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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맺음말

동아시아 3국의 인구증가와 도시화 비교

Ⅳ. 맺음말 : 동아시아 3국의 인구증가와 도시화 비교

앞서 살폈던 17~19세기 동아시아 세 나라의 인구변동추세를 하나의 표로 나타내면 다음의 〈표 8〉과 같다.
표 8 17~19세기 동아시아의 인구변동 (단위 : 만명)
연도중국인구일본인구조선인구
1600년 전후15,0001,2271,172
1700년 전후15,0003,1271,435
1790년 전후31,3002,9871,822
1850년 전후43,0003,2291,647
2005년 전후133,00012,7057,225
(남북한 합계)
〈표 8〉에서 보듯이 중국과 조선은 동일하게 16세기 인구급증과 17세기 인구감소, 18세기 급증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일본은 17세기 폭발적 인구 증가와 18세기 인구정체현상을 보인다. 17세기 인구감소와 18세기 인구의 급증은 중국과 조선에만 국한된 인구현상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인도의 인구도 거의 같은 추세였고, 러시아의 인구도 18세기에 두 배나 증가했다. 17세기 인구감소와 18세기 인구급증현상은 일본을 제외한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전지구적 현상인 소빙기(little ice age) 기후에서 찾기도 한다.주 675
각주 675)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이승휘 옮김(1999),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돌베개 ;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1995),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일상생활의 구조 상』, 까치, 26~28쪽. 소빙기기후는 태양흑점활동이 약화됨에 따라 태양열이 지구에 도달하는 힘이 약화되어 기온강하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17세기 유럽의 평균기온은 A.D 1천년 이후 최저기온으로 기록되고 있다. 연평균온도가 섭씨 1도 하락하면 작물의 생장기간이 3~4주 지체될 뿐만 아니라 작물의 재배지역 또한 해발 500피트 이하로 제한된다고 한다. 17세기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과 자연재래가 지속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기온의 급격한 하락에서 비롯된 생산기반의 동요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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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과 일본, 조선의 인구규모는 일본이 중국인구의 9.5%,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인구는 중국인구의 5.4% 규모이다. 시대별로 이러한 인구규모가 어떻게 변동하는가를 살펴보면, 조선의 인구는 18세기 이전까지 중국인구의 10%의 규모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인구 규모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져, 1790년에는 6%내외로 줄었고, 1850년에는 4%로 줄었다. 일본의 인구는 1600년에 중국의 8%수준이었다가 1700년에는 20%로 급증하였고, 1790년에는 9%, 1850년경에는 8%로 점차 감소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인구규모를 비교해보면, 오늘날은 남북한을 합한 인구규모는 일본의 57%수준이다. 1600년경에 조선의 인구규모는 일본의 92%수준이었지만, 1700년경에는 46%, 1790년경에는 60%, 1850년경에는 51%수준으로 하락했다.
단순한 인구규모비교는 국토면적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은 비교이기 때문에 그 격차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한일간의 인구 상태에 대한 정밀한 비교를 위해 다음의 〈표 9〉에서 인구밀도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표 9 조선과 일본의 인구밀도이헌창(1999), 「조선후기 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 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
1600년경1700년경1800년경
인구수인구밀도인구수인구밀도인구수인구밀도
조선110501356116575
일본120312777530783
〈표 9〉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166년경 조선의 인구밀도는 일본에 비해 1.6배로 높았지만, 1700년에는 역전되어 조선은 일본의 81%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태역전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구통계의 오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물경제의 격차이다. 인구통계의 오류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인구규모를 한일간의 정상적인 인구규모라고 본다면, 1600년의 인구추계는 일본이 과소추계되었거나 조선이 과대추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국토면적이 일본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1600년경 일본의 인구가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은 일본의 인구통계가 과소추계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600년 일본 인구의 과소추계로 인해 전지구적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17세기에 일본만이 예외적으로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18세기 조선의 인구증가율이 과소추계되었을 가능성이다. 조선의 경우 중국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인구추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인구증가율은 중국에 비해 훨씬 낮게 평가되고 있다. 그 결과 인구규모도 18세기 이전 10%에서 18세기 말 6%로 대폭 감소한 것이다. 또한 1700년의 한일간 인구규모가 현재 수준보다 훨씬 낮은 46%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추측컨대 통계상으로 나타나는 중국·조선, 조선·일본 간의 인구규모는 조선의 인구규모를 과소 추계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인구통계의 오류가 아니라면 실물경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16세기 일본인구의 급증현상은 경제사회의 성립이라는 사회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도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발흥이라는 경제발전이 성취되었지만, 이러한 경제발전은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는 불충분한 발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 삼국의 도시화율은 중국이 명청대에 6~7%, 일본이 7~8%, 조선이 5%였고, 19세기 초에는 중국이 7~8%, 일본이 18%, 조선이 6%였다.주 677
각주 677)
이헌창(2006),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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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세기 한, 중, 일 도시화율은 1% 내외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일본의 도시화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중국과 한국을 압도했다. 중국과 일본의 도시화율은 2.5배, 조선과 일본의 도시화율은 3배정도 차이가 발생했다. 중국과 조선이 농촌과 도시부의 뚜렷한 분리가 행해지지 않은 반면, 일본은 막번체제하에서 강제로 도시와 농촌을 분리하여 도시 중심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중국의 도시는 행정위계의 상하관계로 편성된 행정중심도시와 함께 명청시기에 현성급(縣城級)의 시진이 성장하였다. 북송이후 시진은 1개 현당 1.3진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1982년 중국의 진은 2,660곳을 헤아린다. 행정중심지인 현성이 명청시기 1,200~1,300여곳이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시진이 얼마나 급속하게 증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의 도시화는 행정도시의 서열화와 함께 시진 성장의 결과였지만, 하나의 상하체계로 편제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시진 성장으로 인해 현성의 존재와 지위가 모호해졌다는 점이 중국도시사의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다.주 678
각주 678)
斯波義信(시바 요시노부) 지음·임대희·신태갑 옮김(2008), 앞의 책,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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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본은 병농분리, 농과 상공의 분리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도시와 농촌이 뚜렷하게 분리되었다. 성하정은 영국(領國)지배의 거점으로써의 정치적 기능과 영국내 상공업의 중심지로써의 경제적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성하정이 영내 인구의 10~20%를 흡수하면서, 도시와 농촌은 기능과 인구면에서 완전히 다른 사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성하정은 오늘날 일본열도내 각 지역의 중심도시로 계승되었다. 도쿄를 필두로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가네자와, 히로시마, 가고시마 등 전국 현청 소재지의 70%가 일본 근세의 성하정에서 비롯된 도시들이다. 근세 일본열도 내에서 전개되어 현대로까지 계승된 도시들을 핵으로 하는 사회의 기본구조는 일본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기에 만들어진 것이다.주 679
각주 679)
玉井哲雄(다마이 데쯔오)(1994), 「日本 中, 近世都市의 特質」 『동양도시사속의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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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도시시장을 위해 농촌정기시를 해체하거나 농촌의 상공업자를 도시로 이주시키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시장기능이 농촌에도 분산되었기 때문에, 농촌장시가 조밀하게 편성되었던 반면,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일본, 중국에 비해 미약했고, 상설점포도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주 680
각주 680)
이헌창(1999),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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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교통과 상업중심지인 강경, 마산, 원산 등에서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그 추세는 전통적인 행정중심도시를 압도하기에는 미약했다. 집권적 관료국가체제로 운영된 조선왕조사회에서 도시는 군현제라는 지방행정위계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수도인 한양만이 군사, 행정중심도시에서 18세기 이후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조선의 경제, 사회, 문화의 변동을 추동하고 있었다.

  • 각주 675)
    로이드 E. 이스트만 지음·이승휘 옮김(1999), 『중국사회의 지속과 변화』, 돌베개 ; 페르낭 브로델 지음·주경철 옮김(1995),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일상생활의 구조 상』, 까치, 26~28쪽. 소빙기기후는 태양흑점활동이 약화됨에 따라 태양열이 지구에 도달하는 힘이 약화되어 기온강하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17세기 유럽의 평균기온은 A.D 1천년 이후 최저기온으로 기록되고 있다. 연평균온도가 섭씨 1도 하락하면 작물의 생장기간이 3~4주 지체될 뿐만 아니라 작물의 재배지역 또한 해발 500피트 이하로 제한된다고 한다. 17세기 유럽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과 자연재래가 지속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기온의 급격한 하락에서 비롯된 생산기반의 동요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676)
    이헌창(1999), 「조선후기 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 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 바로가기
  • 각주 677)
    이헌창(2006), 앞의 논문 참조. 바로가기
  • 각주 678)
    斯波義信(시바 요시노부) 지음·임대희·신태갑 옮김(2008), 앞의 책, 63쪽. 바로가기
  • 각주 679)
    玉井哲雄(다마이 데쯔오)(1994), 「日本 中, 近世都市의 特質」 『동양도시사속의 서울』, 시정개발연구원. 바로가기
  • 각주 680)
    이헌창(1999), 앞의 논문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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