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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청대 서민문화

1. 청대 서민문화

청대의 문화 중심지는 북경과 장강(長江) 하류 일대의 지역이었다. 북경은 황제의 보호와 장려 속에 재정적으로 풍부한 지역이었고, 장강 일대는 경제적인 발달로 형성된 막대한 상업 자본을 배경으로 성장한 지역이었다.
도시의 지식인들은 그들만의 독자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잔치와 유람, 원예, 연극 구경, 벗들과 유명한 장소를 여행하기를 즐겼고 서적, 회화, 서예 작품, 청동상, 탁본 같은 진귀한 물품들을 수집했다. 청대의 상인들은 도시문화의 주도자로 활동했으며, 특히 안휘성 휘주부(徽州府) 지역에 근거를 둔 휘상(徽商)이 유명했다. 청대의 휘상은 유명한 장서가이자 고증학 학자들의 후원자였고, 내지의 상업로에 대한 안내책자를 출판하고, 회관(會館) 조직과 공공정신에 대한 표준을 정했다. 휘상 이외에도 산서, 광동, 복건, 강서 지역의 상인들이 많은 활동을 보였으며, 자신들의 음식과 오락거리, 자신들만의 신(神)을 가지고 있었다.
청대의 서적 출판은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 북경에서는 국가에서 후원하는 방대한 출판 사업이 있었고, 장강 일대에서는 상업적 출판사들이 다양한 입문서와 소설, 도덕지침서와 대본들을 출간했다. 또한 여타 지역과 소도시에서는 좀 더 값싼 형태의 책이 복사업자들에 의해 보급되었다.
청대에는 소설, 특히 장편의 연의소설(演義小說)이 등장하여 서민들의 욕구에 부응했다. 소설은 서민들의 경제적 여유가 증대되고, 문화 수준이 향상된 것에 기반을 두었지만, 지식인들이 민간문학에 참여하고 인쇄술과 출판업이 발달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청대에는 명대에 유행했던 소설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으며, 4대 기서(奇書)라 불리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수호지(水湖志)』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가 대표적이었다. 이들 소설의 몇몇 에피소드는 극화되거나 구연되고, 사원의 장식, 포스터, 속담으로 상용되었기 때문에 무식한 농민이라 해도 그 구성과 극중 인물의 성격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청대에 작성된 소설로는 『홍루몽(紅樓夢)』과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齋志異)』가 유명했다.
북경 일대에서는 경극(京劇)이 유행했다. 당시의 배우들은 상설극장을 옮겨 다니며 연극을 공연했고, 회관에 부속되어 있던 공연장은 일반 서민에게도 개방되는 독립 건물로 변했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조합을 가졌고, 내무부(內務部)는 산하에 대규모 극단을 소유했으며, 북경에만 21개의 대중극장이 있었다. 국가와 상인도 극단을 지원했다. 황제와 관리들은 유명 배우를 북경으로 초청했고, 유력한 상인들은 개인극단을 운영하며 지방색 짙은 연극을 상연했다. 북경을 중심지로 부상한 경극은 지방으로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성행했고, 극본도 점차 다양해졌다.
그림 15 경극에 사용되는 가면
다음은 조선의 사절단이 북경에서 목격한 연극을 기록한 것이다. 이를 보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을 다룬 연극들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희장(戱場)에도 규모가 있는데 배울 만한 것이다. 연희(演戱)의 이름은 진시황의 아방궁연(阿房宮宴), 초 패왕의 홍문연(鴻門宴), 한 고조의 남궁연(南宮宴), 위 무제의 동작연(銅雀宴), 진 무제의 운룡연(雲龍宴), 수 양제의 서원행락(西園行樂), 당 태종의 칠덕무(七德舞), 송 태조의 청류관전(淸流關戰), 금 태조의 용왕묘전(龍王廟戰), 원 세조의 혼하전(渾河戰), 명 태조의 금릉전(金陵戰), 그 밖에 거록대전(鉅鹿大戰), 적벽대전(赤壁大戰), 서원아집(西園雅集), 기정고사(旗亭故事), 왕소군(王昭君)의 출새행(出塞行), 오손공주(烏孫公主)의 비파행(琵琶行) 등으로 이런 것들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주 695
각주 695)
朴思浩, 『心田稿』 권2, 「留館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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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6 홍문연(鴻門宴)을 소재로 한 항장무(項莊舞)
청대의 중엽 이후 지방에서는 지방희(地方戱)가 활발하게 나타났다. 지방희는 지방의 토속적 음악을 기반으로 발달한 양식인데,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에서도 공연되기 시작했다. 지방희는 그 구성이 자유롭고, 엄격한 제약이나 규칙이 별로 없으며, 노래의 가사와 대화가 통속적 백화체로 되어 있어 서민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Susan Naquin(1998), 95~107 ; 김영구(2005), 671~674).

  • 각주 695)
    朴思浩, 『心田稿』 권2, 「留館雜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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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서민문화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