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 본의 국민국가 수립기에 여러모로 활용되었다. 막부 시기 사절단 출신들은 몇 년 후 이와쿠라 사절단의 서기관으로서 지난 시절 자신들의 경험을 발휘 했다. 명치유신 이후인 1871년 일본정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1825~1883]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이와쿠라 사절단을 구미제국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 사절단은 명치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등 4명의 참의를 포함 정부 각 부서의 중견 실무관리 41명 등 공식 사절 46명을 비롯하여 18명의 수행원과 유학생 4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한지 겨우 4개월, 근대국가로의 첫 걸음을 내디딘 신생 정부는 정부 수뇌의 절반을 사절단 대표로 삼고, 그 밑에 막부시절 사절 참가자들을 서기관으로 배속한데다가 정부 각 부처에서 선발한 전문 이사관까지 참여시킨 100명여 명 규모의 사절단을 구미에 파견한 것이다. 일본 이 메이지 유신 뒤에 서구에 보낸 유학생 수는 1869년 50명, 1870년 150명, 그리고 1873년에는 천명을 넘어섰다.주 772
각주 772)
일본의 해외문물 수용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田中彰 (1992), 『開國と倒幕 :日本の歷史 15』,集英社; ---(1994), 『岩倉使節團 『米歐回覽實記』:同時代ライブラリ 174』(岩波書店 ;田中彰·高田誠二編 (1994), 『《米歐回覽實記》の學制的硏究』,北海島大學圖書刊行會; 하가 토오루 저 ·손순옥 역 (1989), 『명치유신과 일본인』, 예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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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보다 먼저인 1861년 정부차원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모토로 서구의 기술 수용에 나섰던 중국은 정부 고위관료들이 주축이 된 해외 시찰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최초로 서구에 파견된 중국외교관은 미국인 앤 슨 버링에임(Anson Buringame) 이었다. 중국명 푸안천[蒲安臣]인 그가 이끈 중국인 사절단 즉 푸안천 사절단(Buringame Mission, 1820~1870) 이 1865년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1873년 숭후(崇厚, 1826~1893) 사죄사절단이 프랑스에 파견 되었지만, 시찰의 성과가 국정에 반영되지 못했다. 다만 1872년부터 1875년까지 4차에 걸쳐 120명의 유미유동(留美幼童) 즉 아동부미유학생(兒童赴美留學生)이 미국에 파견되었지만, 1881년 유미유동 대다수는 10 여년 만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886년까지 94명의 유학생이 유럽에 보내져 육군학과 해군학을 배웠지만, 1889년에서 1896년까지 단 한명의 유학생도 해외에 파견되지 않았다. 이들 중국 유학생들은 19세기말까지 정치에 참여할 수도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었다. 막말 영국 유학생 이토 히로부미나 무쓰 무 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처럼 제도를 연구하거나 개혁하는 일도 국정을 담당하는 일도 할 수 없었다. 1900년 이후에야 이들은 역사의 주역으로 재등장할 수 있었다. 1905년에야 중국 대신(大臣)5명이 6개월에 걸쳐 구미 14개국을 순방하고 정치제도를 시찰하는 ‘헌법 여행 ‘을 떠났으며, 그 즈음에야 만주족 청년과 고관의 자제들이 해외 유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일본유학생은 1902년 600명, 1904년 1,300명, 1905년 8,000명, 1906년 13,000명, 그리고 1907년에는 17,860에 달하였다. 구미로의 유학생도 1903년 미국에 10명, 1904년 벨기에 25명이 보내졌고, 1909년부터 1918년까지 미국에 409명의 유학생이 보내졌다.주 773
각주 773)
중국의 해외문물 수용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 권희철 역 (1974), 룽훙 저 , 『서학동 점기』, 을유문화사 ;李圭 (1985), 『環遊地球新綠』 『走向世界叢書』,嶽麓書社; 신승하 , 『근대중국의 서양인식』, 고려원 ;傳記文學出版社編 (1986), 『留美幼童書信集』,傳記文學出版社 ;林子勛 (1995), 『中國留學敎育史』,華岡出版社; 한혜영 역 (2005),嚴安生저, 『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 일조각; 첸강·후진초 저 ·이정선·김승률 역 (2006), 『청나라 정부의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 사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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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이 차이가 컸지만 각각 1860년과 1870년대에 서구 문물 수용에 나섰던 것에 반해 조선의 경우 18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서구 근대문물 수용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62명이 일본에 파견되어 약 4개월간 근대화된 문물과 제도를 조사해 돌아왔으며, 유길준과 윤치호 등을 유학하도록 하였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까지 일본 유학생은 100명에 이르렀으며, 1883년 미국과 유럽을 돌아 본 보빙사(報聘使)를 따라간 유길준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일본 유학생들은 소환되어 처형되는 비극을 빚었으며, 유길준도 미국유학을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1885년에서 1894년까지 10년간 원세개의 탄압과 민씨척족정권의 반개화정책으로 인해 유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갑오경장 때 일본 유학이 재개되어 1895~1896년간에 160 여명의 유학생이 일본에 보내졌으며, 보호국으로 전락한 1905년경 일본 유학생은 449명에 달했다. 그러나 1882년에서 1905년간 미국 유학생은 통틀어 64명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말가지 해외유학생 중 정규대학 교육을 받은 이는 윤치호와 서재필 정도이며, 이들의 유학도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이 없는 갑신정변의 실패가 빚은 도피성 유학에 불과하였다.주 774
각주 774)
개화기 유학생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 송병기 (1998), 「개화기 일본유학생 파견과 실태 (1881~1903)」, 『동양학』18; 박찬승 (2001), 「1890 년대 후반 관비유학생의 도일유 학」,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1, 고려대 아시아문화연구소; 허동현 (2004), 「개화기(1883~1905) 미국 유학생과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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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 수립에 조선이 실패한 이유는 견외사절단과 유학생이 서구 근대 문물 수용에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례로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구 근대가 이룩한 정신적·물질적 성과의 요체를 파악하여 이를 일본에 적용함으로써 서구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대부분 진취적인 성향의 인물이자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조사시찰단의 경우, 물론 능력이 출중한 이른바 정예 관료 출신의 조사들이었지만, 어윤중과 홍영식을 제외한 대부분은 국왕의 하명에 따라 피동적으로 참여한 봉건군주의 가신(家臣)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 수행원들은 조사들과의 사사로운 관계로 선발되었으며, 윤치호(尹致昊, 1865∼1945)나 유길준(兪吉濬, 1856∼1914)처럼 일본 유학이 예정되어 있던 사람들을 빼면 대개가 관직 경험이 없고 전문성이 결여된 인물들이었다. 그밖에 역관 출신의 통역과 하인 등 20 여 명도 조사들이 근대 문물제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큼 각성되지는 못했다. 특히 이와쿠라 사절단이 거둔 성과는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의 1876년 5권의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고스란히 담겨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되었다. 구메는 이 책에 “이 사절이 거둔 모든 성과를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편 집·간행”한다고 썼듯이, 이와쿠라 사절단원들은 천황이 아니라 바로 국민을 대표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같은 사고를 실천에 옮겨 자신들이 경험한 바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명치시대 일본인들은 한자를 도구로 서구 문물을 번역해 들이고 언문일치 문체를 개발해냄으로써 일본식 근대를 만들어 내었다. 근대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말과 글이 일치하는 구어체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국민통합의 기본 전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균일하고 균질한 생각을 공유하는 국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근대국가 건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이었고 그 관건은 언문일치의 문체를 만들어 내는데 달려 있었다. 따라서 이와쿠라 사절단은 자신들의 경험을 활자화하여 국민들과 공유하는 데 힘을 썼지만, 근대국민국가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조사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조사들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왕의 밀명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 보고하기 위해, 약 2개월 동안 서사(書寫)에 능한 아전들을 동원해 ‘문견사건(聞見事件)’ 과 ‘시찰기’ 라는 제하의 보고서들을 한문으로 작성했다. 이렇게 해서 비단으로 장정한 수서본(手書本)을 고종에게 바쳤다. 이들의 보고서에 담긴 근대 일본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는, 당시 조선의 개화와 자강을 열망하던 개화파를 비롯하여 식자층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부정적인 일본관과 서구 문물에 대한 시각을 허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사들의 보고서는 국왕이나 일부 위정자들이 정책을 결정할 때 참고자료로 이용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들이 거둔 성과가 일반 대중들에 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의 유학생들도 중국의 유학생들처럼 그들이 거둔 바 성과를 국정 운영에 반영하거나 국민들에게 돌리는 데 실패했다. 예컨대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언문일치의 문체 개발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깨달은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그는 1883년「세계대세론」이란 논설에서 국한문혼용을 처음으로 시도해 그가 유학을 통해 얻은 지적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해 저술한 『서유견문(西遊見聞)』(1895) 의 발간으로 결실을 맺었지만, 1천부를 찍은 이 책은 다음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며 유길준이 역적으로 몰려 망명객이 되어 버렸기에 금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기에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인들의 지견(智見) 향상에 공헌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과 달리 역사적으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인 최초의 예일대 졸업생이자 유미유동 감독이었으며,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에도 참여했던 룽훙[容閎, 1828~1912]이 쓴 『서학동점기(西學東漸記)』(1900)도 『서유견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주 775
각주 775)
허동현 (2002),「조사시찰단 (1881) 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 『한국사상사학』19, pp. 52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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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걸은 서로 다른 길, 제국과 식민지, 그리고 반식민지(중국)로의 분화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벌어진 서구문물 수용 태도나 시기의 늦고 빠름도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

  • 각주 771)
    동아시아 네 나라 중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구를 가장 먼저 접했던 베트남의 경우 아편전쟁이 터진 1840 년에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시도가 있긴 하였다 . 아편전쟁 이 터지자 서구열강의 침략이 베트남에도 곧 미치리라 생각한 민 망 황제는 몇몇 사절단을 페낭·바타비아·캘커타·파리·런던 등지로 보내 서구의 침략 가능성을 탐 지하는 한편 총포와 화약 등의 국방용 물자를 사들이고 서양 증기선을 구입해 개 량하기도 했다 . 그러나 유교 전통을 고수하면서 서구기술의 단면만을 모방하려한 그의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또한 1883 년에 이미 실질적으로 프랑 스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비교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 유인선, 앞의 책, p. 273. 바로가기
  • 각주 772)
    일본의 해외문물 수용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田中彰 (1992), 『開國と倒幕 :日本の歷史 15』,集英社; ---(1994), 『岩倉使節團 『米歐回覽實記』:同時代ライブラリ 174』(岩波書店 ;田中彰·高田誠二編 (1994), 『《米歐回覽實記》の學制的硏究』,北海島大學圖書刊行會; 하가 토오루 저 ·손순옥 역 (1989), 『명치유신과 일본인』, 예하 . 바로가기
  • 각주 773)
    중국의 해외문물 수용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 권희철 역 (1974), 룽훙 저 , 『서학동 점기』, 을유문화사 ;李圭 (1985), 『環遊地球新綠』 『走向世界叢書』,嶽麓書社; 신승하 , 『근대중국의 서양인식』, 고려원 ;傳記文學出版社編 (1986), 『留美幼童書信集』,傳記文學出版社 ;林子勛 (1995), 『中國留學敎育史』,華岡出版社; 한혜영 역 (2005),嚴安生저, 『신산을 찾아 동쪽으로 향하네』, 일조각; 첸강·후진초 저 ·이정선·김승률 역 (2006), 『청나라 정부의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 사북스 . 바로가기
  • 각주 774)
    개화기 유학생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 송병기 (1998), 「개화기 일본유학생 파견과 실태 (1881~1903)」, 『동양학』18; 박찬승 (2001), 「1890 년대 후반 관비유학생의 도일유 학」, 『근대교류사와 상호인식』1, 고려대 아시아문화연구소; 허동현 (2004), 「개화기(1883~1905) 미국 유학생과 민족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바로가기
  • 각주 775)
    허동현 (2002),「조사시찰단 (1881) 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 『한국사상사학』19, pp. 524~534.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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