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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에도시대의 난학

3. 에도시대의 난학

1543녀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를 계기로 히라도에서 일본과의 통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에 전해진 서양식 총포(조총 )기술은 전국 시대의 일본을 통일시켰고,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의 배경이 되었다. 1549년에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方濟各)가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 크리스트교 포교를 시작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크리스트교를 ‘남만교(南蠻敎)’라 불렀다. 활발한 포교 활동은 전개하여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서일본 제국의 다이묘[大名]들이 크리스트교를 묵인했고, 오랜 전란을 겪었던 백성들이 크리스트교의 박애정신과 평등사상에서 위로를 받고 구원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를 수용하는 것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여 일본적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변혁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므로 지배층에서는 이를 위험시했다. 전국시대 말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일본에서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서학을 ‘남만학(南蠻學)’이라 했지만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난학(蘭學)’이라 했다.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뜻하는 홀랜드(Holland)를 ‘오란다[和蘭]’라 했으므로, 난학이란 ‘오란다에서 들어온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이었다.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된 나가사키[長崎]에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에도 막부의 관리가 상주했고, 이들은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전해지는 서양의 소식과 의학, 과학 지식을 국내로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에도시대에 난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7세기 말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이 『화이통상고(華夷通商考)』를 저술하여 세계의 지리와 풍속을 소개하면서부터였다.
그림 5 사비에르 초상
1708년에 이탈리아 선교사인 요한 시도치(Sidocci)가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에 잠입했다가 막부에 체포되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요한 시도치를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서양기문(西洋紀聞)』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세계 지리와 크리스트교에 대한 내용이 나타났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1713년에 시도치를 심문하면서 얻은 서양 관련 지식에 중국 지리서의 내용을 추가하여 『채람이언(采覽異言)』을 저술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세계지리서였다. 하쿠세키는 1711년에 통신사로 에도를 방문한 조태억(趙泰億), 임수간(任守幹)을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서양 국가들의 형편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주 681
각주 681)
任守幹, 『東槎日記』 坤, 「江關筆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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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시대였다. 요시무네는 교호[享保] 개혁을 통해 농지를 확대하고 농업기술을 향상시키려 했으며, 새로운 농업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청에서 한역된 서학서를 수입했다. 에도시대에 나가사키에는 네더란드 상선 이외에 당선(唐船)이라 불리는 중국 강남의 상선도 출입하고 있었다. 청조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 일본으로 유입되거나 일본에 있던 『고문효경(古文孝經)』을 청으로 가져간 것도 대외무역항인 나가사키를 통해서였다.
아오키 곤요[靑木昆陽]는 『화란문자략고(和蘭文字略考)』 『화란문역(和蘭文訳)』과 같은 네덜란드어 연구서를 지어 난학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고, 에도 막부의 구황작물인 감자의 재배를 건의하면서 감자에 관한 연구서인 『번서고(蕃薯考)』를 저술하기도 했다.
18세기 후기에는 난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1771년에 난학 계열의 의사였던 스기다 겐파쿠[杉田玄白]와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는 인체의 해부를 시도하면서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서적을 지참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인체를 해부해 본 결과 해부학 서적이 매우 정밀한 것을 발견하고 이 책을 번역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어 사전이나 번역어가 불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1774년에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출판했다. 『해체신서』는 한문으로 번역되지 않은 서양 서적을 최초로 번역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의 일화는 1815년에 스기다 겐파쿠가 작성한 『난학사시(蘭学事始)』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학은 이들의 제자였던 오쓰기당 겐타쿠[大槻玄澤]가 에도에 지란당(芝蘭堂)을 설립하고 제자들을 교육시키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겐타쿠는 1788년에 난학 입문서인 『난학계제(蘭學階梯)』를 출간하여 난학 연구의 의의 및 역사를 소개하고, 초보적인 네덜란드어 문법을 설명했으며, 1790년부터 스승 겐파쿠의 명으로 『해체신서』의 개정 작업을 시작하여 1826년에 『중정해체신서(重訂解體新書)』를 출간했다.
그림 6 겐파쿠가 개정한 「중정해체신서」 속표지
겐타쿠의 문하에서는 ‘지란당의 사천왕(四天王)’이라 불리는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真], 이나무라 삼파쿠[稻村三伯], 하시모도 소우키치[橋本宗吉], 야마무라 사이스케[山村才助]가 출현하면서 난학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이나무라 삼파쿠는 1796년에 『파유마화해(波留麻和解)』를 간행했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난일(蘭日)사전으로 약 8만 단어가 수록되었다. 삼파쿠의 제자인 후지바야시 후잔[藤林普山]은 이를 간략하게 정리한 『역건(譯鍵)』을 출판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같은 기초의학도 소개되었다. 1792년에 우다가와 겐즈이[宇田川玄随]는 네더란드의 내과 전문서를 번역하여 『서역내과찬요(西訳內科撰要)』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를 통해 서양의 내과 학설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천문학에서는 18세기 말에 네덜란드어 통역관인 모토키 요시나가[本木良永]가 『신제천지이구용법(新制天地二球用法)』를 저술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소개했다. 그의 제자인 시즈키 타다오[志筑忠雄]는 『역상신서(曆象新書)』를 저술하여 뉴턴의 만유인력설과 태양의 운동법칙을 소개했다. 지란당에서는 서양의 태양력을 가르쳤으며, 이를 기념하여 1795년 정월을 ‘오란다 쇼가쓰[和蘭正月]’라고 한다.
지리학에서는 사천왕의 한 사람인 야마무라 사이스케가 활약했다. 사이스케는 외국의 지리서인 『증정채람이언(增訂采覽異言)』을 저술하고, 이와 함께 매우 정밀한 지도를 출판했다. 또한 미토번[水戶藩] 출신의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는 1779년에 경도와 위도가 표시된 〈일본여지노정전도(日本輿地路程全図)〉를 작성했고, 이노 타다타가[伊能忠敬]는 막부의 명령으로 일본의 모든 해안을 실측하여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図)〉를 완성했다. 이 지도는 ‘이능도(伊能図)’라고도 불리는데, 타다타가가 사망하고 3년이 지난 1821년에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에 의해 완성되었다.
난학이 발전하면서 수입된 서양의 물품들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서양 수입품에는 온도계, 색안경, 시계, 망원경 등이 있었고, 일본인들은 그 정교함에 감탄했다. 서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해외 지식의 자유로운 수입을 통제하는 막부의 쇄국체제를 비판하는 사고도 나타났다. 난학자들은 서학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형성한 서양의 사회구조, 사상, 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에도 막부는 난학자들이 가진 서양의 합리주의 정신과 시민사회 사상을 용인할 수 없었으므로 난학을 통제하고 사상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에도시대의 난학은 막부 말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양학(洋學)’이라 불리게 되었다(구태운(2008), 215~221).

  • 각주 681)
    任守幹, 『東槎日記』 坤, 「江關筆談」.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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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의 난학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