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일본의 인구변동과 사회변화

2. 일본의 인구변동과 사회변화

일본은 중국과 달리 17세기가 인구 대폭발의 시대였고, 18세기는 인구 정체기였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9세기 말기는 산업혁명에 따른 근대적인 인구증가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일본의 인구변동을 보면 다음의 〈표 3〉과 같다.주 629
각주 629)
鬼頭宏 카토 히로시 지음·최혜주·손병규 옮김(2009), 『인구로 읽는 일본사』, 어문학사.
닫기

표 3 일본의 인구변동
연도인구(명)
1150638만
16001,227만
17213,127만
17503,101만
17922,987만
18463,229만
18904,130만
〈표 3〉에서 보듯이 1600년에서 1721년의 120년 동안 인구는 2.5배나 증가했다. 17세기의 급속한 인구증가는 농업사회에서 일어난 시장경제의 보편화와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경사지와 산악부가 많은 반면, 농경에 적당한 토지는 협소하다. 그러므로 경작지의 대규모 확대는 쉽지 않았다. 경지면적은 태합검지(太閤檢地)가 끝난 시점인 1598년 180만정보에서 메이지초기인 19세기 후반 440만정보로 증가했다. 같은 시기 인구는 3.3배 증가했지만, 경지면적은 2.4배 증가하여,주 630
각주 630)
速水融 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근세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日本近世の經濟社會), 혜안, 196쪽.
닫기
경지면적의 확대는 인구증가에 미치지 못했다. 식량생산의 증대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증대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이는 토지생산성의 증대와 토지이용의 고도화를 통해 달성되었다. 우선 노동조직이 바뀌었다. 종전 나고[名子]와 게닌[下人] 등의 예속노동력 사역에 의한 농장경영은 노동의 집중관리가 곤란하고, 토지이용이 방만했다. 그러므로 농장경영주인 묘슈[名主]는 농장경영을 포기하는 대신, 나고와 게닌들의 가족노동력을 이용하여 집약경영을 실현함으로써 증대된 생산량을 소작료로 수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한 쌍의 부부와 가족노동력에 기초한 소농경영이 대두하였고, 지주-소작에 기초한 소농경영이 자립을 달성하였다.
소농경영은 교토[京都]와 나라[奈良]의 도시 주변부로부터 시작되어 효고[兵庫]나 사카이[堺] 같은 도시로 파급됨으로써 16세기에는 기내(畿內) 평야지대로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소농경영의 진전에는 농업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되었다. 17세기만큼 많은 농서가 출판되고 필사본이 유포된 시대는 없었다고 얘기된다. 대부분의 농서에는 심경(深耕), 종자선별, 파종시기, 시비(施肥)와 같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기술들이 실렸다. 이로 인해 집약적 농업기술은 일본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수도작의 우위는 변함이 없었지만, 지리적 특성을 살린 특산품도 각지에서 생산되었다. 특히 비단의 원료인 생사(生絲)의 생산과 잠사업은 습기가 많은 일본 중앙부에 집중되었다. 조선에서 도입된 면화도 17세기에 모래지대에서 재배되었는데, 일본서부를 중심으로 생산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대중들의 옷감으로 무명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의료(衣料) 혁명이라고까지 얘기될 정도로 대중들이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야기한 것이었다. 소농경영에서 농업기술은 노동력의 집약과 경지면적당 수확량의 증대라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소농경영이 최고의 생산성을 발휘하게 되면서 인구가 대폭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폭발적 인구증가를 가능케 한 사회적 동력을 하야미 아키라[速水融]는 ‘경제사회’의 성립에서 찾는다. 경제사회는 인간이 가진 종교, 신분, 문화 등 다원적인 가치기준 가운데 경제적 가치가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회전하는 사회로 규정된다. 경제사회 성립 이전의 농민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지었지만, 경제사회 성립 이후에는 비용을 최소화하여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제인으로 변모하였다. 경제사회는 16세기말 기내지역과 그 주변에서 성립하였으며, 새로운 영주제의 전개에 의해 17세기를 통해 거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영주제는 병농분리(兵農分離)에 기초한 성하정(城下町)을 건설하고 소비인구집단을 강제적으로 창출했다. 그러므로 초기 기내지역에서 완만히 진행되었던 성하정과 병농분리도 영주제의 전개에 따라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물의 급격한 수요증대가 나타났다.
이와 더불어 도쿠가와 막부가 시행한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로 인해 에도[江戶]는 거대한 소비력을 갖춘 도시로 급속히 발전해고, 오사카[大坂]는 에도에 필요한 물자공급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기에서 전국경제가 성립하였다. 영주는 농민으로부터 받은 연공을 미곡과 화폐로 통일했기 때문에 미곡을 화폐로 교환해야 했으며, 여기에 영주, 상인, 농민들 사이에 물자, 서비스, 화폐가 순환하게 되었다. 화폐사용은 전국민으로 확산되었고, 농민의 행동에 경제적 인센티브가 작용하였다.주 631
각주 631)
速水融(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위의 책, 88~92쪽.
닫기
화폐경제, 시장경제, 도시경제의 성장이 경제사회의 성립의 촉진했고, 이러한 경제사회의 성립이 인구증가를 가능케 한 핵심요소였다.
한편 소농경영이 일반화되면서 부부가족이 경영단위가 되고 자립한 농민은 신분적 예속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결혼율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상승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세대규모도 점차 축소되었다. 세대규모는 17세기 후반 7.04명에서 18세기 전반 6.3명, 18세기 후반 4.2명으로 줄었다. 세대규모의 축소가 진행된 17세기 이후는 누구나 생애 한번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개혼(皆婚)사회가 성립하였다. 세대규모의 축소와 개혼사회의 성립은 소농자립현상의 한 단면이었다. 이와 아울러 사망률도 대폭 감소되었다. 이 시기 사망률감소의 원인은 의료, 의학의 진보보다는 의식주 전반에 걸친 생활수준의 향상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고구마 등의 신종작물이 도입되어 재배되었으며, 1일 3식제가 정착되어 식생활이 충실화되었다. 또한 무명의 보급으로 옷감과 침구가 개선되었고, 타타미 등이 보급되어 주거생활에서도 향상이 있었다.
일본에서 18세기 인구정체는 도시화율의 진전에 따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8세기 일본에서는 많은 도시들이 번성하였는데, 도시인구는 재해와 전염병에 대해 농촌보다 취약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또한 도시에서는 성비의 불균형, 낮은 유배우율(有配偶率), 짧은 유배우 기간, 낮은 유배우 출생력 등으로 인해 출생률이 낮았다. 도시화의 진전과 도시에서의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산력이 18세기 인구정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18세기 인구가 정체된 원인을 막번제 경제가 정점에 도달하여 과잉인구가 기근이나 낙태, 영아살해로 도태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즉 18세기 인구정체의 원인을 맬더스의 덫에서 찾고자 하는 견해가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경지와 인구사이의 긴장이 발생했지만, 결혼시기를 늦추는 만혼 등과 같은 사회적 풍조가 대두되면서 의식적으로 인구를 억제하여 이러한 긴장을 완화함으로써 1인당 소득수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즉 18세기 낮은 인구성장률은 맬더스의 예방적 억제로 인한 것으로서, 1인당 소득수준을 향상시켜 19세기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에 비해 항상 뒤쳐졌던 일본이 19세기 공업화에서 중국보다 앞서게 된 중요한 요인이 바로 인구의 예방적 억제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주 632
각주 632)
鬼頭宏(카토 히로시) 지음·최혜주·손병규 옮김(2009), 앞의 책.
닫기


  • 각주 629)
    鬼頭宏 카토 히로시 지음·최혜주·손병규 옮김(2009), 『인구로 읽는 일본사』, 어문학사. 바로가기
  • 각주 630)
    速水融 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근세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日本近世の經濟社會), 혜안, 196쪽. 바로가기
  • 각주 631)
    速水融(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위의 책, 88~92쪽. 바로가기
  • 각주 632)
    鬼頭宏(카토 히로시) 지음·최혜주·손병규 옮김(2009), 앞의 책.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인구변동과 사회변화 자료번호 : edeah.d_0004_003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