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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상공업 발달

1. 상공업 발달

1) 중국
명대 초기까지 관영수공업체제가 주류를 이루던 중국의 수공업은 명 중기 이해 상품경제와 화폐경제의 발달로 점차 쇠퇴하고 민영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민영수공업은 도시와 농촌에서 괄목할만한 진전을 나타냈다. 견직업, 철기제조, 도자기 생산, 면방직 등의 도시수공업은 강남의 소주, 항주, 남경, 불산진(佛山鎭), 경덕진 등에서 크게 발달하였다. 소주는 고급 견직물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소주의 견직물업은 주변 농촌에도 파급되어 농촌 촌락이 시진(市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주는 고급 견직물 생산 외에도 시진을 기반으로 하여 농촌생산품의 집산 및 가공, 제조 등을 담당함으로써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견직업은 소주(蘇州)외에도 남경, 호주(湖州), 항주 등지에서도 번성하였다.
경덕진은 도자기 산업의 전국적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불산진은 1519년 광동순무(廣東巡撫)가 광동의 모든 생철을 불산에 운반하여 숙철을 만들거나 철기를 생산하도록 허가한 이래 철기제조업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철기제조 공정의 분업화와 전업화가 진행되어, 불산진에서 철기제조에 종사하는 노동자수도 견륭 연간(1736~1795)에 약 3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불산진의 1년 철강생산량은 옹정 연간(1723~1735)에 3만 4,000톤에 달했는데, 이는 산업 혁명 이전 영국의 철강생산량(1만 7,350톤)의 2재에 달하는 것이었다. 불산진에서 생산된 철제품은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마카오나 광주를 통해 네덜란드, 일본, 류쿠, 태국, 필리핀에까지 팔려나갔다.
농촌수공업도 명대 중기이후 크게 발달하였는데, 특히 강남지역이 두드러졌다. 송강부는 농민중 70%가량이 면화를 재배했으며, 소주부의 가정, 태창, 곤산, 상숙 일대는 유명한 면화재배 지구와 면방직업 지구로 발전했다. 또한 소주, 호주, 가흥과 항주 일대는 뽕나무재배오 양잠업이 성행하였다. 15세기 이래 강남농촌에서 전개된 양잠업과 견직업에서는 뽕나무재배, 양잠, 명주실 꼬는 작업[繅絲, 撚絲] 등 각 공정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각 공정사이에는 상인자본이 개입하여 이윤을 취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직조업은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는 전통적인 분업체제에서 벗어나 전업적인 직물수공업으로 발달하였다. 농춘수공업 중에서 견직업이 집중적으로 발전한 지역은 시진(市鎭)으로 성장하였다. 소주의 성택진과 진택진, 호주의 남심진, 쌍림진(雙林鎭), 오청진(烏靑鎭), 가흥의 복원진(濮院鎭), 왕강경진(王江涇鎭), 왕점진(王店鎭) 등이 이러한 경우였다.주 648
각주 648)
박기수(2007), 「수공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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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업도 농촌수공업으로 성행했다. 초기에는 농민들의 생계보충을 위한 농가부업의 일환으로 출발했지만 점차 전업화되어 갔다. 농촌에서 생산된 생사를 원료로 한 견직업은 주로 숙련된 기술을 지닌 도시와 전업 시진에서 이루어졌지만, 일부 농촌에서는 도시주민이나 재촌 지주를 대상으로 하여 토주(土紬)라는 저급 견직물을 생산하기도 했다.
민영수공업의 성장과 함께 16세기 이후 은(銀)의 대량 유입에 기초한 화폐경제의 성장은 교통과 상업을 발달시켰다. 송대부터 계속된 교통망의 정비는 원대의 역참과 더불어 명대에서도 새로운 도로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 북경 천도 이후 북경과 북변(北邊)에서 필요한 수백만석의 식량을 남방에서 운반하기 위해 1411년(영락 9) 개통된 회통하(會通河)는 항주에서 개봉을 연결하였으며, 경항(京杭)운하는 북경과 강남 가가지의 시진을 연결하였다. 이외에 100여 노선에 달하는 수륙상업노선들은 북의 요통에서 남의 복건, 동의 상해에서 서의 섬서 지역을 연결하면서 상품과 물자의 유통을 매우 원활하게 만들었다.
농촌수공업의 발달로 강남지역의 농지가 면화나 뽕나무재배 등 직물원료 생산지로 바뀌면서 곡물생산이 줄어 이 지역의 식량부족을 야기했다. 부족한 식량은 광동, 호북, 복건 등 인근 내륙지역에서 유입되었다. 그러므로 송대 이후 “소주와 호주가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蘇湖熟 天下足(소호숙 천하)]”는 말이 명 중기부터 “호남과 호북이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는 말로 바뀌었다. 호광지역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대두한 것이다. 곡창지대인 호광은 사천(四川)지역에 의지했고, 면방직업이 발달한 전업 시진과 장강(長江) 연안의 시진은 호광지역에 의존하면서 이들 지역간에 더욱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동북, 화북의 잡곡과 각 지역에서 생산된 특산물들도 편리한 수운교통망을 통해 전국 각지의 시장으로 유통되어 점차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아편전쟁 이전시기 유통된 상품유통향 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약 245억근(斤)이 유통된 곡물로써 전체 유통량의 42%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 상품이 255.5담(擔)이 유통되어 전체의 24%를 차지한 면포였으며, 소금, 차, 견직물 순으로 유통량이 많았다.
화폐경제, 수공업의 성장, 교통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에 의해 견인되면서 한편으로 상업의 성장을 더욱 가속화했다. 16세기 이후 분명해진 상업화, 화폐경제, 도시화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상인의 힘과 위신이 점차 상승됐으며, 유학교육보다 금전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모하였고, 이러한 사회분위기의 변화에 부응하여 상인들도 명 중엽 이후 혈연과 지연을 기초로 집단화하여 사회적 위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화 경향은 동향인의 모임인 회관(會館)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들 집단화된 상인 주에 대표적인 그룹이 강남의 휘주상인(徽州商人)과 강북의 산서상인(山西商人)이었다.
휘주상인은 만력 연간(1723~1620)에 급성장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식량과 지역 생산물에 의지했으나, 점차 범위를 확대하여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소금과 면포, 비단, 차 그리고 경덕진의 자기까지 거의 모든 상품의 유통을 담당하였다. 특히 양자강 중상류지역에서 생산되는 곡식, 목재, 약재 그리고 화북과 동북의 면화, 콩 등을 취급하여 남북 상로와 동서 상로를 장악하고, 진, 현, 주, 부와 대도시를 연결하는 유통망을 확보했다. 이들이 확보한 상품유통권은 연해를 거쳐 동남아까지 확장되었다.
산서상인은 지리적 장점을 이용하여 양곡과 소금의 유통에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산서상인들은 서북을 잇는 변방무역외에도 가장 큰 염장(鹽藏)이 있는 양회(揚淮), 강절(江浙)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휘주상인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임으로써 천하양대상방(天下兩大商幇)으로 불리웠다. 19세기 산서상인들은 금융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고객과의 철저한 신용을 바탕으로 현대식 은행업무인 송금을 전담하는 표호(票號)를 설립하였다. 본점을 평요(平遙), 기현(祁縣), 태곡(太谷)에 둔 표호들은 전국 주요도시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정부의 공금수송은 물론, 조선의 신의주와 일본의 고베에 지점을 설치하여 국제송금업무까지 담당했다.주 649
각주 649)
이화승(2007), 「상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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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상공업의 발달은 도시발달을 야기하였다. 대도시는 소주, 송강, 상주, 항주, 가흥, 호주부 등 강남지역에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대도시 주위에는 촌락이 도시로 성장한 많은 시진들이 있었다. 강남지역 대도시와 시진외에도 남북상인들이 몰려든 전국 33개 주요 부, 주, 현에서 상인들에게 거두어들인 상세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에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다.
2) 일본
에도막부는 에도[江戶 : 오늘날의 東京], 오사카, 교토를 비롯해 나가사키, 사카이, 나라, 야마다 등의 주요도시를 직할 관리함과 동시에 육지와 바다의 교통을 관리 장악했다. 막부는 에도에서 여러 지방으로 통하는 방사선형의 5가도(街道)[동해도(東海道), 중산도(中山道), 일광도중(日光道中), 오주도중(奧州道中), 갑주도중(甲州道中)]를 정비하였다. 또한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의 기조하에 대형선박의 건조와 원양항해를 금지하였지만, 물류의 주요수단인 연안항로의 정비에 힘을 쏟아 해상교통을 촉진시켰다. 해상교통로는 17세기 초 에도와 오사카 간의 남해로가 정비되었고, 17세기 중엽에는 동회항로(東廻航路), 서회항로(西廻航路)가 정비되었다. 이리하여 전국 규모의 육상과 해상교통체계가 확립되었다.주 650
각주 650)
水本邦彦(미쯔모도 쿠니히코)(2003), 「막번체제」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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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아울러 에도막부는 도량형을 통제하고, 화폐의 주조권을 독점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에도 막부는 일반 다이묘를 능가하는 중앙정권으로서의 실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막번체제 하에서 영주들은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가신과 상공업자를 성하정에 집중시켰다. 영주는 농민의 잉여생산물 모두를 연공(年貢)으로 수취한다는 수확고의 4~5할을 징수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영주는 농가경영의 유지에 불가결한 상품유통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과도한 시장접촉을 막았다. 이를 위해 영주들은 성하정과 약간의 재정(才町)에만 상업을 허용하였다. 농가에서 필요한 비자급분의 생산과 유통도 성하정이 담당함으로써, 농촌과 도시가 뚜렷하게 분리되었다. 일본 중세에서 근세 이행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성하정은 영국(英國)내의 상공업 중심지인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주 651
각주 651)
이헌창(1999), 「조선후기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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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의 발흥은 종래 영주와 강하게 유착하여 활약하던 초기 호상(豪商)들을 대신해 새로운 상인계층을 출현시켰다. 새로운 상인들은 종래의 영주 수요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도시주민이 된 상인, 직인, 나아가 일용직 등 하층민들의 수요에도 맞추어 상품을 공급하였다. 성하정에 모여든 상인들은 17세기까지 거대상인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도시상인은 도시수요의 증대에 걸맞게 발전하고, 농촌까지 포함하는 시장을 지배하는 매입도매상[仕入問屋 시이레토이야]이 아니라 도시에서 소매를 주로 하는 판매점, 중매상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18세기 이후 비단과 목면의 도매상[問屋]이 되는 시라끼야[白木屋]와 카시와야[栢屋] 등도 17세기 후반에는 주로 교토에서 들여오는 방물, 담뱃대, 부채 등을 취급하고 때로는 말린 정어리를 원료로 한 비료, 쌀, 콩, 연초 등과 같은 상품도 취급했다. 17세기의 성하정 상인들의 취급상품은 잡다했고, 영업내용은 전업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17세기 원격지 거래를 담당했던 상인들은 기내 재향정(畿內 在鄕町) 상인과 동북, 관동의 재정(在町) 상인들이었다. 이러한 상인들은 수송수단과 도시상업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농민의 다종다양한 농산물을 매집하고, 대신 씨를 뺀 목화솜[繰綿], 무명 등 선진지역의 상품을 판매했다.
17세기 소자본의 상인들이 주류를 이루던 상업계에서 도시상업이 번성하기 시작한 원록기(元錄期 : 1688~1704)부터 향보기(享保期 : 1716~1736)에 거대 상인이 출현하였다. 17세기 후반이후 수하업자의 비중은 저하되고, 특정 물품은 취급하는 전업도매상[專業問屋]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수수료를 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금으로 대량의 상품을 매입해 판매하는 매입도매상으로 변신하여 이제까지 원격지 상인의 단골이었던 동북지역과 관동지역의 상인과 직접 거래하였다. 이러한 매입도매상의 성장은 에도와 오사카의 인구를 증가시켰다. 에도에는 교토와 오사카에서 올라온 상품량이 격증해 하역과 운송을 위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일용직 고용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상품을 팔러 돌아다니는 소상인인 보떼우리 등도 증가했다. 이리하여 향보기에는 일용직 고용층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하층민이 에도와 오사카 등 거대도시에서 형성되었다.주 652
각주 652)
藤井讓治(후지이 죠오지)(2003), 「근세사회의 성숙」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외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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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경제(領國經濟)가 전국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전국적인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써 삼도(三都)가 성장하였다. 참근교대제는 인구 100만의 거대도시 에도를 출현시켰고, 연공미의 거래는 오사카를 발전시킴으로써 17세기 후반 전국적 시장을 창출하였다. 정치적 중심지로써 에도,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써 오사카, 영주의 고급수요에 응하는 전통공업의 중심지로써 교토가 영국경제를 전국적으로 통합하는 지위를 지닌 삼도로 성장한 것이다.주 653
각주 653)
이헌창(1999),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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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세를 대표하는 상인은 근강상인(近江商人)이다. 행상에서 출발한 근강상인은 전국각지에 지점을 두고 다양한 상품과 거래를 행하며, 공동기업이나 회계방식을 동원하여 합리적 경영을 한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3) 조선
성리학을 지배이념을 삼았던 조선초기 조선왕조는 맹자의 중경의리(重義輕利)사상을 수용하여 이재(理財)의 추구를 경계한 반면, 무농(務農)과 절용(節用)을 경제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제사상에 입각하여 조선왕조는 상업을 억제하고, 사치를 금지하며, 국용(國用)을 절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억말론적 상업관은 16세기 이후 무본보말론(務本補末論)적 상업관으로 변하였다. 무본보말론은 상업이 농민의 경리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국부(國富)를 증진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상업의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상업관이었다. 무본보말론은 16세기 후반 대두하였지만, 국가운영의 경제론으로 확산된 직접적인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17세기 전반의 무본보말론자들은 농업에서의 상업적 영농의 확대, 소금, 산삼, 은광개발 등과 감은 산천의 이익을 개발하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운송수단인 선박과 수레의 개선과 제조이용, 새로운 금속화폐의 주조와 유통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전란으로 파괴된 농업생산기반을 회복하기 위해 농업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농업외의 다양한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농민경제의 안정을 확보하고 국가의 재정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주 654
각주 654)
백승철(2000), 『조선후기 상업사연구-상업론·상업정책』,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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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관의 변화는 현실 경제의 변화에 견인되면서 동시에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지녔다. 17세기 후반이후에는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였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상업이 성장하였다. 이 시기 물가는 장기적인 안정속에 완만한 상승추세였으며,주 655
각주 655)
이헌창(1998), 「숙종-정조조(1678~1800년간) 미가의 변동」 『경제사학』 21, 경제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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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또한 기복이 없지 않았지만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다.주 656
각주 656)
신용하·권태환(1977),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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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인구성장과 물가안정을 기반으로 상품화폐경제는 매우 건실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건실한 경제성장을 더욱 촉진한 것은 육상, 해상교통의 발달이었다. 육상교통의 경우, 18세기 중엽이후 한양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망이 계속 증가하여 6대로에서 7대로, 9대로로 칭해지다가, 19세기 후반에는 10대로를 칭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기존 도로의 확대나 정비, 신작로 개설, 빠른 길의 개척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경강선인(京江船人)의 주도하에 항해술과 조선술도 발전하였다. 예컨대 17세기 중엽에는 태안반도 끝인 안흥량(安興梁)을 넘다가 침몰사고가 빈발했다. 정부에서는 안흥량 남북에 각각 남창(南倉)과 북창(北倉)을 설치하여, 조운선에 실린 세곡을 남창에 하역한 다음 빈 배로 북창까지 가서 육로로 북창까지 운송된 세곡을 싣고 서울로 운송하게 하였다. 이처럼 안흥량은 뱃사람들에게 공포의 해역이었는데, 18세기 중엽 『택리지(擇里志)』에는 “뱃사람들이 안흥량 넘기를 자기 집 뜰을 거니는 것과 같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만큼 항해술이 진전되었던 것이다.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전을 기초로 18세기 이후에는 전국 연해지역을 육상으로 연결하는 연로(沿路)와 경강(京江)-함경도 경흥, 경강-의주, 해남-제주에 이르는 3가지 해로(海路)가 완전하게 파악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이처럼 연로와 해로, 그리고 9대 간선도로망을 통하여 전국은 육상과 해상으로 완전히 연결되었다. 또한 17세기 말에 전국적으로 유통된 금속화폐인 상평통보는 18세기 초반에 법으로 유통이 금지된 함경도 마천령 이북지역까지 유통되었다. 이처럼 매우 빠르게 금속화폐의 유통지역이 확대된 것은 화폐를 받아들일 만한 경제적 기반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상교통, 해상교통의 발달로 인한 상품유통권의 확대와 화폐유통의 전국적 확산은 새로운 유통시장을 창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말 이후 지방장시의 대형화추세와 연결되면서 상품유통경제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였다.주 657
각주 657)
한상권(1981), 「18세기말 19세기초 장시발달에 대한 기초연구」 『한국사론』 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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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지역 내의 상품유통권과 전국적 상품유통의 중심지였던 대포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조선후기의 상품유통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단일한 상품유통권으로 통합되어 갔다. 즉 포구를 중심으로 한 포구시장권과 장시를 중심으로 한 장시시장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적 시장을 기반으로 농촌에서 생산된 생산물이 농촌장시를 통하여 중간도매상에게 매집되고, 이는 포구가 있는 산지 매집상에게 모였으며, 이는 다시 선산과 포구주인층에 의하여 서울이나 다른 유통지역으로 운반되는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대체로 18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완결되었다.주 658
각주 658)
고동환(1994), 「조선후기 교통의 발달과 전국적 시장 권의 형성」 『문화역사지리』 8,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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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육상, 해상교통의 발전과 시장권의 통합, 확대는 서울시장과 포구상업의 번성을 초래하였다.
서울의 시전상업은 17세기 말을 전후하여 크게 정비되었다. 17세기 후반 비시전계상인이 성장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대응조치로 17세기 최말기에 금난전권(禁亂廛權)이 확립되었고, 1706년(숙종 32)에는 평시서(平市署) 시안(市案)에 각 시전이 주관하는 물종이 자세히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금난전권의 확립과 주관물종의 시안등재는 특정물조의 독점권의 시전상인에게 부여한 조치였기 때문에, 시전상인의 이익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늘었다. 그러므로 비시전계 상인들도 이러한 특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전 창설을 도모하여, 18세기 전반기에는 소소한 물종에도 대부분 시전이 창설되었다. 그동안 영세소상인들이 길거리에서 행상이나 좌판에서 자유롭게 판매했던 미나리와 같은 소소한 물종도 평시서 시안에 등재됨으로써 시전화되었다. 그 결과 17세기 전반 30여 개에 불과했던 시전이 18세기 말에 이르면 120여 개로 늘어났다. 18세기 전반 시전 설치의 목적은 상품거래를 통해 이익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비시전계 상인에 대한 금난전권의 행사를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 창설된 시전의 대부분은 수공업자나 사상세력들이 권력기관과 결탁하여 설립한 시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영세소시민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는 크게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신설 시전의 증가와 짝하여 서울상업계에는 시안에 등록하지 않은 난전 상업도 활성화되었다. 난전의 형태는 수지물(手持物) 판매가 합법적으로 허용된 군병들에 의한 난전, 지방 향상(鄕商)과 선상에 의해 전개된 난전, 수공업자들이 직접 제조 판매하는 난전, 부상대고와 세력가의 하인들이 생산지나 서울로 상품이 반입되는 중간에서 물건을 매집하여 전개하는 난전도고(亂廛都賈), 시전체계 하부에 종속되었던 여객주인, 중도아(中都兒)들이 시전상인을 배제하고 상품을 유통시키는 난전, 그리고 다른 시전의 주과물종을 자신의 주관물종과 유사하다는 점을 구실로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시전에 의한 난전 등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주 659
각주 659)
고동환(2000), 「18세기 서울의 상업구조변동」 『서울상업사』,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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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중심지로 발전하였던 포구들은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바닷물이 올라올 수 있었던 포구였다. 대포구는 서울의 경강포구 외에도 낙동강 하구의 김해 칠성포, 금강하류에 위치한 은진의 강경포, 그리고 커다란 강은 없었지만 북어생산의 집산지로써 발달한 동해안의 원산포, 그리고 남해안의 창원 마산포가 대표적이었다.
전국적 시장의 중심은 서울을 배후시장으로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국에서 가장 큰 포구시장이었던 마포와 용산, 서강이 위치한 경강(京江)이었다. 경강은 서울 시장과 관련해서는 미곡, 목재, 어물, 소금과 같은 상품의 도매시장으로서 기능하였다. 소매상이나 행상들은 경강에 와서 어염이나 젓갈, 목재, 주류 등을 구입한 뒤, 도성 안에 들어가서 일반소비자에게 판매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강은 전국적인 시장과 관련하여서는 전국의 상품가격을 조절하는 중심시장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예컨대 당시 경강에 집하되는 미곡을 ‘강상미(江上米)’라고 불렀는데, 이 강상미는 전국 미곡가격의 동향에 매우 민감하였다. 다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서울지역보다 미가가 높으면 경강의 미곡을 취급하는 무곡상(貿穀商)들은 경강에 올라온 미곡을 다시 내려 보내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그 양은 많을 경우 강상미의 1/3에 달하였다. 막대한 자본력과 권력이 비호 하에 경강상인들은 생산지부터 상품을 독점하고, 서울에서 출하시기를 조절함으로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경강상인이 서울의 상권을 계통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33년(순조 33) 서울의 ‘쌀폭동’이었다. 경강객주(京江客主) 김재순(金在純)이 다른 객주는 물론 도성 안의 미전(米廛) 상인에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여 쌀을 팔지 못하게 하였다. 쌀이 시장에 나오지 않자 쌀 가격이 급등하고,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할 수 없었던 빈민층이 쌀값폭등에 항의하여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사건은 19세기 경가의 여객 주인이 미전상인보다는 훨씬 주도적으로 미가의 조절기능을 가졌다는 점에서 경강상인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주 660
각주 660)
고동환(1998),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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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강상인과 함께 대규모 상인으로 성장한 상인이 개성상인이었다. 개성상인들은 전국의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상업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무역과 홍삼제조업에도 진출하였다. 개성상인들은 차인(差人), 서사(書士), 수사환(首使喚), 사환(使喚) 등으로 구성되는 치밀한 상업조직을 내부에 갖고 있었다. 또한 사개치부라는 독특한 복식부기방식의 회계법도 고안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상업조직을 기초로 전국의 주요지역에 송방(松房)을 설치하여 차인을 상주시키고 그 지역의 상품유통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성상인들은 자본력은 물론 조직력에서도 국내의 여타 상인에 비해 훨씬 월등했으므로 전국을 대상으로 한 도고(都賈)상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이후 청과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개성상인들이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래상(萊商)과 함께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상인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개성상인들은 신용에 기초한 금융거래기법을 발달시킴으로써 합리적인 상업관행을 정착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은 신용을 기초로 한 거래관행은 금융의 대부에서도 그대로 관철되었다. 그것이 개성지역에서만 존재했던 독특한 금융관행인 시변제(市邊制)였다. 17세기 무렵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변제는 자금의 대여자와 차용자가 중개인을 매개로 물적 담보 없이 신용을 바탕으로 대차관계를 맺는 제도였다. 신용을 토대로 한 거래관행에 익숙한 개성상인들은 어음(於音)과 환(換)이라는 신용화폐를 창안하여 유통시켰다. 개성상인들은 국내 상업과 국제무역에서 축적한 자본을 생산부문에 투자하였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광산을 채굴하는 잠채광업에 투자하여 광산물주가 되기도 하였고, 삼을 캐는 사람들에게 미리 삼가(蔘價)를 주고 정해진 날짜에 인삼을 받는 등, 생산부문에 대한 선대제적 경영도 시도하였다. 개성상인들의 생산부문에의 투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인삼재배업과 홍삼제조업이었다. 그들의 자본축적과 그 자본의 생산부문에의 투자는 우리나라 중세말기의 근대적 지향을 보여주는 징표로도 이해되고 있다.주 661
각주 661)
고동환(2009), 「조선후기 開城의 도시구조와 商業」 『지방사와 지방문화』 12권 1호, 역사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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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648)
    박기수(2007), 「수공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바로가기
  • 각주 649)
    이화승(2007), 「상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바로가기
  • 각주 650)
    水本邦彦(미쯔모도 쿠니히코)(2003), 「막번체제」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바로가기
  • 각주 651)
    이헌창(1999), 「조선후기사회와 일본근세사회의 상품유통의 비교연구-전근대재정과 시장형성의 관련성을 중심으로-」『재정정책논집』 1, 한국재정정책학회. 바로가기
  • 각주 652)
    藤井讓治(후지이 죠오지)(2003), 「근세사회의 성숙」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외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바로가기
  • 각주 653)
    이헌창(1999), 앞의 논문 참조. 바로가기
  • 각주 654)
    백승철(2000), 『조선후기 상업사연구-상업론·상업정책』, 혜안. 바로가기
  • 각주 655)
    이헌창(1998), 「숙종-정조조(1678~1800년간) 미가의 변동」 『경제사학』 21, 경제사학회. 바로가기
  • 각주 656)
    신용하·권태환(1977), 앞의 논문 참조. 바로가기
  • 각주 657)
    한상권(1981), 「18세기말 19세기초 장시발달에 대한 기초연구」 『한국사론』 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바로가기
  • 각주 658)
    고동환(1994), 「조선후기 교통의 발달과 전국적 시장 권의 형성」 『문화역사지리』 8,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바로가기
  • 각주 659)
    고동환(2000), 「18세기 서울의 상업구조변동」 『서울상업사』, 태학사. 바로가기
  • 각주 660)
    고동환(1998), 『조선후기 서울상업발달사연구』, 지식산업사. 바로가기
  • 각주 661)
    고동환(2009), 「조선후기 開城의 도시구조와 商業」 『지방사와 지방문화』 12권 1호, 역사문화학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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