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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청대 고증학

1. 청대 고증학

청대의 고증학은 청초의 경세학에서 육성된 학문으로, 건륭(乾隆, 1736~1795) 가경(嘉慶, 1796~1820) 시대에 새로운 학문 분위기로 나타났다. 고염무를 개조로 하는 고증학은 염약거(閻若璩), 호위(胡渭), 모기령(毛奇齡) 등에게 계승되었고, 염약거의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이나 호위의 『역도명변(易圖明辨)』, 모기령의 『사서개착(四書改錯)』이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의 학문은 경세학을 중시했던 청초의 학풍과 다르게 경세학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고전(古典)의 고증을 중시했다. 여기서 고전의 고증이란 고전의 자구(字句) 뿐만 아니라 원문 자체의 진위(眞僞)까지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또한 고전의 고증은 경서 이외에 사서, 지리서, 음운학(音韻學) 등 다양한 분야를 대상으로 했고, 금석문(金石文)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고전의 원문을 분석하는 근거로 삼았다.
고증학이 성행한 것은 청나라의 사대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청나라는 북경을 장악한 이후 한인 사대부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한편으로는 학술을 장려하고 일련의 문화 사업을 전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주인을 비판하는 언동이나 저술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만주인을 오랑캐로 간주하여 처벌을 받은 사건으로는 ‘대명세(戴名世)의 옥(獄)’과 ‘여유량(呂留良)의 옥’이 대표적이었다. 이 때 한인 사대부들은 청조가 주도하는 문화 사업에 적극 참여하거나 중국의 우수한 학술 문화의 연구에 몰두하는 것으로 사대부로서의 자각과 책임을 담당했다. 청나라가 전개한 대대적 문화 사업에는 강희제가 주도한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전서(朱子全書)』 『강희자전(康熙字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간행이 있었고, 건륭제 때에는 『명사(明史)』와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이 있었다. 특히 『사고전서』의 편찬 사업은 중국 전역의 서적을 수집하여 한 곳에 집중시켜 놓고, 학자들이 한꺼번에 많은 서적을 열람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증학의 연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고염무의 학문을 계승한 절서학파에는 오파(吳派)와 환파(皖派)가 등장하여 특색 있는 학문을 발달시켰다. 오파는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중심으로 발달한 학파로서, 박학호고(博學好古 : 박식하고 옛 것을 좋아함)를 중시하고 한학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파의 대표 학자로는 혜동(惠棟), 강번(江藩),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 조익(趙翼)이 있다. 혜동은 경학, 사학, 제자백가, 불교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여 『구경고의(九經古義)』를 지었고, 『주역』을 연구하면서 한유(漢儒)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면밀한 고증을 진행했다. 혜동의 제자였던 강번은 청대 한학자들의 전기인 『한학사승기(漢學師承記)』를 지어 한유들의 학설을 존중하고 위진(魏晉) 이래의 유학을 거부했다. 혜동과 강번이 송학을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 동성파(桐城派) 학자였던 방동수(方東樹)는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림 11 승덕(承德) 문진각(文津閣)의 사고전서
혜동의 제자였던 왕명성과 전대흔, 이들과 교류한 조익은 사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왕명성은 17종의 역사서를 교감한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을 지었다. 이는 원문의 교감을 위주로 하면서도 여지(輿地), 직관(職官), 전장(典章), 명물(名物)을 일일이 고증한 책이었다. 전대흔은 유학, 제자백가, 음운(音韻), 훈고, 천산(天算), 지리, 금석, 시문, 소설에까지 두루 통하는 박학한 인물로서, 22종의 역사서를 교감한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를 지었다. 이 책은 역사서 분야에서 청대의 고증학을 대표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조익은 22종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형식과 내용을 고증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를 지어, 문자와 자료의 고증은 물론이고 각 시대별 정치의 득실을 실증적이고 귀납적으로 설명했다.
환파는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학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로, 실사구시와 무징불신(無徵不信 :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음)을 표방하면서 명물과 전장 제도의 고증에 주력했다. 대표적 학자로는 강영(江永),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가 있다. 강영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서강목(禮書綱目)』을 지어 주자의 학문을 보완했다. 혜동과 강영의 제자였던 대진은 학문하는 방법으로 자의(字意), 제도, 명물에 통한 다음에 육경(六經)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진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意疏證)』은 『맹자』에 나타나는 용어들의 뜻을 고증학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없애야 한다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특한 기(氣)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주장을 폈다. 대진은 관학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사회적 욕망으로서의 영리를 긍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성현의 도(道)는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지 욕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노자와 장자, 불교의 사상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지 사사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욕망을 없앰으로써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룬다. 성현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는 것으로 천하의 정(情)을 통하게 하고, 천하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다.주 689
각주 689)
戴震, 『孟子字義疏證』 「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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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의 제자인 단옥재는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지어, 허신(許愼)이 『설문해자』를 작성하면서 한자의 자형을 허신 시대의 글자체인 소전체(小篆體)를 근거로 한 것이 오류임을 규명했다. 대진의 제자인 왕염손은 위(魏) 장읍(張揖)이 편찬한 『광아(廣雅)』의 오류를 한 대 이전의 고훈에 의거하여 바로잡은 『광아소중(廣雅疏證)』을 지었고, 왕염손의 아들인 왕인지는 『경전석사(經典釋詞)』를 지어 경전에 나타나는 조어(助語)의 같고 다른 점을 분석하여 경문 해석을 용이하게 했다.
절서학파에는 양주(揚州)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양주학파도 있었다. 이들은 오파와 환파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발달했는데, 대표적 학자로는 왕중(汪中), 완원(阮元), 유문기(劉文淇), 초순(焦脣)이 있다. 왕중은 『술학(術學)』이란 저서를 지어 삼대의 교육제도, 문자의 훈고, 제도 문물의 학에 관해 서술했다. 왕중은 예(禮)에 관한 연구를 위주로 했고, 순자를 높이 평가했다. 완원은 지방관과 중앙관료를 역임하면서 자신의 지위와 재력을 활용하여 뛰어난 글들을 편집 간행했다. 완원이 작성한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는 청대 고증학을 결산하는 대사업이라 할 수 있다. 유문기는 한학과 함께 후대의 학설도 널리 탐구했고, 특히 『춘추좌씨전』의 연구에 힘을 쏟아 가학(家學)이 되었다. 초순은 『맹자자의소증』과 동일한 성격의 『논어통석(論語通釋)』을 지었으며, 대진의 기철학을 바탕으로 『논어』를 해서하여 공맹(孔孟) 학문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데 기여했다.
절동학파(浙東學派)는 황종휘를 계승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양명학을 존중하면서 주자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고, 특히 사학을 중시했다. 대표적 학자로는 만사동(萬斯同), 소진함(邵晉涵), 장학성(章學誠)이 있다. 황종휘의 제자인 만사동은 절통학파의 개조(開祖)라 불리면, 고학(古學)에 전념하고 제자백가의 사상이나 명나라의 전례(典禮)에 정통했다. 만사동의 『역대사표(歷代史表)』는 17종의 역사서 가운데 『후한서』 이후에 나오는 표(表)를 『사기』와 『전한서』의 체제에 따라 작성한 것으로, 수보(修補)사학의 길을 열었다. 소진함은 고금의 정치 득실을 따졌고 명나라의 전례에도 능했다. 소진함은 역사란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종합하여 전체로서의 특징을 연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장학성은 절동학파의 역사 연구를 계승하면서 절서학파의 사상까지 수용하여 사론(史論)을 완성시킨 학자였다. 그는 『문사통의(文史通義)』를 지어 육경(六經)이 모두 역사서라는 ‘육경개사(六經皆史)’를 주장했다. 이는 경전이 추구하는 도는 사실을 통해 구현되고, 육경 이후에 나타난 사실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는 역사서를 중시한다는 뜻이었다.
도(道)는 육경(六經)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그보다 앞 시기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은 장구(章句)의 해석으로 밝혀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보다 뒷 시기에 사실의 변화가 생긴 것은 육경이 말할 수 없다. 물론 육경의 뜻을 집약하여 수시로 찬술함으로써 큰 도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하다.주 690
각주 690)
章學誠, 『文史通義』 內篇 2, 「原道」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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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장학성의 초상
장학성은 역사 연구의 축을 의리[義]와 사실[事]로 보았으며, 유학의 기본이념인 의리를 중시하면서도 사실을 중시했다. 이는 대진과 통하는 점이다.
청대의 고증학은 실사구시를 핵심 사상으로 하면서 한 대에 성립된 유학 경서의 진위를 밝히는 등 철저한 고증을 중시했다. 절서학파 가운데 오파는 학문의 대상이 경서, 역사서, 지리서에까지 미쳤고, 환파는 음운학과 소하게 특색이 있었다. 또한 양주학파는 제자학(諸子學), 좌전(左傳), 경서의 수집에 특징이 있었고, 절동학파는 사학 연구에 장점이 있었다(大谷敏夫(1997), 225~239).

  • 각주 689)
    戴震, 『孟子字義疏證』 「權」. 바로가기
  • 각주 690)
    章學誠, 『文史通義』 內篇 2, 「原道」下.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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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고증학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