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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과 중국 중심 국제질서였던 동아시아 3국

1. 서세동점과 중국 중심 국제질서였던 동아시아 3국

1) 중국 중심 국제질서와 동아시아 3국의 위치와 차이: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
조선,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제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한문문화권에 속한 동문(同文)의 나라였다. 세 나라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중국의 영도 하에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주 699
각주 699)
김기혁(2007),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근대 한·중·일 관계사』, 연세대 출판부,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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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제국이 등장한 7세기 초 동아시아 세계에 형성된 중국 중심의 독특한 국제질서는 16세기 초두에 시작한 서구제국의 동방진출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까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 세계질서는 중국을 중화(中華)라 하여 문명으로 높이고 주변의 다른 나라를 이적(夷狄)이라 하여 야만으로 천시하는 화이(華夷)사상, 그리고 자연계와 인간계에는 서열상 상하의 구분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교사상에 기초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고 주변국을 속방(屬邦)으로 하는 종속(宗屬)체제로 구현되어 있었다. 또한 이 종속체제는 중국의 절대적인 권위와 우위를 바탕으로 모든 속방이 그 권위에 승복하는 전통적 대외관리체계인 조공(朝貢)제도를 통해 유지되었다.주 700
각주 700)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위의 책, p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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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제도 하에서 중국은 조공과 책봉(冊封)을 통해 속방을 관리했다. 근대 이전 조선과 일본, 베트남은 모두 중국의 영도 하에 형성된 동아시아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중국과 국경을 접한 조선과 베트남 두 나라와 바다로 격리된 일본은 중국문화의 수용 양상이나 중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대응이나 태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가진 일본은 중국문화 수용이나 국제질서에 대한 대응에 있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거리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던데 반해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성어가 잘 말해주듯이 중국의 안보에 직접적 이해가 걸린 한국은 중국의 변방인 남부와 접한 베트남 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다. 한국은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인 수와 당이 차례로 흥기한 3국시대부터 그 직접적인 압력과 위협을 면하기 위해 책봉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형태로 정비된 종속관계를 바탕으로 한 화이질서가 동아시아 지역에 확립된 것은 명이 들어 선 이후였다. 1401년 조선 태종이 명에 의해 국왕으로 책봉됨에 따라 전형적인 종속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당에 견당사를 파견했지만 실질적인 종속관계를 맺지 않았고 9세기 중엽 관계를 단절한 이후 명이 들어서기까지 공식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던,주 701
각주 701)
李則芬(1982), 『中日關係史』,臺灣 :中華書局, p.108. 7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65~66. 8 유인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pp.16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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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로마치[室町]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일본국왕으로 명에 의해 책봉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종속체제에 편입되었다.주 702
각주 702)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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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정화(鄭和)에게 함대를 끌고 동남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의 정벌을 명했던 영락제(永樂帝)는 1406년 당 나라 때까지 명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의 병합을 추진했다. 명의 지배는 베트남인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20년 만에 끝났지만, 반명투쟁의 지도자로 360년 동안 존속한 레[黎]왕조를 세운 레 러이는 중국에 비해 현저히 약한 국력을 고려해, 신왕조의 안정을 위해 1431년 명에 책봉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 중국과 종속관계를 맺었다. 이 처럼 명의 등장이후 조선, 일본, 베트남 세 나라가 명과 종속관계를 맺은 것은 화이사상에 입각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전동아시아 세계에 걸친 보편적 완성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주 703
각주 703)
유인선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pp. 166~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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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세계질서 아래에서 특히 조선과 일본은 각자의 위치나 위상에 관한 견해나 입장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란 외교원칙이 잘 말해주듯이, 명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고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을 자각 하며 중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해 정치적·문화적으로 거의 완전한 일체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대내적으로는 천황이, 대외적으로는 쇼군[將軍]이각 각 국가의 수장으로 행세한 이원적 원수제 국가였던 일본은 내심 조선국왕을 일본천황과 동격일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동아시아 세계 내에서 예외적 존재라는 자화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명과 무로마치 막부와의 책봉관계는 단속적으로 유지되다가 16세기 후반 막부의 붕괴로 소멸되었으며,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서 중국의 권위에 도전한 임진왜란이 끝난 뒤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는 무로마치 쇼군들이 명의 책봉을 받은 데 대한 일본국내의 비판을 고려해 이후 중국과 공식적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책봉을 받는 조공국인 조선의 국왕과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동격으로 교류하는 교린관계를 다시 맺었다. 이와 같이 일본은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을 통치한 청조와 종속관계를 맺은 조선과 베트남과 달리 책봉을 받거나 조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어 있었다.주 704
각주 704)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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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쿠가와 시대에 일본은 정치·외교적으로 중국에서 완전히 독립 된 국가로 동아시아 화이질서 내에서 예외적 존재를 자처하였으며, 이는 대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기인하는 바 크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은 일본이 중국 중심 화이질서를 수용 하면서도 종속적 책봉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이는 주관적 견해에 지나지 않으나 일본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점한 것 같은 자부심을 갖게 만들었다.주 705
각주 705)
일본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전중건부(1975), 『중세대외관계사』, 동경대학출판회, pp.16~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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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의 천황과 중국의 천자가 동격이라는 일본 별격(別格)론 같은 근대 일본 국수주의의 기원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그때 이미 조선이 고대에 일본에 입공하였다는 한3국(韓三國) 일본입공설이 제기되는 등 천황이 재집권할 경우 조선에 대한 서열상 우위를 주장하며 교린관계를 부정할 소지가 있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이후 양국의 국교조정문제가 불거짐으로써 현실화 되었다.주 706
각주 706)
김기혁, 위의 논문, pp.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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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세동점의 격랑 속 동아시아 3국의 대응 양태
1405년부터 총 7차에 걸린 정화가 이끄는 대 함대를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연안까지 보내, 이들 지역을 중국의 조공체제에 편입시킨 바 있었던 명 조(明朝)는 1433년 돌연 해외원정을 중단했다. 왜냐하면 중화사상에 입각해 세계최고의 문명을 자부하고 자급자족의 농업대국으로 교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데다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만 받았을 뿐 해상으로부터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던 명은 해양을 통한 대외진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주 707
각주 707)
미야자키 마사카쓰 저·이규조 역(1999), 『정화의 남해 대원정』, 일빛, pp.15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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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명은 연안에 출몰하는 왜구 소탕을 위한 해군력만 유지했으며, 중국만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도 왜구를 막기 위해 바닷길을 통해 왕래를 금했다. 이러한 해금(海禁)정책은 서구제국의 동아시아 진출 기회를 제 공하였다.주 708
각주 708)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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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국 등 동아시아 제국이 바닷길을 막고 외부세계로 향한 나라의 문호를 걸어 잠근 닫힌 세계였지만, 서양은 이와 달리 열린 세계였다. 15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비단길(the Silk Rord) 로 불리던 동방 무역로가 막히자 서구 제국들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열망을 품었다. 때마침 일어 난 과학혁명에 따른 천문학과 항해술의 획기적인 발달에 힘입어 이러한 욕망은 현실로 다가왔다.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의 미주대륙 발견과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의 인도 항로 발견이후 서구 제국들은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 개척에 나섰다. 동방무역에 대한 열망에 더불어 서구 제국의 동방진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식민지 획 득 경쟁과 종교개혁에 대응해 펼쳐진 가톨릭교회의 포교운동이었다. 동방 진출의 선두에 선 포르투갈은 1510년 인도의 고아(Goa), 이듬해 말래(馬來)반 도의 말라카(Malacca), 1557년 중국 남부의 마카오(Macao)에 무역기지를 세웠으며, 스페인도 1519년 필리핀을 발견한 후 이를 식민지로 삼아 동남아시아와 중국, 일본 무역의 기지로 삼았다. 이 두 나라는 17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전해역의 재해권과 무역을 거의 독점하였다.주 709
각주 709)
김기혁, 위의 논문, pp.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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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명을 멸하고 대륙의 새 주인이 된 청조(淸朝)의 강희제(康熙帝)는 1685년 해금을 해제해 중국 상인의 해외도항과 외국선박의 중국기항을 허용하였으며, 1757년 광주(廣州)에 한해 무역을 허용하는 일항(一港)무역을 결정하였다. 청조(淸朝)도 이전의 중국 왕조와 마찬가지로 중화제국이자 세계 모든 나라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었으며, 세세동점에 따라 동아시아에 진 출해 온 서방제국도 조공국으로 취급하였다. 서방에 허용한 광동(廣東)무역 도 청조 당국의 일방적·절대적 통제 하에 조공제도 하의 중외(中外)무역에 적용된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조공국으로 대우하며 허용한 나가사키(長崎)무역도 항구 하나에 국한된 관허 독점무역이라는 점에서 광동무역과 그 성격이 같았다.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 국가로 진화한 서구열강은 중국과 일본의 종속 내지 종번(宗藩) 무역에 승복할 수 없었다.주 710
각주 710)
김기혁 (1990), 위의 논문, pp. 17~18;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7, 일조각, p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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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인도항로에 가까웠던 베트남의 경우 찐씨와 응우옌씨 두 가문이 남북으로 대립하던 1540년경부터 푸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이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1670년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차례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1690년대 말 구매력이 부족하고 시장의 협소한 베트남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영국은 철수하였으며, 그 자리를 무역보다 선교활동에 치중한 프랑스가 차지하였다.주 711
각주 711)
유인선, 앞의 책, pp. 26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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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리적으로 세구제국의 동방무역 항로의 종착지인 중국 남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로 폐관자수(閉關自守)하고 있던 조선은 서세동점의 높은 파고에서 빗겨나 있었다. 특히 문화적 열등자로 취급해 오던 청조가 대륙의 지배자로 들어 선 이후, 조선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진정한 중화문명의 계승자인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면서 외부세계와 의 교류를 가로막는 사상적 제방을 쌓음으로서 외부세계의 변화에 대해 무지하였다. 이와 같이 극히 제한된 소규모의 관허 독점무역을 허용하거나 폐쇄적 자급자족 세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아시아 여러 나라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제국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무력에 의해 서구의 조약체제를 받아들이는 개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의례외교를 중시한 전통적인 중국 중심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무역과 실리를 중시하는 국제조약에 입각한 서구 주도의 새로운 국제질서인 조약체제가 확립 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 각주 699)
    김기혁(2007), 「강화도 조약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환경」 『근대 한·중·일 관계사』, 연세대 출판부, p.122. 바로가기
  • 각주 700)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위의 책, pp.1~2. 바로가기
  • 각주 701)
    李則芬(1982), 『中日關係史』,臺灣 :中華書局, p.108. 7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65~66. 8 유인선(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pp.166.184. 바로가기
  • 각주 702)
    김기혁, 「19 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65~66. 바로가기
  • 각주 703)
    유인선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 pp. 166~184. 바로가기
  • 각주 704)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 66~72. 바로가기
  • 각주 705)
    일본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전중건부(1975), 『중세대외관계사』, 동경대학출판회, pp.16~17 참조. 바로가기
  • 각주 706)
    김기혁, 위의 논문, pp.122~123. 바로가기
  • 각주 707)
    미야자키 마사카쓰 저·이규조 역(1999), 『정화의 남해 대원정』, 일빛, pp.155~220. 바로가기
  • 각주 708)
    김기혁,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pp.13~14. 바로가기
  • 각주 709)
    김기혁, 위의 논문, pp. 11~13. 바로가기
  • 각주 710)
    김기혁 (1990), 위의 논문, pp. 17~18;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7, 일조각, pp. 1~2. 바로가기
  • 각주 711)
    유인선, 앞의 책, pp. 266~268.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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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점과 중국 중심 국제질서였던 동아시아 3국 자료번호 : edeah.d_0005_001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