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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조약체제의 도입과 이원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형성

2. 서구적 조약체제의 도입과 이원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형성

1) 영국이 주도한 중국의 개항
(1) 아편전쟁과 남경조약 체결
1기 들어와 중국의 청조는 서구 열강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중화주의에 젖어 있던 중국은 서구 열강을 그들의 문물을 흠모해 멀리 바다 건너편에서 찾아온 서양 오랑캐쯤으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동양 과 서양 양대 문명의 대결이었던 1840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은 문명 간의 승패를 가른 분수령이 되었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경쟁국을 압도하며 동방무역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18세기 중엽 인도 지배를 둘러싼 경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영국은 이를 동방무역의 기지로 삼아 광동무역에서 절대적 우위에 서게 되었다. 청조 당국의 굴욕적 대우와 일방적인 통제 하에서도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이득을 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성적 무역 불균형으로 중국으로의 은의 유출이 심화되었다. 이에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해 무역적자를 보전하려 함에 따라 중영간의 대립과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사실 이 대결은 화이사상에 기초해 문화의 중국화 정도를 기준으로 해 서 나라의 서열이 정해지는 의례(儀禮)외교 위주의 중국 중심 세계질서인 조공체제와, 만국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인 조약체제 의 충돌이었다. 또한 이 전쟁은 무역을 세계 만민의 통치자인 천자가 중국 의 선진 문물에 굶주린 이민족에게 베푸는 은전으로 생각한 청조와, 국제 사회의 공동 이익과 각국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데 필수적 수단이며 국 제법에 따라 보장되어야 할 모든 문명국의 권리라고 주장한 영국의 대결이었다. 또한 이것은 중국 관료의 전통적인 관존민비 사상과 상업 천시 풍습 대 영국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주의 사상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아편전쟁은 실로 동양과 서양 문명 사이에서 벌어진 문화적·사상적 대결이었다.주 712
각주 712)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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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 전쟁에서 완패했으며, 그 결과 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조약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842년 중국은 영국과 불평등한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와 각각 망하(望廈)조약과 황포(黃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서구국가들은 편무적 협정관세로 관세(關稅)자주권을 박탈했고, 영사재판권(領事裁判權)으로 사법권을 침해했으며, 최혜국 대우를 강요해 각국이 획득한 모든 특권을 전 체약국(締約國)이 함께 향유하였다. 남경조약으로 중국의 쇄국주의가 무너지고 5개항을 영국에 개항했으며 홍콩도 할양하였다. 이처럼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영국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것을 우연한 패전으로 여겨 서구 문물의 선진성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서구를 따라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애로우호 전쟁과 북경조약 체결
5개항 무역으로 만족치 않았던 영국은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구실로, 주경권(駐京權)과 통상권의 확대를 목표로 다시 중국과 애로우 전쟁(1856~1860)을 개시하였다. 이 때 프랑스도 선교권과 통상권의 확대를 목표로 영국과 연합해 참전하였으며, 러시아는 영불연합군 철수를 중재하겠다는 핑계로 연해주를 요구했다. 이 전쟁은 1860년 10월 북경 함락으로 천자는 몽진하고 공친왕(恭親王)이 영·프·러의 요구 들어주는 것으로 그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맺어진 북경조약으로 중국은 공사의 주경(駐京)권과 양자강을 통한 내륙 항행권, 그리고 기독교 선교권도 허용하였다. 중국은 1860년북경이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함락되는 수모를 겪은 뒤에 비로소 서 양의 근대 무기와 기술의 우월성만은 인정하였다. 서양세력의 우세를 뼛속 깊이 새긴 중국 지배층은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무기를 배우고자 양무(洋務) 운동을 시발하였다. 양무운동을 계기로 청조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서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수 천년에 걸쳐 천하의 중심이요, 만방의 종주국을 자처해 온 중국이 서세동점의 거센 물결 앞에서 서구 국민국가들이 이끄는 근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데는 20년의 세월과 아편·애로우 양대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군사적 패배가 필요했다.주 713
각주 713)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11~50;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10. Key-Hiuk Kim(1980), The Last Phase of East Asian World Order: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328~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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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는 185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서방 4개국(영·미·프·러)와 체결한 조약들을 이행하는 방침을 세우고 그 실행기관으로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세워 체약국과의 외교·통상은 물론 양무운동을 이끌게 했다. 이처럼 조공체제의 종주국 중국은 서구 열강의 무력에 굴복해 남경조약과 북경조약을 맺어 서구의 조약체제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러나 청조는 청불전쟁(1884~1885)과 청일전쟁(1894~1895)에서 패하기 전까지 전통적 속국인 베트남과 조선에 대한 조공에 입각한 종속체제를 견지함으로써 종래의 패권을 놓지 않으려 했고, 그 와중에 두 나라는 조공체제와 조약체제가 병존하는 이원적 국제질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 지리적 단절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일본은 서구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제국주의 국가의 반열에 오를 꿈을 꾸기 시작했다.
2) 미국이 주도한 일본 개항과 메이지 유신 후 복고외교
(1) 가나가와 조약과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1663~ 1712]가 1639년 쇄국령을 내린 이후, 네덜란드와 중국 두 나라와의 소규모 무역을 제외하고는 외부 세계를 향한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서세동점의 파고가 거세게 밀어닥치면서 서구 열강들은 굳게 닫힌 일본 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중국의 개방을 주도한 나라가 영국이었다면, 일본을 개방한 주역은 미국이었다. 영국이 일본을 보잘 것 없는 섬나라로 간주하고 주로 중국시장 개척에 주력하였다면, 18세기 후반 대서양 연안국가로 출발해 1848년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가로채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미국은 태평양 진출을 명백한 운명(the Manifest Destiny)으로 확신하였다. 특히 아편전쟁에 패배한 청조가 영국의 패권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입각해, 1844년 미국과 망하조약을 체결하여 5개항의 무역을 허용함에 따라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무역은 날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자 종래 동부에서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거 쳐 중국 광동무역에 임했던 미국은 서부에서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직행 하는 항로 개척에 나섰다. 미국은 직항로 개설의 관건인 태평양 해역에서 식 품과 연료를 공급해 주고 태풍 등 해난 시 피난할 수 있는 기항지를 제공해 줄 대상으로 일본을 주목했다.주 714
각주 714)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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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게 있어 일본의 지리적 위치는 당시 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가기 위해 반드시 개항시켜야 할 디딤돌과 같았다. 1852년 미국 정부는 페리(Perry)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였으며, ‘흑선(黑線)’ 4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이듬해 7월 포함외교를 전개해 무력시위로 막부를 압박했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이후 서구 열강의 무력을 두려워하고 있던 막부는 중국처럼 비참하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1854년 3월 미국과 가나가와[神奈川]조약이라 불리는 화친(和親)조약을 맺었다. 미국이 일본 개항에 나선 주된 이유는 일본과의 통상보다 중국 시장으로 가는 접근로 확보에 있었다. 이는 미국이 벽지에 위치한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函館]두개 항구를 개항해 미국선박에 식품과 연료를 공급하고 난파선의 구호를 약속 받았을 뿐 무역에 대해서는 추후 협의하기로 한데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1854년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듬해 네덜란드와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200년 동안 견지해온 일본의 쇄국정책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주 715
각주 715)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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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인들은 서양 사람을 야만인들이라고 경멸했다. 하지만 막부가 서양의 무력 위협에 굴복하여 서양과 통상조약을 맺자, 적에게 굴복하는 것을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기는 무사들은 이를 견디기 어려운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무사들은 일본은 신이 세운 신성한 국가라는 건국신화에 기초해 신의 직계후손인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존경하고 숭배해야 한다는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이 거세지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있던 천황의 조정은 힘이 실리는 데 비해 막부의 권위는 점점 추락했다.주 716
각주 716)
石井孝 (1972), 『日本開國史』,東京: 吉川弘文館, pp. 14~99;田中彰 (1922), 『開國と倒幕:日本の歷史 15』,東京 :集英社, pp. 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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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론이 비등해 막부의 개방정책이 난관에 봉착해 있던 당시 초대 주일 미국 총영사 해리스(Townsend Harris) 가 부임해 통상관계 수립을 위한 교섭을 요청하자 막부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애로우전쟁이 일어나 영·프 연합군이 천진을 점령했으며,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일본원정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에 휩싸인 막부는 양이론자들을 무마할 목적으로 200여 년래의 전통을 깨트리고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 조약 체결에 대한 승인을 사전에 받으려 했다. 그러나 황실의 거절을 당해 권위가 실추된 막부는 1858년 6월 독단적으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조인했다. 그 결과 미국과 통상을 허용 해 기존의 2개항 외에 추가로 나가사키[長崎]등 4개항 개방, 치외법권 부여, 그리고 미국인에 대한 신앙의 자유 등을 허용하였다, 나아가 막부는 8월 네덜란드·러시아·영국, 그리고 10월에는 프랑스와 차례로 미국과 맺은 조약과 비슷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220년간 이어져 온 쇄국의 빗장은 완전히 열리고 도쿠가와 막부도 청조와 마찬가지로 서구제국의 우월한 군사력에 무릎을 꿇고 근대적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주 717
각주 717)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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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이지 유신과 복고외교: 조 ·일 국교조정과 청일수교
막부가 서구 국가들에 굴복해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것을 계기로 존왕양이 운동은 반(反)막부 운동으로 전환하면서, 존왕의 이름으로 권위가 실추된 막부를 무너뜨리고 조정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67년에는 사쓰마[薩摩]번과 조슈[長州]번의 하 급무사들이 중심이 되어 막부타도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자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당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熙: 1837~1913]는 이들이 막부타도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천황의 조정에 정치권력을 돌려주겠다는 제의를 했고, 이 제의가 받아들여짐으로써 마침내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왕정복고(王政復古)가 단행되었다.주 718
각주 718)
松尾正人(1994), 「倒幕と統一國家の形成」,田中彰編, 『明治維新 :近代日本の軌跡 1』東京: 吉川弘文館, pp.11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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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천황친정을 이끈 메이지유신의 주동세력들은 모두 양이론자로 출발했으나, 반막부 투쟁의 과정에서 양이론의 비현실성을 자각하고 집권 이후 종래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어 전면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신정권 발족 후 최초의 외교상 조치가 막부가 체결한 외국과의 조약과 협정에 대한 존중을 통보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식 조약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그러나 청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일본도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서열과 위계를 따지는 전통적인 국제질서의 잣대를 폐기하지 않았다.주 719
각주 719)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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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고를 내세운 메이지 유신은 서구 근대의 도입이자 일본 고대로의 복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유신 초 일본 정부는 고대 천황제 하의 국제질서로의 회귀, 즉 중국의 천자와 일본의 천황이 동격이 되는 ‘복고외교’ 를 펼쳐, 천황의 신하였던 도쿠가와 쇼군과 항례로 교류하던 조선 국왕과 천황이 대 등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1868년말 메이지 정부는 조·일 양국 사이에서 외교통상 사무를 담당하여 온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천황의 서열상 우위를 분명히 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조선에 보내 온 대마도주의 서한에는 조공체제 하에서는 중국의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상(皇上)’ 과 ‘황조(皇祚)와’ 같은 일본 천황을 칭하는 용어가 들어 있었다.주 720
각주 720)
이광린 (1981), 『한국사강좌: 근대편』일조각, pp.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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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복고(復古)외교’ 의 배후에는 백제와 신라가 천황 친정 하 일본조정에 입공하였다는 억설에 입각해 고대의 천황제가 복고되었으니, 조선 국왕이 입공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불성설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조선 측의 서한 접수 거부로 일본 천황의 조선 국왕에 대한 서열상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일본 외무성은 청조와 상호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조약을 맺어 천황과 천자가 동격임을 확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청조와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천자의 책봉을 받는 조선 국왕은 천황의 하위에 서게 되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해도 명분이 선다는 계산이었다. 중국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는 복선이 깔린 일본의 입약 요구에 접한 청조 당국자들은 일본이 서구와 결탁해 적대세력화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서구기술을 수용해 무비를 키우고 있던 일본을 서 구침략에 대응하는 우군으로 만들려는 심산으로 협상에 응했다. 교섭과정에서 일본은 천황과 천자를 조약 서문에 나란히 병기해 두 원수가 동격임을 분명히 할 것과 최혜국 대우를 요구했지만 청조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청조는 양국 간 호혜와 평등의 원칙은 수락하였으며, 그 결과 1871년 9월 청일 수호조규가 조인되었다. 청조의 협상 대표자 이홍장(李鴻章)은 이 조약의 제1조에 상호 ‘방토(邦土)불가침 조항’ 을, 그리고 제2조에 타국과의 분쟁 시 양국의 상호 원조·조정을 규정한 조항을 넣었다. 방토의 방(邦)은 속방을 의미한 것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한 것이며, 제2조는 일본이 중국에 적대적인 서방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주 721
각주 721)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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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는 서구와 조약관계를 맺었지만 여전히 동아시아 제국과의 종속·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청조가 입공하지는 않았지만 종래 속방으로 간주하던 일본과 서구식 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국가 사이의 상호 관계도 조공체제에서 벗어나 조약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약 체결 과정에서 보여준 청조나 일본 당국자들의 태도는, 그들이 아직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이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주 722
각주 722)
김기혁, 「강화도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앞의 책,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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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이 주도한 조선 개항
(1) 일본의 대조선 외교 방침 전환 : ‘탈아’ 외교의 전개
청일 간에 조약 체결 교섭이 한창이던 1871년 일본 국내에서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이 단행되어 중앙집권의 근대식 국가로 탈바꿈하자, 메이지 정부 는 대외관계에서도 종래의 국가 간 서열을 따지는 복고외교에서 벗어나 서구식 국제질서에 맞춘 탈아 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벗어나 서구세계의 일원이 되자는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하는 탈아 외교는 서구를 향해서는 도쿠가와 막부 시절 체결한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그리고 동아시아 제국을 향해서는 서구열강이 이들 나라에 강요했던 불평등조약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주 723
각주 723)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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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탈아 외교 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서양의 진출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촉발된 해외웅비론(海外雄飛論), 다시 말해 아시아 침략론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메이지정부는 탈아외교의 일환으로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팽창주의 정책을주 724
각주 724)
박충석 (1996), 「근대일본에 있어서 국가주의의 형성」, 박영재 외 . 『19 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pp. 107~110;旗田巍저·이기동 역 (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pp.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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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쳤으며, 그 결과 정한론(征韓論), 류큐[琉球]병합, 대만 출병이 이어졌고 조선과의 강화도조약 체결도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2) 대원군 실각과 강화도 조약 체결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손에 들어가 조선과 국경을 맞대었을 때, 열강은 조선이 러시아에게 장악될 경우 일어날 사태를 우려해 공 로증(恐露症)에 몸을 떨었다. 중국은 울타리를 잃은 뒤 겪게 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두려움에, 일본은 조선이 열도를 겨누는 서늘한 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영국은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뻗어 나올까 우려했다. 북경 조약이 맺어진 1860년 10월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의 진화를 모색하고있던 그때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집정하의 조선왕조는 여전히 중화 문명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쇄국의 담을 높이 쌓고 있었다. 특히 그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 이후 ‘양이(洋夷)’ 들에게 굴복해 양무운동을 펴고 있던 청조당국을 멸시하고 이들의 권고를 무시하면서, 서구 열강과 일본 등에 대해 극단적인 쇄국양이 정책을 펼쳤다. 깊은 잠에 빠진 대원군 치하 쇄국 조선은 청일 사이의 조약 체결 소식에도 깨어 날 줄 몰랐다. 일본이 청조에 대해 칭신(稱臣)하지 않으며, 양국 사이에 교역이 진행될 것이라는 연행사의 보고에도 흥선 대원군 치하의 조선은 변화를 모색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66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제너럴셔만(General Sherman)호 사건, 그리고 1871년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라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무력충돌을 빚었고, 메이지 일본과는 비타협적인 고자세 외교로 일관했다.주 725
각주 725)
류영익 (1993), 「흥선대원군」 『한국사시민강좌』13, 일조각, pp. 105~107; 김기혁,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앞의 책, pp. 86~93; 이광린, 앞의 책,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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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말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일본에 대한 유화책이 모색되고, 1874년 8월 청조는 일본군 5천명이 조선 침공을 준비 중 이며, 미국과 프랑스도 공동 출병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왔다. 충격을 받은 조선정부는 일본에 선린관계 회복을 청했지만, 일본은 “힘과 압력”에 의한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1875년 일본은 미국이 자국의 문호를 개방시킬 때 사용했던 포함외교를 그대로 조선에 구사해 쇄국의 기치를 내리게 하였다. 1876년 2월 6척의 군함과 800명의 군대가 에워싼 가운데 체결된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왕조는 동아시아 지역 국가 중 가장 늦게 서구중심의 국제질서인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 이 조약에는 조선이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주권을 보유한다는 조항이 일본 측의 주장으로 제1조로 들어갔다.주 726
각주 726)
김기혁 ,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pp. 9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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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서구적 원칙에 입각해 조일관계를 재규정해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함으로써, 조선 침략의 길을 튼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개항은 서구열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래 중국 중심 세계질서에서 교린관계를 맺고 있던 일본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그 특수성을 보인다.
4) 베트남 개항과 식민지 전락
(1) 프랑스 침략과 제1, 2차 사이공 조약 체결
베트남은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중국과 일본 보다 서구열강과 접촉이 가장 빨랐다. 그러나 1802년 베트남의 통일을 완성한 응우옌[阮]왕조는 유교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 위정자들은 유학에 소양이 깊고 중국 문화를 이상시 했기 때문에 ‘유럽의 만이(蠻夷)’ 특히 가톨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베트남에 대한 침략을 주도한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의 활약으로 가톨릭 개종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늘어만 갔다. 이들이 베트남 사회의 지도이념인 유교의 가르침과 의식을 거부하자, 개종자는 물론 프랑스인 선교사까지 처형하는 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쳤다.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의 위정자들은 무역과 포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의 기조를 늦추지 않았다.주 727
각주 727)
유인선, 앞의 책, pp. 266~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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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 대한 쇄국정책을 더 강화한 뜨득제[嗣德帝]가 1853년 궁중쿠데타 사건 이후 2만 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를 처형하는 박해를 가하자, 해외팽창정책을 추구하던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빌미로 베트남 침략에 나섰다. 왜냐하면 그는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청국과 종주·종속관계를 맺고 있는 베트남까지 그 세력을 확장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미얀마, 말레이 반도, 중국, 서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영국에게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화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주 728
각주 728)
송정남 (2010), 『베트남 역사 읽기』, 한국외국어대학 출판부, pp. 3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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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조약의 체결로 에로우호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858년에 시작된 프랑스의 침략은 전쟁이 끝난 1860년 9월 본격화되었다. 프랑스군이 1862년 남부의 자딘성[嘉定省]을 비롯한 동부의 대부분을 점령한 상황에서, 북부지 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베트남 정부는 하는 수 없이 1862년 6월 이른바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주 내용은 포교자유 인정,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 할양, 그리고 다 낭 등 세 항구의 개항이었다. 1867년 프랑스는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코친차이나 서부 3성마저 점령하였다. 국제정세의 동향에 무감각했던 베트남의 위정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변혁을 도모하지 못했다. 개혁이 지지부진한 사이 프랑스는 중국 시장으로 연결되는 무역로 확보를 위해 침략의 방향을 중국 윈난성과 맞단 북부지역으로 돌렸다. 왜냐하면 남부의 메콩강은 항행에 부적절하고 오히려 통킹에서 홍 강을 통해 윈난으로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프랑스는 윈난으로 진출하려는 영국에 맞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주 729
각주 729)
유인선, 앞의 책, pp. 275~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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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프랑스 무기상이 무기와 소금을 싣고 홍 강을 통해 윈난으로 가려다 베트남 관리와 충돌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실로 코친차이나 총 독 가르니에(Francis Garnier) 는 무력으로 하노이와 통킹 델타 지역을 점령했지만, 복병을 만나 전사하고 말았다. 보불전쟁 패배, 파리 코뮌 성립, 내전의 발생 등 연이은 악재로 베트남에 쏟을 여력이 없던 프랑스는 베트남과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남부 6성에 대한 주권 확보, 프랑스의 국익에 반하는 제3국과의 조약 체결 금지, 홍 강의 개방, 영사의 하노이 주재, 그리고 가톨릭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왕래 보장 등을 얻어냈다. 또한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군함과 무기의 제공 등을 약속하며 베트남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국내사정으로 잠시 유보 했을 뿐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주 730
각주 730)
유인선, 위의 책, pp. 28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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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망 조약 체결과 프랑스 식민지 전락
제2차 사이공조약에 담긴 ‘베트남은 독립국가’ 라는 조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시 일본이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주권을 보유한다 라’ 는 조항을 삽입한 것처럼, 청조의 종주권을 부정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초읽기에 들어간 식민지화의 위협 아래에서 베트남정부는 마지막 희망을 종주국 청조에 걸 수밖에 없었다. 1876년과 1880년두 번에 걸쳐 조공사절을 중국에 보냈지만, 아편전쟁과 애로우호 전쟁 두 차례의 전쟁에서 서방에 패한 청조는 베트남의 기대에 부응할 힘이 없었다. 이제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천여년 이상 유지되었던 종주·종속의 오랜 관념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으며, 힘의 논리에 따라 프랑스가 베트남의 새로운 종주국으로 부상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남부 코친차이나 6성을 빼앗기고도 베트남의 위정자들은 1876년과 1880년 두번에 걸쳐 종주국 청조에 조공사절을 파견해 도움을 청했을 뿐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근대로의 개혁을 추동하지 못했다. 온건 공화파의 집권으로 국내사정이 호전되자 프랑스는 영국 등이 베트남과 통상을 요구하는 상황에 접해 베트남의 식민화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1881년 두 명의 프랑스인이 제2차 사이공조약으로 통항권을 얻은 홍 강을 거슬러 중국의 운남으로 항행하던 중 흑기군에 의해 저지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는 무력을 동원해 하노이를 점령 하고 통킹 델타 지역을 손에 넣었다. 1883년 2월 식민지 팽창주의자인 쥴 페리(Jules Ferry) 가 집권한 이후 대규모 병력을 증원한 프랑스의 공세에 밀린 응우옌 왕조는 그해 8월 휴전을 청해 이른바 아르망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국제법상 남부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이고 중부와 북부는 보호령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를 폐지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왕조가 명목상 존속했지만, 이는 명목일 뿐 실질적으로 베트남의 모든 영토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주 731
각주 731)
유인선, 위의 책, pp.287~292; 송정남, 앞의 책, pp.336~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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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712)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5. 바로가기
  • 각주 713)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11~50;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10. Key-Hiuk Kim(1980), The Last Phase of East Asian World Order: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328~351. 바로가기
  • 각주 714)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50~58. 바로가기
  • 각주 715)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2~13. 바로가기
  • 각주 716)
    石井孝 (1972), 『日本開國史』,東京: 吉川弘文館, pp. 14~99;田中彰 (1922), 『開國と倒幕:日本の歷史 15』,東京 :集英社, pp. 31~86. 바로가기
  • 각주 717)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13~14. 바로가기
  • 각주 718)
    松尾正人(1994), 「倒幕と統一國家の形成」,田中彰編, 『明治維新 :近代日本の軌跡 1』東京: 吉川弘文館, pp.114~139. 바로가기
  • 각주 719)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15. 바로가기
  • 각주 720)
    이광린 (1981), 『한국사강좌: 근대편』일조각, pp. 55~56. 바로가기
  • 각주 721)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p. 16~19. 바로가기
  • 각주 722)
    김기혁, 「강화도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앞의 책, p. 71. 바로가기
  • 각주 723)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20. 바로가기
  • 각주 724)
    박충석 (1996), 「근대일본에 있어서 국가주의의 형성」, 박영재 외 . 『19 세기 일본의 근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pp. 107~110;旗田巍저·이기동 역 (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pp. 17~21. 바로가기
  • 각주 725)
    류영익 (1993), 「흥선대원군」 『한국사시민강좌』13, 일조각, pp. 105~107; 김기혁,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앞의 책, pp. 86~93; 이광린, 앞의 책, p. 58. 바로가기
  • 각주 726)
    김기혁 ,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pp. 93~119. 바로가기
  • 각주 727)
    유인선, 앞의 책, pp. 266~275. 바로가기
  • 각주 728)
    송정남 (2010), 『베트남 역사 읽기』, 한국외국어대학 출판부, pp. 320~321. 바로가기
  • 각주 729)
    유인선, 앞의 책, pp. 275~285. 바로가기
  • 각주 730)
    유인선, 위의 책, pp. 285~287. 바로가기
  • 각주 731)
    유인선, 위의 책, pp.287~292; 송정남, 앞의 책, pp.336~339.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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