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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조선후기 고증학풍

3. 조선후기 고증학풍

조성후기에는 주자학의 정통성이 강조되면서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매우 위험시했다. 그러나 경학에서는 주자학의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대표적 학자로는 윤휴(尹鑴), 박세당(朴世堂), 정약용(丁若鏞), 성해응(成海應), 김정희(金正喜)가 있다.
윤휴는 『상서』에서 요전(堯典)편과 순전(舜典)편을 하나로 합치고, 순전의 앞머리 28글자는 위작(僞作)이라 했다. 이는 고문 경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인 것으로 주자학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윤휴는 『중용』의 해석에서 『중용장구(中庸章句)』가 33장 체제로 구분한 것을 10장 28절 체제로 구분하여 주희와 입장을 달리했다. 윤휴는 『대학』의 해석에서도 주희의 『대학 장구』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고본대학(古本大學)을 받아들여 7절로 구분했고, 주희가 격물(格物)의 격(格)을 ‘이른다(至)’로 해석한 것에 대해 ‘감응하여 통한다(感通)’로 해석하여 독창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에서 사서(四書)와 『상서』 『시경』을 새롭게 주석했으며, 특히 『대학』과 『중용』의 주석에서 주희와 해석이 달랐다. 박세당은 『대학』의 격물을 ‘물(物)의 법칙을 구하여 바른 것을 얻는 것’으로 해석했고, 『중용』의 천명(天命)은 주희처럼 ‘하늘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윤휴와 박세당의 이러한 해석은 주희의 경학 해석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통 주자학자로부터 이단(異端)으로 규정되어 혹독한 배척을 받았다.(금장태(1998), 35~40).
정약용은 육경과 사서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방대한 경학 체계를 이룬 학자였다. 정약용은 자신의 학문 체계에서 경학 연구는 수기(修己)를 위한 것이고,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천하 국가를 위한 것으로,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했다. 이는 학문의 최종 목표를 경세학에 두고 그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경학을 연구한다는 뜻이었다. 정약용은 한학이 고고(考古)를 위주로 하지만 분명하게 변별하는 것이 부족하고, 송학이 궁리(窮理)를 주장하지만 옛 것을 증거로 삼는 데 소홀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으며, 한학의 훈고와 송학의 의리를 극복하여 경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경학 연구의 목표로 했다.
한유는 경전을 주석함에 있어 고고(考古)를 준법으로 삼았기 때문에 명변(明辯)이 부족하다. 따라서 참위의 사설(邪說)이 수록됨을 면치 못했으니 이것이 학이불사(學而不思 : 배우면서 생각하지 않음)의 폐단이다. 후대의 유학자(송학)는 궁리(窮理)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간혹 고거(考據)에 소홀했다. 따라서 제도 명물이 잘못 다뤄지기도 했으니, 이것이 사이불학(思而不學, 생각하면서 배우지 않음)의 폐단이다.주 693
각주 693)
丁若鏞, 『論語古今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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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 정약용의 초상
정약용은 『대학』의 구조는 주희의 해석처럼 3강령 8조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명덕(明德)이라는 하나의 강령과 효(孝) 제(弟) 자(慈)란 세 개의 조목이 있을 뿐이라 했고, 사천(事天)의 내세워 원시유교의 종교성을 강조하면서 주희의 이기설(理氣說)은 선종 불교에 가까운 것으로 비판했다. 정약용은 선왕(先王)의 제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경학 연구와 지인(知人) 안민(安民)의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경세학 연구를 합하여 이론화했고, 인간이 가진 부욕(富欲)과 귀욕(貴欲)을 적극적으로 실현해 주는 방향으로의 개혁안을 제시했다(김문식(1996), 217~222).
성해응은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 학자로 160여 권에 이르는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을 남겼다. 그는 북학론을 주장한 성대중(成大中)의 아들로 규장각 건서관이 되어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들을 열람하면서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그는 경학 연구의 목적이 경전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 성인의 본지(本旨)를 파악하는데 있다고 했으며, 연구방법으로는 전문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학과 의리의 순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송학을 절충하려고 했다.
한학은 명물도수(名物度數)에 깊으면서 이(理)가 원래 포함되었고, 송학은 천인성명(天人性命)에 밝으면서 수(數)도 섞여 있다. 다만 이미 문호가 나뉘어져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만일 한학과 송학을 합하고 그 요점을 잡아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한다)의 가르침에 도달할 수 있다면, 학문은 여기에서 더욱 넉넉하게 될 것이다.주 694
각주 694)
成海應, 『硏經齋全集』 外集 권8, 「送趙羲卿寅永遊燕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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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응은 고증학의 필요성과 요점을 분명히 인식했고, 고증학이 지나치게 번쇄한 데로 치닫는 한계점은 송학의 장점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러한 성해응의 연구 방법은 청의 고증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는 조선후기의 고증학풍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이다. 그는 박제가의 제자로 1809년에 부친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북경을 방문했다가 고증학자 옹방강과 완원(阮元)을 만났다. 이 때 완원은 자신이 편찬한 『황청경해(皇淸經解)』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기증했다. 김정희는 청조 학자와의 만남을 통해 고증학의 정수인 경학과 금석학에 관심을 가졌다. 김정희는 경학 연구에서 한학의 장점인 훈고와 송학의 장점인 의리를 흡수하여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과 동일한 논리였다. 김정희는 정약용이 경학 연구에서 자기 견해가 너무 강한 것을 비판하고 옛 것을 보존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목적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 학문을 중시했기 때문이다(최영성(1995), 158~217).
조선후기에 고증학풍을 보인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송학의 장점인 의리의 중요성은 부인하는 학자는 없었다. 이는 성리학 계열의 학자들이 학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고증학은 성리학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각주 693)
    丁若鏞, 『論語古今註』. 바로가기
  • 각주 694)
    成海應, 『硏經齋全集』 外集 권8, 「送趙羲卿寅永遊燕序」.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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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고증학풍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