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조선후기의 실학

3. 조선후기의 실학

‘실학’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통시성을 가지며, 어느 시대이든 그 시대의 현실에 적합한 학문을 지칭한다. 가령 송나라 때에는 불교와 도교의 비실용성에 대해 유학의 현세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유학을 실학이라 했고, 고려 말기에는 불교나 사장학(詞章學)에 대해 성리학을 실학이라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번쇄하고 자잘한 곳으로 흘러버린 성리학과 예학(禮學)의 단점을 비판하면서 현실문제에 관심을 둔 학문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를 조선후기의 실학이라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은 몇 가지 학문적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비판적 정신으로, 권위적인 주자학의 세계의 매몰되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며, 기성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정신을 말한다. 두 번째는 실용에 대한 관심으로, 학문적 관심을 윤리 도덕적이고 관념적인 것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민생을 위한 학문과 생산의 증대를 강조했다. 세 번째는 실증적 연구 방식으로,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경서의 고증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언어 등의 분야에서도 박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풍을 말한다. 네 번째는 주체적 입장으로, 당대 사회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자기 발전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이 강조되었다.(천관우(1965)).
조선후기의 실학은 경세치용파와 북학파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경세치용파의 대표적 학자로는 이익(李瀷)과 안정복(安鼎福)이 있고, 북학파에는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이 있다.
이익은 주자학에 정통한 학자였고, 이황의 학문을 추앙하며 허목을 사숙했다. 이익은 선배학자 가운데 시무(時務)에 밝은 학자로 이이와 유형원을 높이 평가했고, 학문이란 반드시 실제 생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익은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의 성과를 적극 수용했으며, 『질서(疾書)』의 작성을 통해 마련한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 『잡저(雜著)』 『곽우록(藿憂錄)』 등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는 토지 소유에 있어 매매할 수 없는 영업전(永業田)을 기본으로 하여 균전(均田)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고, 화폐의 악순환으로 농촌경제가 피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폐의 유통과 상업 활동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주자학을 신봉한 학자로 『주자대전』 『주자어류』, 이황이 편찬한 『주자서절요』를 애독했다. 안정복은 “학자가 주자서(朱子書)를 읽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천덕(天德) 왕도(王道)의 전체대용(全體大用)이 그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할 정도로 주자학을 중시했고, 서양의 과학지식을 흡수하면서도 크리스트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안정복의 경세적 학풍은 『임관정요(臨官政要)』와 『하학지남(下學指南)』에서 잘 나타나며, 학문과 정치가 별개가 아니며 경학의 목적은 경세학에 있다고 하여 인사(人事)에 해당하는 하학(下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경세학을 위한 사서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지어, 사실을 성실하게 고증하고 자국의 역사를 중시하는 주체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냈다.(최영성(1995), 78~116).
그림 10 이익의 초상화
홍대용은 주자학에 학문적 토대를 두고 북학파 학자들의 선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이용후생을 주창했다. 홍대용은 주관적 관념론을 배격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하려 했으며, 무한우주설을 주장하여 지구중심설을 부정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늘에 가득 찬 별 중에 하나의 세계가 아님이 없으니, 성계(星界)에서 본다면 지계(地界)도 역시 하나의 별이다. 한없는 세계가 끝이 없는 허공에 흩어져 있는데, 유독 지계만이 교묘하게도 여러 성계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이치는 없다.주 687
각주 687)
洪大容, 『湛軒書』 內集 권4, 「毉山問答」.
닫기

 
홍대용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 그러나 청나라의 문물은 중화(中華)의 문물을 계승한 것이며, 우리보다 앞서있는 만큼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했다(김문식(2009), 122~133).
박지원은 홍대용과 교류하면서 청조의 실정과 서학의 성과를 접했고 북학에 뜻을 두었다. 그는 1780녀에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했는데, 이때 목격하고 느낀 바를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작성했다. 박지원은 이 책에서 정덕(正德)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용과 후생이 필요하며,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중국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감정적인 배청의식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문물이 중화문화의 유산임을 인식하고, 청조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내실을 기하자는 주장이었다.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은 진실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어지럽힌 것에 분개하여 중화의 존숭할 만한 내용까지도 물리쳤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이 진실로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한다면, 중화의 남겨진 법을 남김없이 배워 우리 풍속의 유치한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주 688
각주 688)
朴趾源, 『熱河日記』 「馹汛隨筆」.
닫기

 
박지원은 실학을 하여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서민에게 이바지하는 것이 사대부의 임무라 규정하고,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수레나 선박과 같은 교통수단의 개발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작성하여 영농기술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관개 수리 시설의 확충을 제안했고, 한전론(限田論)을 통해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을 육성하여 농민들의 생활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을 주창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제자로 1778년에 북경을 여행하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여 북학론을 주장했다. 박제가는 이 책에서 생활 주변의 일상적 기구나 시설에서부터 국가의 주요 정책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중국의 제도를 비교하며 개선책을 제시했고, 소비를 통해 생산이 추적되고 생산의 증대를 통해 부(富)가 축적된다고 밝혔다. 그는 상업을 진흥시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면서, 육로보다 해로의 통상을 강조하고,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여 과학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상업을 진흥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최영성(1995), 127~146).
조선후기의 실학은 경세치용파가 농촌 경제의 진흥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입장이라면, 북학파는 상업의 진흥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입장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농업의 생산력이나 상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청조의 우수한 문물과 서양의 과학지식을 적극 도입하자는 데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보였다.

  • 각주 687)
    洪大容, 『湛軒書』 內集 권4, 「毉山問答」. 바로가기
  • 각주 688)
    朴趾源, 『熱河日記』 「馹汛隨筆」.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조선후기의 실학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