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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조선후기의 서학

4. 조선후기의 서학

서양인이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문물을 전한 경우가 있었다. 서양인이 조선 해안으로 표류해 온 경우를 말하는데, 1627년에 영일만에서 체포된 벨테브레(Weltevree, 박연) 등 3인과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Hamel) 등 36인이 그들이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조선인에게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과 조종술을 가르쳤고, 하멜의 동료 중에는 성력(星曆)을 아는 자, 조총을 잘 쏘는 자, 포술(砲術)에 능한 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서양문물은 주로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단을 통해 도입되었다(신동규(2007), 174~184).
1631년에 명나라를 방문한 정두원(鄭斗源)은 선교사 로드리게스(Rodriquez, 陸若漢)를 만나 서양식 화포와 망원경, 『천문략』, 『치력연기(治曆緣起)』 『이마두천문서(利瑪竇天文書)』 『직방외기』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한역 서학서를 기증받았다. 이중에서 『이마두천문서』는 마테오리치의 『혼개통헌도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는 1644년 청조가 북경에 입성할 때 함께 들어가 흠천감에 있던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났고, 귀국할 때 아담 샬에게서 서학서와 지구의, 천주상 등을 기증받았다. 이 무렵 조선에는 아담 샬이 작성한 천문도와 역서가 도입되어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강재연(1990), 49~75).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을 채용하자는 논의는 1644년 김육(金堉)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조선에서는 1653년에 시헌력을 채택할 것을 선언했고, 김육은 관상감(觀象監) 소속의 천문학자인 김상범(金尙范)을 북경의 흠천감으로 파견하여 역법의 계산법을 배워오게 했다. 숙종대에는 천문학자 허원(許遠)이 북경으로 파견되어 천문학자 하군석(何君錫)을 만났고, 오랜 노력 끝에 영조 원년인 1724년에 새로 수정한 시헌칠정법(時憲七政法)을 시행하게 되었다. 허원은 1684년에 『의상지(儀象志)』와 1710년에 『세초류휘(細草類彙)』를 간행했으며, 여기에서 청나라의 천문 기관과 천문 기구, 시헌력을 연구한 결과를 소개했다. 1795년에 천문학자 성주덕(成周悳)은 서호수(徐浩修), 김영(金泳)과 함께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편찬했다. 이는 조선의 천문학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성주덕은 1818년에 서운관(관상감)의 역사와 관련 자료를 정리한 『서운관지(書雲觀志)』를 작성했고, 김영은 절기의 변화에 따른 시간의 변동을 기록한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를 완성했다. 19세기에는 고위 관리인 동시에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남병철(南秉哲)·남병길(南秉吉) 형제가 활동했다. 이들 형제는 『추보속해(推步續解)』 『의기집설(儀器輯說)』 『성경(星鏡)』 『칠정보법(七政步法)』과 같은 과학 서적을 작성했다.
그림 7 아담 샬의 초상
서학의 성과를 접하면서 이를 적극 활용하려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익은 조선에 전래된 한역 서학서를 통해 서학을 이해했으며, 『천학초함(天學初函)』에 포함된 『직방외기』 『천문략』 『기하원본』 『간평의설(簡平儀說)』 『칠극(七克)』 『곤여도설』 『혼개통헌도설』 등을 보았다. 이익은 아담 샬이 만든 시헌력을 역법의 으뜸으로 보았고, 지구설을 수용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익은 12중천(重天)이나 9중천 같은 서양의 우주관에 관심을 가지고 우주의 크기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1766년에 북겨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자이자 흠천감 관리로 있던 할러스타인(Hal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Gogeisl, 飽友管)을 만났다. 홍대용은 이들과 필담을 나누면서 자명종, 망원경, 안경, 풍금을 구경했고, 북경의 관상대를 방문하여 천문 관측기구를 살펴보았다. 홍대용은 귀국한 이후 자기 집 뜰에 농수각(籠水閣)이란 전각을 짓고, 혼천의(渾天儀), 후종(候鍾), 통천의(統天儀) 같은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어 설치했다.
박제가는 서학의 실용 기술을 적극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 박제가는 농기구의 개량을 위해 서광계의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참고하자고 했고, 매년 기술자 10인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계 제조법을 배워오게 하자고 했다. 박제가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양 선교사를 초청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기술에 능통한 선교사를 초빙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면 과학기술이 크게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해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사역원에서 매년 중국어를 잘하는 역관 2명과 관상감에서 과학기술 전문가 2인을 선발하여 중국으로 파견하며, 그곳에서 배워온 지식을 국내에 잘 보급하는 성과를 거둔 기술자를 지방관으로 등용하여 승진시키고자 제안했다. 정약용의 제안은 중인으로 고정되어 신분상 차별을 받던 역관과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기 위해서였다(박성래(1998), 336~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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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서학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