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청초 경세학의 전개

1. 청초 경세학의 전개

청나라는 송대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가 정립한 성리학(性理學)을 관학으로 받아들였다. 성리학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엄격한 상하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규범과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학문체계였다. 청나라는 이러한 성리학의 이론이 백성을 통치하고 사회를 통합시키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관학(官學)으로 수용했다.
명나라 말기에는 과거를 준비하면서 학문과 문장을 학습하는 단체인 문사(文社)가 있었다. 그 구성원에는 관료도 있었지만 관리가 되지 않은 독서인이 다수였고 개혁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들은 명나라 말기에 환관의 부패를 척결하고 유교적 이상을 고양할 수 있는 개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고, 청이 북경을 장악한 이후에는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원인을 규명하고, 청조에 충성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로 갈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대부 가운데 일부는 명나라 유민(遺民)을 자처하며 청나라에 저항했고, 명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른 정치 경제 사회적 실상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송의 이학(理學)과 명의 심학(心學)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인 경세학을 제창하기에 이르렀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 였다. 청조의 경세학은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의 개선과 한족의 자주 독립은 강하게 호소했으며, 청 정부로부터 억압을 받았다(임계순(2000), 231~232).
고염무는 강소성 곤산(崑山) 사람으로 무석(無錫) 동림서원(東林書院)에 근거를 둔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했다. 동림당 인물들은 환관이 주도하는 명나라 말기의 정치적 폐해를 비판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에 학문의 목적을 두었으며 행정, 재정, 군사 전반에 걸친 개혁에 관해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의 학문적 근거는 주자학이고, 수양의 실천이라는 학문적 본령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염무는 학문 연구의 목적을 명체달용(明體達用 : 체를 밝히고 용에 통달함)과 경세제민에 두고, 이를 달성하는 방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함)를 중시했다. 실사구시란 『한서』 「유덕전(劉德傳)」의 “修學好古 實事求是”란 구절에서 나온 것으로, 청대의 학문은 한학(漢學)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고염무는 경학이 발전했던 시대로 돌아가 유학의 의의를 재평가하려고 했다. 그가 “옛날의 이른바 이학(理學)은 경학(經學)이다.”라고 한 것도 허망한 이론에 빠진 이학이 아니라 경학의 본뜻에 바탕을 둔 유학의 부흥을 추구한 것이다.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은 그의 경세학적 의도가 잘 나타나는 책으로, 경학, 정치, 풍속, 예제, 과거, 문학 등의 문제점을 전반적으로 언급하여 경세학 연구자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지금의 학자들은 육예(六藝)의 문장을 학습하지 않고, 백왕(百王)의 경전을 연구하지 않으며, 당대의 실무를 다하지 않고, 공자가 학문과 정치를 논한 큰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 일관(一貫)과 무언(無言)을 논하고, 명심견성(明心見性)의 공허한 말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학으로 바꿔놓고 있다. 팔과 다리를 게을리하여 만사에 거칠어지고, 자기를 보좌하는 사람들을 없애 사방의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며, 신주(神州, 중국)를 무너뜨려 종묘사직을 공허하게 했다.주 682
각주 682)
顧炎武, 『日知錄』 권7, 「夫子之言性與天道」.
닫기

 
황종희는 절강성 여요현(餘姚縣) 사람이다. 부친 황존소(黃存素)가 동림당 계열의 인물이었고 황종희 자신도 그 동조자였다. 황종희는 여요현 출신의 양명학자인 유종주(劉宗周)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의 양지설(良知說)을 바탕으로 한학을 연구했고, 경학 연구의 바탕을 한학에 두고 경세학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고염무와 같았다. 황종희는 청나라의 지배가 확정된 이후 명나라 유민(遺民)으로 저술에 전념했다. 그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행정, 재정, 군사 등의 분야에서 폐해가 누적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개혁안을 제시했다.
명대에는 세금을 납부할 때나 일반적인 교역에서 은(銀)만을 통화로 사용했다. 은이 결핍되면 은값이 폭등하고 상대적으로 모든 물가가 하락했으며, 사람들은 은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고통을 받았다. 조세로 은을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고, 아울러 은의 유통을 일체 금지하며, 동화(銅貨)와 지폐를 발행하여 유통을 원활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민간의 사치, 허례, 속신(俗信)에 따른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 사람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주 683
각주 683)
黃宗羲, 『明夷待訪錄』 「財計」.
닫기

 
황종희는 『송원학안(宋元學案)』과 『명유학안(明儒學案)』을 저술하여 송대 이후 학자들의 전기(傳記)와 학설의 계통을 밝혔다. 황종희의 사상에는 군주의 전제를 비판하고 민생의 향상을 구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민주 사상의 실마리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왕부지는 호남성 형양(衡陽) 사람으로, 학술의 중심지인 강남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출신이었다. 그는 한학을 기초로 하고 송학을 학문의 요지로 삼았으며, 학문의 목적을 경세치용에 두었다. 그는 “사람의 욕망은 천리(天理)의 지정(至正)이라”고 하여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다. 이는 사회적 욕망이라고 할 영리(營利)를 인정하는 것으로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성리학적 천리관(天理觀)에 대전환을 가져왔다. 왕부지는 『독통감론(讀通鑑論)』에서 역사를 바탕으로 시정(時政)을 비판했고, 천하를 사유화하는 군주의 전제 대신에 지극히 공평한 정치를 주장했다(大谷敏夫(1997), 220~225).
청조의 경세학은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에 의해 정치개혁의 학문으로 연구되었고, 청조가 안정기에 들어간 이후에는 억압을 받았다. 18세기에는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고증학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내외적으로 위기상황이 계속되면서 경세학은 다시 각광을 받았다. 이 시기의 경세학은 상주학파(常州學派)의 공양학(公羊學)에 이론적 근거를 두었다.
강남의 상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공양학은 당대의 학술을 일변시켰다. 공양학의 대표적 학자로는 장존여(莊存與), 유봉록(劉逢祿), 송상봉(宋翔鳳)이 있다. 장존여는 공양학 연구의 개조이며, 그가 지은 『춘추정해(春秋正解)」는 공양춘추를 공부하는 학자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장존여는 이공(李塨)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져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했다.
유봉록은 장존여의 외손자이다. 그는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와 하휴(何休)의 『공양해고(公羊解詁)』를 연구했고, 이들의 학설을 바탕으로 『춘추』에 나타난 공자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봉록은 특히 하휴의 삼과구지설(三科九旨說)을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는 쇠란(衰亂)→승평(昇平)→태평(太平)의 단계로 진보한다는 것이 공자의 미언이며, 청나라의 역사적 현실을 이런 시각에서 파악했다. 유봉록의 학설은 청말 변법개혁가인 캉유웨이[康有爲]에게 수용되어 『신학경위고(新學經緯考)』란 저서로 나타났다.
송상봉은 장존여의 조카인 장술조에게 공양학을 배운 학자이다. 그는 『논어설의(論語說義)』에서 자공(子貢) 이하 64명이 공자의 미언을 좇아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모셨다고 서술했다. 유봉록이 말한 ‘미언대의’와 ‘삼과구지설’, 송상봉의 ‘공자소왕설’은 공양학의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
19세기에 활동한 위원(魏源)과 공자진(龔自珍)은 유봉록에게 공양학을 배우고 이를 정치개혁의 이론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위원은 송학을 배우다가 경세학을 지향했고, 공양학의 ‘삼과구지설’을 보다 현실적인 변화사관으로 심화시켰다. 위원은 유교의 이상적 정치인 요(堯) 순(舜) 우(禹)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치(治)이고, 국가의 부강을 위해 서양 국가의 산업과 군사시설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위원은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국가의 부강을 위해 상리(商利)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영리를 인간의 욕망으로 파악했던 대진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정책적으로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림 8 『해국도지』 표지
공자진은 유봉록의 공양학과 장학성의 사학 이론을 수용한 학자였다. 그는 경학과 사학을 연구하는 목적이 미래를 예측하는 미언대의를 밝히는데 있다고 했고, 당대의 정치 사회를 개혁하는 방안으로 농종(農宗)이나 평균(平均) 같은 논의를 전개하고, 신강성(新疆省)의 개발과 방비를 주장했다.
19세기에 강남의 상주지역에서 발전한 경세학은 이후 영남지역으로 전래되어 캉유웨이, 량치차오[梁啓超]와 같은 근대 정치사상가가 등장했다(大谷敏夫(1997), 240~249).

  • 각주 682)
    顧炎武, 『日知錄』 권7, 「夫子之言性與天道」. 바로가기
  • 각주 683)
    黃宗羲, 『明夷待訪錄』 「財計」.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청초 경세학의 전개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