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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은 중개무역

2. 조선의 은 중개무역

1) 17세기 쓰시마번의 일본은 수출
임진왜란 때 조선 출병을 비롯한 군사비로 과다한 은을 지출한 명은 은 부족과 그에 따른 은 가격의 등귀를 초래했다. 명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은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에 가는 명 사신이 과다한 은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은광 개발을 독려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은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독보적 은산지인 단천은 은맥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국내 은생산 자체가 빈약하였기 때문에, 좀더 근본적으로 은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과의 무역에 주목하였다.주 519
각주 519)
한명기(1992), 「17세기초 銀의 유통과 그 영향」 『규장각』, 15, 서울대 규장각,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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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은 수요가 대량으로 존재하였고, 일본에서는 은광 개발, 은제련 기술의 발전 등에 의해 은 공급력이 증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은의 상대가격이 일본에서 싸고, 조선에서 더 비쌌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은의 흐름이 이루어진 것이다.주 520
각주 520)
정성일(2004),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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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과의 교역은 동래에 설치된 왜관(倭館)에서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 왜관은 동래에만 존재하였다. 왜관은 절영도왜관(1601~1607년), 두모포왜관(1607~1678년), 초량왜관(1678~1876년)으로 위치를 옮겼다. 1609년 기유약조의 체결로, 사절 왕래와 통교 무역을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일본의 무역은 크게 공무역, 사무역[개시무역], 밀무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공무역은 경영 주체가 국가나 국가기관, 사무역은 정부가 지정한 상인이었다. 밀무역은 불법적인 무역이다. 공무역에는 일본측의 구청·구무나 진상[뒤에 봉진(封進)으로 바뀜]과 조선측의 회사(回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공무역도 포함될 수 있다.주 521
각주 521)
정성일(1997), 「일본과의 무역」 『한국사』33, 국사편찬위원회, 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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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간의 무역은 1611년 9월 쓰시마가 최초의 세견선(歲遣船)을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이 배에는 공무역 물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쓰시마번주가 파견한 세견제1선의 공무역 품목과 수량(단위 : 근)
사행원구리후추단목물소뿔용뇌침향유석
정관5030001000600030004000500본330300
도선주 10005003002000
압물 70050030015001500300통
조선측은 많은 수량의 공무역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며, 수량을 줄여서 교역을 하였다.주 522
각주 522)
田代和生(1981),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東京 : 創文社, 58~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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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세견제1선의 정관[정사]분 공무역에는 은 50근(50×16=800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은이 당시 구입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은은 공무역보다는 주로 사무역으로 거래되었다.
일본과의 무역이 재개된 초에는 은의 밀무역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잠상들은 일본인과 내통하여 왜은을 가지고, 중국의 비단 등을 구입해 온 후 이를 다시 동래 왜관의 일본인에게 팔았다. 일본인은 은을 주고 중국 비단을 사갈 동안에 동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밀무역 활동은 의주 잠상과 연계되어 이루어졌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발단 때, 조령(鳥嶺)에서 은상(銀商)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본래 서울 부상(富商)으로서 동래 왜관에서 물건을 팔고 일본은 300냥을 사왔다. 동래에서 조령을 넘어 서울로 이르는 길은 왜은의 통과로였다.주 523
각주 523)
한명기(1992),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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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에는 잠상 조한무(曺汗茂)의 밀무역 사건이 적발되었다. 조한무는 명문을 작성해 주고 일본인에게서 은 400여 냥을 받고 밀무역을 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물품을 압수당했다. 이에 쓰시마에서는 서계(書契)를 갖추어 조한무의 명문을 가져와서 은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는 잠상 물품은 관청에 압수하고 환급하는 사례가 없지만, 예외적으로 돌려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한무는 잠상죄로 사형되었다.주 524
각주 524)
『변례집요』 권14, 潜商路浮税并錄, 임자(1612)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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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밀무역을 하는 것이 활발하였다.
밀무역에서는 조한무처럼 은을 미리 받고 무역품을 뒤에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밀무역 자금으로 은을 미리 받고 약속한 물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경우에는 일본인에 대한 채무인 왜채(倭債)가 발생하였다. 이 왜채를 노부세(路浮稅)라고 불렀다. 노부세는 당시 외교나 무역상의 중요한 현안이었다. 그래서 1653년 1월부터 왜채를 몰래 쓰는 자는 대소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1683년 계해약조에서는 노부세를 주고 받은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계해약조의 내용이 적힌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가 왜관 안팎에 세워졌다.주 525
각주 525)
長正統(1971), 「17세기 일본과의 교역·교역품에 관한 연구-밀무역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61집, 국사편찬위원회 ; 尹裕淑(1997), 「近世癸亥約條の運用實態について」 『조선학보』 164집,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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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당시 왜채 미상환액은 10여 만냥 정도였다. 일본측의 상환 독촉에도 불구하고, 상환비율은 2~3할 정도였다. 액수가 많은 10여 명의 명단이 조선측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1652년 당시의 동래부의 왜채 실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7 1652년 동래부 부채인의 왜채 실태
채무자원액상환액미상환액비고
박신(朴信)은 3,797냥3025770
한인상(韓仁祥)657743002276미상환액 350냥은 開城府人 韓承吉·金信立 등이 갚아야 할 것
김운(金雲)·
김기남(金起男)
38672887980980냥은 서울사람 林春得이 갚아야 할 것
문의룡(文義龍) 모두 상환
양의신(梁義信) 모두 상환
〈표 7〉을 보면 부채의 원금은 채무자별로 은 4,000~7,000냥 정도였다. 이들 동래부의 부채인은 서울이나 개성 사람들과 상호 연계 속에서 채무관계를 맺고 있었다.
〈표 7〉의 채무자 외에도, 잠상 임금(林金)은 안응성(安應星)과 결탁하여 수년 동안 왜관에서 밀무역을 하였다. 그가 대출한 왜은이 만 여냥이나 되었으며, 왜은을 상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밀무역이 적발되자 안응성은 경상(境上)에서 효수되고, 임금은 서울 당고개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된 장소로 보아 임금은 서울 거주, 안응성은 동래 거주인이라고 생각하다. 서울의 잠상이 동래 잠상과 결탁하여 은 밀무역을 한 사례이다.주 526
각주 526)
김동철(1993a), 259~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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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약 10만 평 규모의 초량왜관이 완성된 이후 조선과 일본의 사무역은 더욱 활발하였다. 1679년 네덜란드 상관장은 에도로 가는 도중에 오사카에서 쓰시마 사람들이 생사와 비단을 거래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예년과 같이 쓰시마주가 조선에서 가져온 중국 생사 14~15만근, 2만 7천 반(反)의 축면(縮緬)·윤자(綸子)·사릉(紗綾) 기타 견직물을 며칠 전에 오사카로 보내왔다. 난징[南京]·광둥·푸저우[福州]에서 만들어진 것과 길이가 다른 물건인데, 오늘 공매에 넘겨졌다. 그 가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중국산 생사와 비단이 동래 왜관 → 쓰시마 → 오사카 → 교토로 이동하였다.주 527
각주 527)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왜관』, 서울 : 논형,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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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에 쇼바이가카리[商賣掛]라는 종래의 다이칸[代官]과는 별도로 사무역 업무를 전담하는 관리가 쓰시마 안에 조직되었다. 이들은 곧 모토가타야쿠[元方役]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들의 주업무는 수출입품의 출납과 무역장부를 관리하는 일이다. 이들의 활동은 1684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이 작성한 사무역 장부의 내용을 통해 1684년의 사무역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수입품은 광산물[은, 구리, 납, 유석, 토단 등], 가죽류[여우, 삵괭이 등], 동남아시아산 물품[단목, 후추, 사탕류], 황련, 담배, 담뱃재, 과자, 바구니, 상아로 만든 바늘, 안경 등이다. 수출품은 백사, 비단, 인삼 등이다. 이 가운데 백사가 3만근 정도로 수출품의 50%, 축면·사릉·윤자 등 비단이 26%를 차지했다. 즉 중국산 물품이 80% 정도였다. 나머지 20% 정도가 조선산 인삼이다. 수입품은 정은 66%, 기타 은 6%, 구리 9%, 납 8%, 유석(鍮鉐) 2%, 여우 가죽 3%, 삵괭이 2% 등이다. 정은 단일 품목만 66%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백사는 이듬해 1685년에는 7만근 정도였다. 쓰시마번이 조선과의 사무역을 통해 거둔 이익은 1684년에는 은 1,065관 270돈이었다. 1690년에는 2,539관 190돈, 1691년에는 3,577관 400돈으로 점점 증가하였다.주 528
각주 528)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3~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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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 전개된 사무역의 수출입품은 백사와 비단, 인삼, 은의 3품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열린 사무역[개시무역]은 조선산의 인삼과 일본산 은의 직교역과, 중국산 백사·비단과 일본산 은의 중개무역이라는 2중 구조를 중심축으로 하면서 전개되었다.주 529
각주 529)
김동철(1998),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 21집, 민족문화추진회,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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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조선에 수출하는 길을 ‘은의 길(silver road)’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인삼의 길[조선]’ ‘비단의 길[중국]’ ‘은의 길[일본]’이 서로 맞물려 있었다.주 530
각주 530)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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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貞享 2) 일본은 나가사키 무역에서 무역량의 총액을 규정하는 조교레이[貞享令]를 실시하였다. 청 무역선은 은 6,000관, 네덜란드 무역선은 은 3,000관이었다. 이 무역상한제는 쓰시마에도 적용되어, 1686년 연간 1,080관으로 정해졌다. 처음에는 이 숫자가 무역총액을 의미하였으나, 언제부턴가 정은 자체를 의미하는 ‘현은(現銀)’이라는 틀로 바뀌었다.주 531
각주 531)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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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은 은 이외 다름 물품의 가격을 은으로 평가한 ‘대은(代銀)’과 구별되었다.주 532
각주 532)
정성일(2000),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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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숫자는 일본 바쿠후와 쓰시마가 정한 양자 사이의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동래 왜관의 무역 현장에서 지켜지는가는 별개 문제였다.주 533
각주 533)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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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8 1680~1710년대 조선에 대한 쓰시마번의 정은 수출량
168416851686168716881689169016911692
정은193820072887204424871995223127312437
비율66%6469596350474752
169316941695169616971698169917001701
정은227425792449244024051400198015652730
비율41%4647494053689864
170217031704170517061707170817091710
정은1807730135010781300972980940620
비율64%5970446763625848
〈표 8〉은 순은으로 환산한 것은 아니고, 수출은 자체의 양만 표시한 것이다. 비율은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은의 비율이다. 은이 최소 40%이상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표의 수출액처럼, 은 1,080관의 무역한도액은 지켜지지 않았다. 1684~1697년에는 순도 80%의 정은인 게이초은이 연간 2,000관 이상 조선에 수출되었다.
한편 일본은 169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겐로쿠은을 주조하였다. 이 은은 형태와 양식은 게이초은과 동일하지만, 순도가 64%로 낮았다. 게이초은에서 겐로쿠은으로 바뀐 지 2년이 지나도록 쓰시마 번은 이 사실을 조선에 알리지 않았다. 순도가 낮은 겐로쿠은의 수출이 조선, 중국 등 동아시아 무역시장을 교란시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주 534
각주 534)
정성일(2011),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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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서 보는 것처럼, 1697년에는 고은(古銀, 게이초은)과 신은(新銀, 겐로쿠은)이 통용되었다가, 1698년부터는 겐로쿠은이 수출되었다.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순도가 낮은 겐로쿠은을 통용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대신 백사와 비단의 수출가격을 27%씩 인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사무역 시장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은화의 개주는 일본측의 백사 등의 수입가격 상승을 가져와 쓰시마번의 수입이윤 감소로 이어졌다. 1700년 이후 전반적으로 수출량이 감소하였다. 쓰시마번 수출총액에서 은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므로, 수출은의 변화는 쓰시마번의 무역총액이나 이윤총액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겐로쿠은의 통용 이후 쓰시마번의 무역규모는 크게 위축되고, 무역이윤도 감소하였다주 535
각주 535)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1쪽 ; 정성일(2000), 196~198쪽 ; 정성일(2011), 18~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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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의 중국산 백사·견직물과 일본산 은의 중개무역
조선 국내에 유통되는 은화의 주요 보급원은 국내 광산에서 개발된 광은(鑛銀)과 수입된 일본은이었다. 1678년 상평통보가 주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때 마련된 주전응행절목(鑄錢應行節目), 행전절목(行錢節目)을 보면, 동전 400문을 은1냥, 40문을 1돈[錢], 4문을 1푼[分]으로 규정하였다.주 536
각주 536)
『비변사등록』, 숙종 4년(1678) 윤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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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가 가치척도로서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동전을 기준으로 가치를 결정함으로써, 은화를 유통경제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동전보다 은화를 선호하여 은귀전천(銀貴錢賤) 현상이 일어났다.주 537
각주 537)
성백용(1996), 「17~18세기 전반 동전유통구조의 성립과 錢荒」,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2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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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남 윤씨가의 전답매매문서를 보면, 16세기부터 1681년까지는 목면으로 전답이 매매되었으며, 1682년부터는 정조(正租), 1697년에는 은자(銀子)가 나타났다. 그리고 1701년 처음으로 동전이 나타나고, 1707년 이후는 모두 동전으로 거래되었다.주 538
각주 538)
이재수(2000), 「17세기 전답매매의 실태」 『역사교육논집』, 26, 541~5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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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매매문서 속의 은화의 위상은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조선전제고(朝鮮田制考)』에 수록된 문서를 보면, 서울 훈도방 수표교 아래 공터는 1602, 1604년은 목면, 1624, 1642, 1685, 1725년에는 은화로 거래되었다. 동대문 밖 채소밭은 1673~1714년은 은화, 1731년은 동전으로 거래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공물문서를 보며, 공물 납부권은 은으로 거래되는 것이 특지이다. 19세기에 동전으로 매매되기도 했지만, 은화로 매매되는 관행은 계속되었다. 한편 경기도 지역은 전답은 1660~1670년대에는 은화로 많이 거래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주 539
각주 539)
이헌창(2006), 「금속 화폐 시대의 돈」, 국사편찬위원회 편,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서울 : 두산동아, 6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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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은 빠른 속도로 국내 유통경제에서 가치척도로서의 규정력을 장악하여 갔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공인권 매매 등 다양한 거래에서 정은이 결제수단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수입된 정은은 국내에서도 통용되지만,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중국으로 수출된 일본은은 중국산 생사·비단과 교환되었다. 청과의 무역은 매년 조선 사절단이 베이징을 오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사행무역이 핵심이다. 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이다.
사행은 정기사행과 임시사행으로 구분된다. 정기사행은 정례화된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과 황력재자행(皇曆齎咨行)으로, 삼절연공행은 삼절행과 연공행을 합한 것이다. 삼절행은 동지행, 신년 하례하는 정조행(正朝行),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행(聖節行), 연공행은 세폐(歲幣)를 내는 사행이다. 삼절행과 연공행이 통합된 것은 베이징 천도 다음해인 1645년이다. 삼절연공행은 통상 동지행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력재자행은 황력행, 역행, 역자행이라고도 부른다.주 540
각주 540)
이철성(2004), 「조선시대의 무역」, 최광식 외편, 『한국무역의 역사』, 서울 :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409~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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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에는 사행원 정관(正官) 30명에게 사행경비 몫으로 1인당 인삼 80근을 지급하였다. 이 인삼 80근을 10근씩 나누어 포자하였다. 이것을 ‘팔포(八包)’라고 부른다. 1662년에는 인삼 1근을 은 25냥으로 환산하여 은 2,000냥을 팔포정액으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당상관과 상통사는 1,000냥을 더하여 은 3,000냥을 팔포정액으로 규정하였다.주 541
각주 541)
유승주(1997), 「청과의 무역」 『한국사』 33, 국사편찬위원회, 442~443쪽 ; 김정미(1996),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와 무역수세제의 시행」 『한국사론』 36, 158쪽 ; 이철성(2004), 418~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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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은 공인된 30명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지행의 경우는 35명에 달하였다. 정관의 경우 이 은을 무역자금으로 활용하여 중국 물품을 수입하였다. 이것을 팔포무역이라 부르다. 팔포무역은 주체에 따라 성격이 달랐다. 삼사나 군관은 사행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었으며 사치품이나 서적 등의 구입에 주력하였다. 이들의 무역은 예우에 불과하며 영리성을 띤 상업적 의의를 갖지 못하였다. 사자관·의원·화원의 무역은 간헐적이며 미미한 활동이었다. 따라서 팔포무역은 역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역관은 팔포 외에 각 관청의 별포(別包)무역도 담당하였다.주 542
각주 542)
유승주(1970),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17·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활동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8, 백산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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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역관들이 주로 수입한 물건은 백사와 백색단(白色緞)·삼승방사주(三升方絲紬)·금단(錦緞)·사단(紗緞) 등 비단이 중심이었다.주 543
각주 543)
이철성(2004), 419~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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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래 왜관을 통해 수입된 일본은은 사행에 따라 중국으로 매년 2회 이동하였다. 역자행은 8월에 한성을 출발하여, 베이징에 체재한 후 11월에 귀국하였다. 동지행은 11월에 한성을 출발하여, 신년하례 등 의례를 마치고, 다음해 4월에 귀국하였다. 역자행이 가지고 가는 은을 황력은, 동지행이 가지고 가는 은을 동지은이라고 불렀다.
쓰시마는 동래 왜관으로 은을 수송하기 위하여 은선(銀船)이라 불리는 전용선을 사용하였다. 이 은선의 활동은 달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7~8월, 10~11월의 4개월 간 연간 수송량의 60% 이상을 수송하였다. 일본은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의 시기별 이동 경로
은 명칭교토 → 쓰시마쓰시마 → 왜관(조선)조선 → 중국
황력은6월 중7~8월8월 이후
동지은8월 중10~11월11월 이후
쓰시마번의 교토 번저(藩邸)를 담당하는 다이칸은 1681년 쓰시마로부터 인삼 대금과 불시 사자(使者)가 사용할 은 1,000관은 2월, 황력은 700관은 6월, 동지은 1,500관은 8월중에 쓰시마 본섬에 도착할 것을 지시 받았다.주 544
각주 544)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3~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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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선의 중개무역을 통해 생산지 일본에서 소비지 중국으로 가는 은의 흐름은 조선의 사행 파견시기와 연동되어 있었다.
조선사절단이 베이징에서 교역하는 방법은 숙소인 조선관 관내 교역, 성내 개시장 교역, 특정상인과의 교역의 세 유형이다. 세 유형 중 가장 중심적인 것은 특정상인과의 거래이다. 청의 무역상인은 오상(烏商), 유상(劉商), 우상(于商), 진상(陳商), 항상(項商), 황상(黃商), 정상(鄭商) 등이 유명하였다.주 545
각주 545)
烟地正憲(1981), 「淸朝と李氏朝鮮との朝貢貿易について-特に鄭商の盛衰をめぐって-」 『東洋學報』 62권 3·4호, 東洋文庫, 80~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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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은 방균점(邦均店) 주인이다. 오상은 회동관(會同館) 조선통사인 오림보(烏林哺)의 동생이다. 그는 조선어에 능통했으며, 문구류·침향·보완(寶玩) 등 물건을 판매하였다. 유상은 약재를 판매하였다. 우상은 팔기 한군(漢軍)이다. 왕상(王商)은 통역관 서종현(徐宗顯)의 친척이었다. 진상은 산시[山西]인으로 조선어에 능통한 천주교 신자였다. 이들 상인은 대부분 기인(旗人)이거나 회동관의 조선어 역관과 관계가 있었다.주 546
각주 546)
張存武 지음·김택중 외 옮김(2001), 『근대한중무역사』, 서울 : 교문사, 132~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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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무역상인은 정사이다. ‘상호정세태가(商胡鄭世泰家), 상고정세태지가(商賈鄭世泰之家), 상인정세태’주 547
각주 547)
『勅使謄錄』,영조 2년(1726) 10월 11일 ; 5년 7월 4일 : 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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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한 것처럼, 정상은 정세태를 가리킨다. 그의 점포는 옥하교(玉河橋)의 대로 남변에 있었는데, 규모가 커서 궁전과 같다고 하였다. 그가 파는 무역품은 문단(紋緞)으로 대표되는 비단과 견사였다. 1712년 연행사로 갔던 김창업(金昌業)은 “정세태는 북경상인의 우두머리다. 우리나라가 구입하는 비단은 모두 정세태에게서 나온다. 값이 은 10만냥 이상이다.”주 548
각주 548)
金昌業, 『稼齋說叢』, 연행록, 왕래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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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정세태로 대표되는 정상의 성쇠는 조선과의 무역에, 그리고 일본-조선과의 무역은 중국과의 무역에 연동되어 있었다.주 549
각주 549)
烟地正憲(1981), 85~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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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이 귀국한 지 2~4개울이면, 백사와 비단은 왜관으로 운반되었다. 이 물품은 쓰시마를 거쳐 다시 일본 최대의 비단 산업지대인 교토로 들어왔다. 교토 니시진[西陣]에서 짜는 고급 비단의 원료는 중국산 백사였다. 교토는 은 길의 출발지인 동시에 비단 길의 종착지였다.주 550
각주 550)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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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은과 중국의 생사와 비단은 동래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이루어진 사무역을 통해 환류하고 있었다. 조선은 세계 최대의 은 수요자인 중국과 세계 제 2위의 은 공급자인 일본 사이에서 은 흐름의 중개인 역할을 담당하였다.주 551
각주 551)
주경철(2008),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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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519)
    한명기(1992), 「17세기초 銀의 유통과 그 영향」 『규장각』, 15, 서울대 규장각, 2~32쪽. 바로가기
  • 각주 520)
    정성일(2004), 242쪽. 바로가기
  • 각주 521)
    정성일(1997), 「일본과의 무역」 『한국사』33, 국사편찬위원회, 461쪽. 바로가기
  • 각주 522)
    田代和生(1981),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東京 : 創文社, 58~64쪽. 바로가기
  • 각주 523)
    한명기(1992), 32~33쪽. 바로가기
  • 각주 524)
    『변례집요』 권14, 潜商路浮税并錄, 임자(1612) 6월. 바로가기
  • 각주 525)
    長正統(1971), 「17세기 일본과의 교역·교역품에 관한 연구-밀무역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61집, 국사편찬위원회 ; 尹裕淑(1997), 「近世癸亥約條の運用實態について」 『조선학보』 164집, 87쪽. 바로가기
  • 각주 526)
    김동철(1993a), 259~260쪽. 바로가기
  • 각주 527)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왜관』, 서울 : 논형, 135쪽. 바로가기
  • 각주 528)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3~126쪽. 바로가기
  • 각주 529)
    김동철(1998),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 21집, 민족문화추진회, 62쪽. 바로가기
  • 각주 530)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5쪽. 바로가기
  • 각주 531)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8쪽. 바로가기
  • 각주 532)
    정성일(2000), 336쪽. 바로가기
  • 각주 533)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28쪽. 바로가기
  • 각주 534)
    정성일(2011), 4쪽. 바로가기
  • 각주 535)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1쪽 ; 정성일(2000), 196~198쪽 ; 정성일(2011), 18~20쪽. 바로가기
  • 각주 536)
    『비변사등록』, 숙종 4년(1678) 윤3월 24일. 바로가기
  • 각주 537)
    성백용(1996), 「17~18세기 전반 동전유통구조의 성립과 錢荒」,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24~31쪽. 바로가기
  • 각주 538)
    이재수(2000), 「17세기 전답매매의 실태」 『역사교육논집』, 26, 541~542쪽. 바로가기
  • 각주 539)
    이헌창(2006), 「금속 화폐 시대의 돈」, 국사편찬위원회 편, 『화폐와 경제 활동의 이중주』, 서울 : 두산동아, 63~64쪽. 바로가기
  • 각주 540)
    이철성(2004), 「조선시대의 무역」, 최광식 외편, 『한국무역의 역사』, 서울 :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409~417쪽. 바로가기
  • 각주 541)
    유승주(1997), 「청과의 무역」 『한국사』 33, 국사편찬위원회, 442~443쪽 ; 김정미(1996),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와 무역수세제의 시행」 『한국사론』 36, 158쪽 ; 이철성(2004), 418~419쪽. 바로가기
  • 각주 542)
    유승주(1970), 「조선후기 대청무역의 전개과정-17·8세기 부연역관의 무역활동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8, 백산학회. 바로가기
  • 각주 543)
    이철성(2004), 419~420쪽. 바로가기
  • 각주 544)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3~135쪽. 바로가기
  • 각주 545)
    烟地正憲(1981), 「淸朝と李氏朝鮮との朝貢貿易について-特に鄭商の盛衰をめぐって-」 『東洋學報』 62권 3·4호, 東洋文庫, 80~83쪽. 바로가기
  • 각주 546)
    張存武 지음·김택중 외 옮김(2001), 『근대한중무역사』, 서울 : 교문사, 132~134쪽. 바로가기
  • 각주 547)
    『勅使謄錄』,영조 2년(1726) 10월 11일 ; 5년 7월 4일 : 6년 6월 24일. 바로가기
  • 각주 548)
    金昌業, 『稼齋說叢』, 연행록, 왕래총록. 바로가기
  • 각주 549)
    烟地正憲(1981), 85~100쪽. 바로가기
  • 각주 550)
    다시로 가즈이 지음·정성일 옮김(2005), 135쪽. 바로가기
  • 각주 551)
    주경철(2008), 269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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