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등장

1.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등장

1) 메이지 유신과 일본형 국민국가 수립
(1) 국민국가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국민국가는 ‘국경선으로 구획 지어지는 일정 영역을 보유하는 주권국가로서 영역 내의 국민들이 국민적 일체성을 공유하는 국가’ 를 뜻한다. 사실 국민국가는 보편종교 기독교의 지배 아래에 있던 중세의 쇠퇴 이후, 종교에 대체해 개인의 영원성을 국가와 민족에게서 찾으려 한데서 발생한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국민 내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 라고 정의한 사람은 베네딕트 앤더슨이다. 그는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유행』에서 “민족(nation)은 이미지로서 마음속에서 묘사되는 상상의 정치공동체(an imagined political community) 이다”고 정의했다.주 732
각주 732)
Benedict Anderson(1983),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New York: Verso, Rev. ed. 1991. 국내에서는 다음 서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 앤더슨 저·윤형숙 역 (1991),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나남; B. Anderson 저·崔錫榮역(1995), 『민족의식의 역사인류학』, 서경문화사 .
닫기
서구가 아닌 남미와 동남아시아 신생국에서의 국민형성의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분석하여, “민족”의 허구성을 명확하게 지적한 앤더슨의 지적이 나온 이후 국민국가에 대한 학계의 논의 방향이 크게 전환되었다. 최근 학설들의 개념 정의를 종합해 보면 비서구 지역에서의 국민국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주 733
각주 733)
西川長夫 (1995), 「日本型國民國家の形成 ―比較史的觀点から」,西川長夫·松宮秀治編 , 『幕末·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東京 :新曜社, pp. 3~42. 이 밖에도 국민 국가에 대한 학설에 대해서는 牧原憲夫編 (2003), 『‘私’にとっての國民國家論』,(日本經濟評論社), 참조 .
닫기

첫째, 국민국가는 그 정치체제가 군주제든 공화제든, 민주(民主)적이든 전제(專制)적이든 간에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어야 하며, 또 그 국가가 국민국가인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판정기준인데, 서구의 가치기준에 따른 문명화 정도가 그 기준이 되고 있다. 둘째, 국민국가는 국가통합을 위해 의회·정부·군대·경찰 등 지배·억압기구로부터 가족·학교·언론매체·종교 등 이념적 장치까지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며, 국민통합을 위한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셋째, 국민국가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국가는 세계적인 국민국가 체제에서 그 위치가 설정되며, 각각의 독자성을 표방하면서도 서로 모방하면서 유사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민국가는 민족 즉 국민을 통합하는 전제로서 경제통합(교통망, 토지제도,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 국가통합(헌법, 의회, 징병에 의한 국민군), 국민통합(호적, 박물관, 정당, 학교, 신문), 문화통합(국기, 국가, 서약, 문학, 역사서술)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다. 특히 비 서구 지역에서의 국민국가란 그 정체의 민주성 여하에 상관없이 소위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을 단위로 한 국가일 뿐이라는 것이다.
(2) 일본형 국민국가 수립
‘문명개화’ 로 상징되는 일본의 근대는 단순한 서구문물과 제도의 도입만이 아니라, 천황제를 부활시킨 메이지유신의 불가피한 산물로서 일본 고대의 복고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 이라는 일본 근대의 특수성이 나온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서구의 역상(逆像)’으로서의 일본 근대는 서구 근대가 ‘오해·오역’ 되거나 ‘날조된’ 것으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근대 국민국가들이 만들어낸 근대화 기제들을 이입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예컨대 육군은 프랑스, 해군은 영국, 교육은 미국, 황실은 영국, 헌법은 독일의 제도를 도입해 일본에 적합하게 변형하여 정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어 1880년대 초 반에 이미 일본형 국민국가의 토대를 닦았다.주 734
각주 734)
허동현 (2002), 「조사시찰단 (1881) 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한국사상사학』19, pp. 509~510.
닫기

첫째, 서구와 대등한 위치 확보를 위해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는 노력을 시동하였다. 일본이 삼권분립 체제 등 국민국가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서구 문명국 대열에 끼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주 735
각주 735)
山室信一 , 「明治國家の制度と理念」 『 (岩波講座 )日本通史 :近代 2』17, pp. 117~121.
닫기
또한 국민국가는 다른 국민국가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국민국가 체제에서 그 위치가 설정되므로, 이 같은 세계체제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이 서구의 기준에 맞는 통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주 736
각주 736)
西川長夫, 앞의 논문, pp. 5~6;佐佐木克 (1992), 『日本近代の出發 :日本の歷史 17』, 集英社, pp. 229~236.
닫기

둘째, 일본식으로 변형된 국가 통합장치를 만들어 나갔다.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한 1868년의 왕정복고는 단순히 고대 천황제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사실상 정치권력을 장악한 번벌(藩閥)세력이 정통성을 부여받기 위해 천황을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 이후 집권정부의 통치체제도 중국의 율령(律令)체제에 입각한 고대의 천황제를 복구한 것이라기보다,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통합을 위한 통치와 지배의 장치들을 일본식으로 변형·날조해 도입하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1880년 대 초반 일본은 집권적 정부가 사실상 모든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겉모습으로는 서구의 삼권분립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재야에서는 집권적 정부의 권력독점에 반발해 입헌정체를 수립하고, 민선에 의한 국회를 개설 할 것을 요구하는 자유민권(自由民權)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은 사법권의 독립과 근대 형법도 채택했으며, 징병제에 의한 국민군도 확보하고 있었다.주 737
각주 737)
西川長夫, 앞의 논문, pp. 30~38;安丸良夫 (1994), 「1850-70年代の日本 ―維新變革」 『(岩波講座 )日本通史 :近代 1』16,岩波書店, pp. 40~43; 오카 요시타케 저 ·장인성 역(1996), 『근대일본정치사』, 소화, pp. 18, 31; 김용덕 (1996), 「개항과 자강의 모색」, 박영재 외 , 『19 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pp. 122~128.
닫기

셋째, 자본주의를 향한 경제통합 장치도 갖춰 나갔다. 중앙정부의 주도 아래 회사제도 도입과 화폐제도 통합 등 경제제도의 개혁과 조세제도 개정 및 질록처분(秩祿處分)으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추진하여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고 해운업을 진흥해 육로 는 물론 해상 교통망을 뚫었으며, 우편과 전신 등 근대 통신제도도 도입했다. 특히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정비된 가로망을 갖춘 도시의 밤을 밝히는 가로등이 켜지고, 인력거와 마차가 오가는 등 문명의 이기(利器)들도 속속 등장했다. 이처럼 상품의 유통과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정보와 지식을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게 하는 근대의 표상으로서 공간의 문명화도 진행되고 있었다.주 738
각주 738)
西川長夫, 위의 논문, pp. 31~33;神山恒雄 (1994), 「官業から民業へ」高村直助編 , 『産業革命: 近代日本の軌跡 8』,吉川弘文館, pp. 47~49;差波亞紀子 (1994), 「汽船と道路」, 高村直助編 , 『産業革命 :近代日本の軌跡 8』,吉川弘文館, pp. 68~87.
닫기

넷째, 일본은 국민 창출을 위한 문화통합에 매진했다. ‘문명개화 ‘ 정책은 서구 근대를 이식하여 전 국민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서양의 기준에 맞춰 국민을 ‘문명화 ‘ 하려는 것이었다. 먼저 균일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신분제를 철폐하고 사민평등을 선언하였으며, 속지주의에 입각해 모든 국민을 동일한 호적제도 하에 파악하였다. 1872년에는 학제를 반포해 균일한 국민을 양성하는 장치로서의 학교설립을 규정하였으며, 인신매매의 금지 및 직업과 이주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873년에는 태양력을 채택하여 서구 열강과 동일한 시간체계를 수립하였고, 1871년에는 ‘신문지조례’ 를 만들어 정치비판을 엄격히 금지시킴으로써 신문을 정부 정책의 홍보 내지 이데올로기 전파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또 기독교 침투에 맞서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해 종교를 통한 문화통합을 시도하는 한편, 서구 기준에서 볼 때 야만적인 남녀혼욕을 엄금하는 등 풍속을 서구식으로 개조해 나갔다.주 739
각주 739)
大久保利謙 (1967), 「文明開化」 『 (岩波講座 )日本歷史 :近代 2』15,岩波書店, pp. 255~258;ひろたまさき (1975), 「啓蒙思想と文明開化」 『 (岩波講座 )日本歷史 :近代 1』14 (岩波書店, pp. 338~339 쪽.
닫기

사실 비민주적 집권정부로 특징지어지는 일본형 국민국가의 국가통합을 위한 장치들은 시민계층의 성장이 미미함으로 해서 다원화된 근대 시민사회를 창출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자본주의가 채 성숙하기도 전인 1870년대에 류큐 왕국을 병합하고 대만을 침략하며,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여 시장을 확대해 나가는 팽창주의 정책을 펼쳤던 일본은 1880년에 들어서면서 이미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침략의 길을 닦고 있었다. 1885년 3월 16일자「지지신보[時事新報]」에 실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탈아론」이 웅변하듯이, 그때 일본의 위정자들은 서양은 문명이고 동양은 야만이라는 비서양에 대한 서양의 차별논리인 오리엔탈리즘이 뇌리 속 깊숙이 파고들어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의 눈에 중국과 조선은 연대하고 협력할 상대가 아니라 일본이 ‘문명화’ 시켜야 할 침략의 대상으로 비춰졌다. 이처럼 메이지 일본은 그 태내에 군국주의 일본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통치·지배 기구는 일본처럼 시민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이나 중국이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였다.
2)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
(1) 청일전쟁(1894~1895)의 승리
1894년 조선에서 터진 동학농민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청일전쟁은 1871년 청일수호조규 체결 이래 4반세기 동안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쟁패전 최후의 군사적 대결이었다. 이 전쟁으로 신흥 제국 일본은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하였으며,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국제질서는 종지부를 찍었다.주 740
각주 740)
류영익 (1990),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p. 22; 김기혁 , 「이홍장과 청일전쟁」, 앞의 책, p. 158.
닫기
1894년 7월 22일 밤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작전 목표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포로로 삼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도화선을 당긴 경복궁 점령은 일본이 파병을 결정한 5월 31일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가 함락되던 그날, 일본 내각은 의회에 의해 탄핵당하는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일본은 내부의 위기를 밖에서 전쟁을 일으켜 해소하려 했다. 1885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사후 처리를 위해 청일 양국이 맺은 천진조약에는 조선에 출병 시 “통고”해준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일본은 이 조항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해 병력을 파견해 6월말 제물포에 주둔한 일본군은 6천명에 달하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조선군의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7월 23일 일본은 친일 괴뢰 내각을 구성하고 대원군을 다시 섭정으로 내세웠다. 친청 민씨 척족은 정권에서 밀려났으며, 국왕은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다. 25일 일본군은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26일 청의 수송선을 아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일본군은 9월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2천에 달하는 청의 북양육군을 사살했고 황해해전에서 북양해군을 궤멸시켜 재해권을 장악했으며, 10월에는 전장을 만주와 요동으로 확대해 여순(旅順)과 대련(大蓮)을 점령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주 741
각주 741)
中塚明 (1973), 『日淸戰爭の硏究』,靑木書店, pp. 110~126; 이광린, 앞의 책, pp. 297~ 307, 355.
닫기

이에 중화제국 청조는 신흥세력 일본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1895년 4월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으로 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으며, 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큰 이권을 챙겼다. 우선 조선의 ‘독립’ 을 승인시킴으로써 청조의 간섭을 배제하게 되었고, 요동반도와 대만 등의 할양으로 중국 침략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청조의 영사재판권을 철회시키고, 일본이 중국에서 서구열강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당시 청조 재정규모의 3배이자 일본 1년 예산의 4배가 넘는 약 2억 3천만냥(3억 4,500 만엔)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기반으로 1897년 서구와 마찬가지로 금본위제를 채택함으로써 서구와 안정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일본은 1896년 7,300만 엔이었던 군사비를 1903년에는 1억 5천만 엔으로 증액해 총예산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군비 증강에 매진했으며, 중공업 투자 확충을 통해 새로운 패권 경쟁국인 러시아와의 일전을 겨룰 수 있는 군비생산력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그 과정에서 천황제 절대주의 체제가 공고해지고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 등 재벌의 성장을 바탕으로, 1900년대 초에는 초기 독점자본주의체제를 형성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주 742
각주 742)
강동진 (1985), 『日本近代史』, 한길사, pp. 134, 148; 엔드루 고든 저 ·김우영 역 (2005), 『현대일본의 역사』, 이산, p. 229;藤村道生 (1973), 『日淸戰爭 :東アジア近代史の轉換點』,岩波書店, pp. 170~171;藤井松一 (1972), 「日露戰爭」, 『岩波講座日本歷史』18,岩波書店, pp. 123~136.
닫기

(2)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의 쟁패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3국간섭에 굴복함으로써 조선지배의 야망이 꺾이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법으로 1895년 10월 야만적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날로 증대되는 일본의 간섭과 횡포를 피해 국왕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한 이후 러시아 세력의 한반도 침투가 본격화되었다. 아관파천 기간(1895. 2. 11~1897. 2. 20) 동안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막고 지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일본의 노력이 계속되었는데, 그 대표적 사례로 1896년 5월과 6월에 각각 맺어진 ‘웨베르(Waeber) -고무라(小村)각서’ 와 ‘로바노프(Lobanov)-야마가타[山縣] 의정서’ 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아관파천 이후 우세해진 러시아 와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한 일본의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의도와는 달리 일본은 이렇다 할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러시아의 조선침투를 승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후자는 그 주 내용이 38 도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가 분할 해 군사적 완충지대를 설치해 충돌을 미연에 예방하자는 제안, 즉 한반도 분할통치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할 통치안은 러시아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일본과 전쟁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러시아는 일본에게 일정한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본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일본보다 군사적·재정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1897년 12월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게 되자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만주로 진출 방향을 전환하는 만주중시 정책을 택하고, 1898년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여순 지향형 정책(Port Arthur-orientation)’ 을 펼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사실상 포기한 바 있었다. 이후 1898년 4월 러시아는 일본과 ‘니시[西德二郞]·로젠(Rosen) 협정’ 을 맺어 일본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눈감는 대신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에서의 상업적·공업적 우위를 인정하는 타협을 하게 된다. 이 때 두 나라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 을 말하였지만, 이는 진정한 독립이 아닌 러시아와 일본 어느 한쪽의 조선에 대한 완전한 패권이 실현되지 않은 힘의 균형 상태임을 의미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주 743
각주 743)
A. 말로제모프 저 ·석화정 역 (2002),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pp. 141~166; 최문형 (2011),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pp. 208~216, 223~263; 송금영 (2004),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과 한반도 정책 (1860~ 1905)』, 국학자료원, pp. 279~288.
닫기

(3) 러일전쟁 승리와 동아시아 지역 패권국으로 부상
청일전쟁과 3국 간섭 이후 약체가 드러난 청조를 상대로 영토 분할과 이권 쟁탈을 위한 서구열강 사이에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중국에서 이미 지배적 위치를 다진 영국에 대해 러시아의 도전이 두드러졌다. 특히 ‘부청멸양(扶淸滅洋)’ 을 내걸고 외세를 배척한 의화단사건을 틈타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자국 이권 보호를 명분으로 18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초조해진 영국은 일본과 손잡고 러시아의 침투를 견제하려 했다.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이 맺어지고, 철병 압력에 직면한 러시아는 1903년 10월까지 전병력을 철군할 것을 명기한 만주 환부(還附)조약을 청조와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러일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주 744
각주 744)
최문형 (2004),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 지식산업사, pp. 99~158.
닫기

1904년 5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육군 13만은 만주주둔 러시아군 22만과 대격전을 벌여 요양과 봉천을 점령하고, 1905년 1월에는 7개월간의 악전고투 끝에 전략적 요충인 여순을 함락시켰다. 수세에 밀린 러시아는 발틱함대를 동원했지만,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버림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9월 5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으로 포츠머드에서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러일전쟁 중에 맺어진 카스라·태프트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러일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조선 지배를 영국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모두에게서 인정받았다. 영국과 미국은 자기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해양세력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주 745
각주 745)
최문형, 위의 책, pp. 235~320.
닫기
1905년 11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 8월에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병탄해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이미 움트기 시작한 정한론(征韓論)이 웅변하듯,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이전부터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사실 1894년과 1905년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를 흉내낸 “부차적 제국주의(secondly Imperialism)”의 침략 전쟁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의 경제 성숙도는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비제국주의의 제국주의적 실천”으로, 그리고 러일전쟁을 “영국을 위한 대리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주 746
각주 746)
박영재 (1987), 「일본근대사의 성격」 『오늘의 일본을 해부한다』, 한길사, p. 26.
닫기


  • 각주 732)
    Benedict Anderson(1983),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London·New York: Verso, Rev. ed. 1991. 국내에서는 다음 서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 앤더슨 저·윤형숙 역 (1991),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나남; B. Anderson 저·崔錫榮역(1995), 『민족의식의 역사인류학』, 서경문화사 . 바로가기
  • 각주 733)
    西川長夫 (1995), 「日本型國民國家の形成 ―比較史的觀点から」,西川長夫·松宮秀治編 , 『幕末·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東京 :新曜社, pp. 3~42. 이 밖에도 국민 국가에 대한 학설에 대해서는 牧原憲夫編 (2003), 『‘私’にとっての國民國家論』,(日本經濟評論社), 참조 . 바로가기
  • 각주 734)
    허동현 (2002), 「조사시찰단 (1881) 의 일본 경험에 보이는 근대의 특성」 『한국사상사학』19, pp. 509~510. 바로가기
  • 각주 735)
    山室信一 , 「明治國家の制度と理念」 『 (岩波講座 )日本通史 :近代 2』17, pp. 117~121. 바로가기
  • 각주 736)
    西川長夫, 앞의 논문, pp. 5~6;佐佐木克 (1992), 『日本近代の出發 :日本の歷史 17』, 集英社, pp. 229~236. 바로가기
  • 각주 737)
    西川長夫, 앞의 논문, pp. 30~38;安丸良夫 (1994), 「1850-70年代の日本 ―維新變革」 『(岩波講座 )日本通史 :近代 1』16,岩波書店, pp. 40~43; 오카 요시타케 저 ·장인성 역(1996), 『근대일본정치사』, 소화, pp. 18, 31; 김용덕 (1996), 「개항과 자강의 모색」, 박영재 외 , 『19 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pp. 122~128. 바로가기
  • 각주 738)
    西川長夫, 위의 논문, pp. 31~33;神山恒雄 (1994), 「官業から民業へ」高村直助編 , 『産業革命: 近代日本の軌跡 8』,吉川弘文館, pp. 47~49;差波亞紀子 (1994), 「汽船と道路」, 高村直助編 , 『産業革命 :近代日本の軌跡 8』,吉川弘文館, pp. 68~87. 바로가기
  • 각주 739)
    大久保利謙 (1967), 「文明開化」 『 (岩波講座 )日本歷史 :近代 2』15,岩波書店, pp. 255~258;ひろたまさき (1975), 「啓蒙思想と文明開化」 『 (岩波講座 )日本歷史 :近代 1』14 (岩波書店, pp. 338~339 쪽. 바로가기
  • 각주 740)
    류영익 (1990),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p. 22; 김기혁 , 「이홍장과 청일전쟁」, 앞의 책, p. 158. 바로가기
  • 각주 741)
    中塚明 (1973), 『日淸戰爭の硏究』,靑木書店, pp. 110~126; 이광린, 앞의 책, pp. 297~ 307, 355. 바로가기
  • 각주 742)
    강동진 (1985), 『日本近代史』, 한길사, pp. 134, 148; 엔드루 고든 저 ·김우영 역 (2005), 『현대일본의 역사』, 이산, p. 229;藤村道生 (1973), 『日淸戰爭 :東アジア近代史の轉換點』,岩波書店, pp. 170~171;藤井松一 (1972), 「日露戰爭」, 『岩波講座日本歷史』18,岩波書店, pp. 123~136. 바로가기
  • 각주 743)
    A. 말로제모프 저 ·석화정 역 (2002),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지식산업사, pp. 141~166; 최문형 (2011),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pp. 208~216, 223~263; 송금영 (2004),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과 한반도 정책 (1860~ 1905)』, 국학자료원, pp. 279~288. 바로가기
  • 각주 744)
    최문형 (2004), 『국제관계로 본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병합』, 지식산업사, pp. 99~158. 바로가기
  • 각주 745)
    최문형, 위의 책, pp. 235~320. 바로가기
  • 각주 746)
    박영재 (1987), 「일본근대사의 성격」 『오늘의 일본을 해부한다』, 한길사, p. 26.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등장 자료번호 : edeah.d_0005_001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