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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진해령, 일본의 조교레이 실시 이후의 변화

1. 청의 진해령, 일본의 조교레이 실시 이후의 변화

1684년~85년은 청과 일본의 대외무역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중국의 전해령, 일본의 조교레이[貞享令]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 1684년 강희제는 바다를 개방하고 해외와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전해령(展海令)이다.
청은 해외와의 교역을 관리하는 해관을 장쑤[江蘇], 저잘, 푸젠, 광둥에 두었다. 1684년에 민[閩, 푸젠]해관은 샤먼, 위에[粤, 광둥] 해관은 광저우에 두었다. 장[江, 장쑤]해관은 1685년에 화팅[華亭]현에 두었다가, 1687년에 상하이로 옮겼다. 저[浙, 저장]해관은 1686년에 닝보에 두었다. 상선이 입항하면 선초(船鈔)라는 입항세와, 화물에 부과하는 화세(貨稅)를 징수하였다.주 552
각주 552)
上田信(2005), 305~306쪽 ; 任鴻章(1988), 124~126쪽 ; 夏秀瑞·孫玉琴(2001), 『中國對外貿易史』(제1책), 北京 : 對外經濟貿易大學出版社, 358~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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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중의 해상(海上)무역 및 해상항로에 따라 중국으로 내항하는 여러 외국의 조공에 대처하였던 것이다.주 553
각주 553)
松浦章(2002), 『淸代海外貿易史の硏究』, 京都 : 朋友書店,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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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년 천계령[천해령] 실시 이후 1684년까지 20여년 간은 산둥에서 광둥까지의 모든 항구가 폐쇄되었으므로,주 554
각주 554)
로이드 이스트만 지음·이승휘 옮김(1999),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서울 : 돌베개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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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臺灣, 東寧]선이 나가사키무역을 독점하였다. 타이완선은 나가사키에 간 중국선[동남아시아의 중국선은 제외]의 53% 이상을 차지하였다.주 555
각주 555)
任鴻章(1988),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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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0 나가사키로 출항한 중국선의 지역별 분포
총 선박수타이완
[東寧]
푸젠연해장쑤·저장
연해
광동동남아시아
[南洋]
기타
2711(40%) 1(3%)1122
24 11(4%)5152
103 34(33%)49(48%)117
79123(29%)33(42%)7123
7439(12%)49(66%) 94
3712(5%)30(81%) 4
그러나 〈표 10〉에서 보는 것처럼, 1684년 전해령이 발포된 후에는 상황히 크게 변하였다. 대외무역의 전통을 지닌 푸젠상인이 바로 활약하여 1686년 해외로 도항하는 붐을 일으켰다. 이 1년간 나가사키에 입항한 푸젠 상선은 전체 중국선의 1/3을 차지하였다. 장쑤·저장 상선도 종전의 5% 이하에서 갑자기 50% 정도로 증가하였다.주 556
각주 556)
任鴻章(1988),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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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젠 상선의 주요 수출품은 백사와 비단, 서적·그림·묵 등 문방구류, 천문동 등 약재, 사탕수수 등 농산물, 칠기 등 수공업품, 수입품은 은·금·구리 등 광산물, 해삼·다시마 등 수산물이 주종을 이루었다.주 557
각주 557)
林金水(1997), 『福建對外文化交流史』, 福州 : 福建敎育出版社, 153~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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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푸젠 상선의 비중이 점점 감소한 데 비해, 장쑤·저장의 비중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1719년에는 나가사키에 입항한 청선의 80%를 차지하고 있다.주 558
각주 558)
任鴻章(1988),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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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은 샤먼선, 닝보선처럼 모두 출항지의 명칭을 적게 되어 있다. 이들 항구는 주변의 자항(子港)과 연계되어 있었다. 자항에서 출항한 상선도, 나가사키에 입항할 때는 각각 소속 중심지 항구의 명칭을 붙였다. 따라서 나가사키와 무역관계를 맺은 중국의 항구는 자항까지 포함하면 광범위한 교역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해령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출항한 상선은 남중국해 근해를 따라 북상하여 타이완해협을 지나 바로 나가사키로 향하였다. 전해형 실시 후에는 무역 중심지가 북으로 이전함에 따라, 민위에[閩粤]나 동남아시아에서 출항한 중국선은 대륙 연해안으로 북상하여, 닝보나 푸퉈[普陀]산에서 기항하다가 순풍이 오면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나가사키로 갔다. 따라서 대일 항로에서 안전하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장쑤·저장 지역으로 무역의 중심지가 이동하였던 것이다. 닝보, 푸퉈산, 상하이 등은 현지의 수출입 업무 외에, 동아시아 각지의 나가사키와의 무역 중개지로 발전하였다. 장저[江浙] 연해에 속하는 자푸[乍浦]에는 중계무역의 필요에 따라, 대일 위탁무역업무를 전담하는 아행(牙行)이 설치되기도 하였다.주 559
각주 559)
任鴻章(1988), 136~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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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령~전해령까지의 23년간,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중국선은 매년 20~30척이었다. 전해령이 발포된 다음 해에는 85척이 쇄도하였다.주 560
각주 560)
上田信(2005), 305~306쪽 ; 任鴻章(1988), 124~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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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 7월 입항한 샤먼선은 천계령[천해령]이 철폐되었다는 정보를 전하였다. 일본은 1684년 12월 시호[市法]를 폐지하고, 1685년에 무역선을 총액을 규정하는 조교레이[貞享令]를 실시하였다. 1685년 봄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조교레이를 실시한 것은 중국의 전해령 실시 이후 갑자기 중국상선이 쇄도하여 금은의 유출이 증가하는 상황에 대한 응급책이었다. 시호는 수입품의 가격을 낮추어 지불액을 줄임으로써, 금은의 유출을 막으려는 정책이었다. 거래 선박수가 증가하여 무역액이 높으며, 가격 인하만으로는 지불 총액의 팽창을 막을 수가 없었다.주 561
각주 561)
任鴻章(1988), 144~145쪽 ; 山脇悌二郞(1964), 5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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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교레이는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청선은 6,000관, 네덜란드선은 3,000관으로, 연간 무역총액을 은 9,000관으로 한정한다는 법령이다. 시호의 실패는 바쿠후가 무역총량에 관심을 갖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총량을 규정한 이 정책은 16세기 후반 해외무역이 재개된 이래 일본 정부가 무역량을 제한한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주 562
각주 562)
윤병남(2007),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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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선 3,000관은 금화로 고반[小判] 50,000냥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본 목적은 청선에 의한 은 유출과 네덜란드선에 의한 금 유출을 적극 억제하는 것이었다. 청선 6,000관은 다시 생사, 비단, 약종·잡화의 대금 비율을 각각 2,000관씩으로 정하였다. 네덜란드선 3,000관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중국선의 출항지에 따라 차별을 두고, 입항 선후에 따라 6,000관에 달할 때까지 무역고를 누계하고, 그 후에 입항한 상선은 무역에서 제외하고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런 무역방법을 ‘왓푸시호[割符仕法]’라고 부른다. 이와 동시에 30년간 중지하였던 이토왓푸제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생사 구입을 종전의 1회에서 춘하추 3회로 개정하고, 질이 좋은 백사 외에 질이 떨어지는 생사도 구입하도록 하였다. 이토왓푸제를 다시 실시한 것은 시호 폐지에 따라 야기된 일본상인의 경쟁을 막기 위함이었다.주 563
각주 563)
任鴻章(1988), 145~146쪽 ; 山脇悌二郞(1964), 50~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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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교레이는 죠우다카[定高]라는 무역총액령은 물론, 왓푸시호레이[割符仕法令], 이토왓푸사이코레이[再興令] 등을 포함하는 무역통제책이었다. 조교레이를 실시한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청선에 의한 일본은 유출은 1686년에 596.8관이나, 1694년에는 65.2관으로 격감하였다. 시호 실시 12년간 중국선에 의한 은 유출량은 연평균 5,952.4관 정도였으나, 1685~1697년까지의 13년간의 총 유출량은 3,973.2관이었다. 은 유출 통제의 효과는 이처럼 확연하였다. 네덜란드선에 의한 금 유출도 조교레이 시행 전인 1683년에는 27,944냥, 1684년에는 60,635냥인데 비해, 조교레이 시행 후인 1685년에는 4,739냥, 1686년에는 4,020냥으로 격감하였다. 금 유출 통제 효과도 마찬가지였다.주 564
각주 564)
山脇悌二郞(1964), 5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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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552)
    上田信(2005), 305~306쪽 ; 任鴻章(1988), 124~126쪽 ; 夏秀瑞·孫玉琴(2001), 『中國對外貿易史』(제1책), 北京 : 對外經濟貿易大學出版社, 358~362쪽. 바로가기
  • 각주 553)
    松浦章(2002), 『淸代海外貿易史の硏究』, 京都 : 朋友書店, 5쪽. 바로가기
  • 각주 554)
    로이드 이스트만 지음·이승휘 옮김(1999), 『중국 사회의 지속과 변화』, 서울 : 돌베개 178쪽. 바로가기
  • 각주 555)
    任鴻章(1988), 134쪽. 바로가기
  • 각주 556)
    任鴻章(1988), 134쪽. 바로가기
  • 각주 557)
    林金水(1997), 『福建對外文化交流史』, 福州 : 福建敎育出版社, 153~160쪽. 바로가기
  • 각주 558)
    任鴻章(1988), 134쪽. 바로가기
  • 각주 559)
    任鴻章(1988), 136~142쪽. 바로가기
  • 각주 560)
    上田信(2005), 305~306쪽 ; 任鴻章(1988), 124~126쪽. 바로가기
  • 각주 561)
    任鴻章(1988), 144~145쪽 ; 山脇悌二郞(1964), 50~51쪽. 바로가기
  • 각주 562)
    윤병남(2007), 172쪽. 바로가기
  • 각주 563)
    任鴻章(1988), 145~146쪽 ; 山脇悌二郞(1964), 50~56쪽. 바로가기
  • 각주 564)
    山脇悌二郞(1964), 55~57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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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진해령, 일본의 조교레이 실시 이후의 변화 자료번호 : edeah.d_0004_002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