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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무역에서 구리무역으로

3. 은무역에서 구리무역으로

1685년 조교레이에 규정된 네덜란드선의 무역총액은 은3,000관이다. 이를 금으로 환산하면 고반 50,000냥이다. 네덜란드선의 실제 무역 내역을 보면 다음 〈표 13〉과 같다.
표 13 1685년 네덜란드선의 무역총량제에 따른 실제 무역 내용
규정(고반 50,000냥)비율환산 무역 내용
37,603냥75.2%구리 2,350,000근(1,410,000㎏)
7,658냥15.3구리 이외의 대가(장뇌, 밀, 도자기, 해산물 등), 네덜란드인의 일본 체류 경비
4,739냥9.5고반
합계 50,000냥
즉 무역총액의 75% 정도가 구리로 환산되어 수출되었다. 이처럼 조교레이는 구리무역을 근간으로 하여 발포된 것이다.주 569
각주 569)
山脇悌二郞(1964),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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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대 무렵부터 일본 국내의 구리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구리가 은을 앞서 최대 수출품으로 부상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수요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은 대규모의 동전주조 사업을 하여, 구리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구리생산의 증대에 힘입어 1685년데 규정된 교역량 외에 은 1,000관에 해당하는 물품을 구리로 구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도시로모노가에[銅代物替]가 1695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1696년에는 은 5,000관, 1697년에는 다시 은 2,000관에 해당하는 무역총액이 추가로 허락되었다. 은 5,000관은 구리로 수출되고, 2,000관은 해산물, 해조류 등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시로모노가에라고 한다. 이것을 ‘츠이고죠우다카[追御定高]’라고 한다. 추가의 해산물 등 시로모노가에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지만, 구리의 수추 증가에 따라 구리에 의한 시로모노가에가 실시되어, 은 4,200관분은 청선, 800관분은 네덜란드선에 할당되었다.주 570
각주 570)
小葉田淳(1996), 133쪽 ; 任鴻章(1988), 153~156쪽 ; 山脇悌二郞(1964), 99~101쪽 ; 윤병남(2007),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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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에는 종전의 순도 64%의 겐로쿠은이 새로 개주(改鑄)되었다. 화폐의 악질화는 네덜란드나 중국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겐로쿠은 개주와 동시에 도시로모노가에제도가 나가사키무역에서 허용되었다.주 571
각주 571)
東野治之(1997),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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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도는 교역 활당량을 채운 뒤 귀로에 다른 지역에서 청상선이 밀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밀무역은 근절되기 어려워서, 밀무역을 통해서도 상당량의 구리가 유출되었다. 이러한 구리의 유출이 1690년대 구리 광업의 발전을 촉진시켜, 1690년대 말에 천만 근을 기록할 정도로 정점에 달하였다.주 572
각주 572)
윤병남(2007), 173~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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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는 광산에서 1차 제련을 한다. 이 제련된 순도 95% 정도의 조동(粗銅)을 아라도[荒銅]라고 부른다. 이 구리의 대부분은 오사카로 보내졌다. 은을 0.044% 이상 함유하는 아라도에서 은을 분리시키는 핵심공정이 남반부키[南蠻吹]이다. 이 기술은 오사카 제련업자들이 오랫동안 독점하고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수출용 사도오[棹銅]가 만들어졌다. 사도오는 길이 22㎝, 폭 2㎝, 두께 1.5㎝, 무게 300g 정도의 구리 막대기로, 100건 단위로 포장되어 나가사키에서 외국상인에게 넘겨졌다.주 573
각주 573)
村上隆(2007), 156쪽 ; 윤병남(2007),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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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상단 막대기가 사도오[棹銅]
해외무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리의 안정적인 공급이 절대 필요하였다. 바쿠후는 구리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바쿠후는 1701년 오사카에 긴자[銀座]의 하부기관으로 도자[銅座]를 설립하였다. 도자는 구리 무역에 관한 거의 전권을 행사하였다. 구리무역을 독점해왔던 구리무역상이 도자의 감독을 받았다. 제련업자도 그 감독 아래 제련하였다. 도자는 구리의 구입가격을 결정하는 권한을 부여받는 등 구리무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구리의 생산, 제련, 유통에 대하 바쿠후의 간섭과 도자의 전권 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712년 도자가 폐지되었다. 도자의 설치와 폐지가 반복된 것은 그만큼 구리무역에 대한 바쿠후의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주 574
각주 574)
小葉田淳(1996), 134쪽 ; 윤병남(2007), 185~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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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569)
    山脇悌二郞(1964), 50~51쪽. 바로가기
  • 각주 570)
    小葉田淳(1996), 133쪽 ; 任鴻章(1988), 153~156쪽 ; 山脇悌二郞(1964), 99~101쪽 ; 윤병남(2007), 173쪽. 바로가기
  • 각주 571)
    東野治之(1997), 177쪽. 바로가기
  • 각주 572)
    윤병남(2007), 173~175쪽. 바로가기
  • 각주 573)
    村上隆(2007), 156쪽 ; 윤병남(2007), 168쪽. 바로가기
  • 각주 574)
    小葉田淳(1996), 134쪽 ; 윤병남(2007), 185~186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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