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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에도시대 고학

2. 에도시대 고학

고학파(古學派)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유학의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자를 통해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배우지 말고, 직접 공자와 맹자의 저서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배워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고학자로는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狄生徂徠]가 있다.
야마가 소코는 학문이란 현실 생활에 바람직한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신의 수양을 중시하던 주자학을 비판했다. 그는 원래 무사의 나라인 일본은 무사의 나라로써 전통을 지켜야지 중국이나 조선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나라가 바뀐 것이 30여 차례이고, 오랑태가 들어가 왕이 된 경우도 몇 차례나 있다. 춘추시대 240여 년 동안 신하가 자기 군주를 시해한 경우가 25차례이고, 그 앞뒤로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는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조선은 기자(箕子)가 천명을 받은 이후 나라가 바뀐 것이 네 차례이다. 나라가 멸망하여 한의 군현이 되기도 했고, 고려 때 왕씨가 즉위하지 않은 것이 두 번이나 있었다. 조선의 28대 중에 왕을 시해한 것이 네 차례이다. 하물며 그 밖의 난은 금수가 서로 싸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직 일본은 천지가 개벽한 이후 인황(人皇)에 이르기까지 수만 년을 내려왔고, 인황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300년이 지났다. 천신이 정해준 황통(皇統)은 잠시도 어긋나지 않았고, 그 사이 반란 등은 겨우 손꼽을 정도이다. 더욱이 외적들은 일본이 변경을 엿볼 수조차 없었다.주 691
각주 691)
山鹿素行, 『中朝事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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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진사이는 교토에 고의당(古義堂)이란 사숙(私塾)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신도 사상이나 노장 사상이 융합된 주자학은 진실한 성인의 학문이 아니라며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직접 연구했다. 그는 주자학의 정태적인 이(理)를 주정하고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으며, 이는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로 나타났다. 이토 진사이의 학문은 아들인 이토 도가이[伊藤東涯]에게 계승되어 18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았고, 난학자인 아오키 곤요도 이 정신을 계승했다.
그림 13 이토 진사이 초상과 고의당(古義堂)
오규 소라이는 이토 진사이의 학문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특한 학문 체계를 형성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학파는 고문사(古文辭) 학파 또는 소라이 학파라고 부른다. 소라이가 고문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6세기 후반 명나라에서 고문사(古文辭)를 강조하며 재기있는 시문을 썼던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등의 영향이 있었다. 이반룡과 왕세정은 진한대의 고문사를 강조하며 이를 문학 창작에 응용했지만, 소라이는 고문사를 고전 영역에까지 확대하여 응용했다. 소라이는 유학의 오경(五經)을 중시하고 고문헌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경서의 참 뜻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성인의 도(道)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성인인 천자(天子)가 통치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으로, 예악형정(禮樂刑政)의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오규 소라이는 막부의 정치에도 참여했고, 『태평책(太平策)』 『정담(政談)』을 저술하여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유학의 흐름이 가지각색으로 되고, 끝의 끝에 이르러서는 불교와 노장의 학에 물들어 마음을 다스리고 성(性)을 밝힌다는 이상한 행동을 제일 중요한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인(聖人)이란 천자(天子)이며, 천자는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일을 자신의 직분으로 한다. 따라서 성인의 도란 바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도라는 본래의 뜻을 어느 틈엔가 잊어버렸다.주 692
각주 692)
丸山眞男 校注(1913), 「太平策」 『狄生徂徠』, (岩波 日本思想大系, 제36권), 4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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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의 고학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에 의해 등용된 오규 소라이 이래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규 소라이 학설 중에서 경제론은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에게, 도덕론은 핫토리 난카구[服部南郭]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뛰어난 학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고학이 쇠퇴하면서 특정 학파의 학문에 구애되지 않고 중국 고대의 경전에 주석을 달거나, 송명(宋明) 시대의 학설을 절충하여 유학의 정신을 이해하려는 절충학파가 형성되었다. 이중 고증학파(考証學派)는 고문사학(古文辭學)을 공격하면서 신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문헌을 정하여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실증적 태도를 가졌다. 절충학파으 기초를 쌓은 것은 가타야마 겐잔[片山兼山]과 이노우에 킨가[井上金峨]이고, 고증학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는 오타 긴조[太田錦城]과 마쓰자키 고도[松崎慊堂]가 있었다(구태훈(2008), 114~116).

  • 각주 691)
    山鹿素行, 『中朝事實』. 바로가기
  • 각주 692)
    丸山眞男 校注(1913), 「太平策」 『狄生徂徠』, (岩波 日本思想大系, 제36권), 448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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