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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의 사무역 중심 교역망

1. 일본-중국의 사무역 중심 교역망

1547년 일본에서 명으로 간 마지막 조공무역선을 끝으로 명과 일본 사이의 조공무역은 단절되었다. 일본이 명의 책봉체제에서 이탈하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교역 방식이나 루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양국 사이의 교역이 침체된 것은 아니다.주 496
각주 496)
조영헌(2009),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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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7세기에 들어와 양국 사이의 교역을 매개하는 은의 성격은 바뀌었다.
1) ‘정은’의 탄생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關ヶ原]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정치세력의 변화는 일본 화폐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1601년에 전국 유통을 목적으로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였다. 이 금화, 은화는 일본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慶長]금, 게이초은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일본에서는 전국적인 화폐 통일이 시작되었다. 게이초은에는 정은(丁銀)과 마메이타[豆板]은이 있었다. 정은은 해삼처럼 생긴 타원형이고, 마메이타은은 작은 구슬 모양이어서 고타마은이라고 불렀다. 게이초은은 은 80%, 구리 20%로 만든 양질의 은화이다. 이들은 무게로 거래하는 칭량(稱量)화폐였다. 정은은 주로고액, 마메이타은은 소액거래에 많이 사용되었다.주 497
각주 497)
瀧澤武雄 외편(2001), 『日本史小百科 貨幣』, 東京 : 東京堂出版, 265~266쪽 ; 鄭成一(2011), 「朝鮮과 日本의 銀 流通 交涉(1697~1711)」(한일관계사학회 132회 월례발표회 원고, 미공간),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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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에는 은 수출 자체에 초점을 맞춘 회취은 금수 조치가 이루어졌다. 순은에 가까운 회취은 대신에 순도 80%의 정은을 수출하여 은의 유출량을 다소라도 줄인다는 의도로 시행되었다.주 498
각주 498)
윤병남(2007), 『구리와 사무라이』, 서울 : 소나무,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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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601년부터 1708년까지 100여년 동안 은화 90만관이 해외로 유출되었는데, 이것은 은화 주조량의 3/4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주 499
각주 499)
東野治之(1997),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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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치에는 회취은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류는 정은이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정은은 동아시아 무역거래에서 달러(dollar)같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동아시아 교역망에서 16세기가 ‘회취은의 시대’였다면, 17세기 이후는 ‘정은의 시대’였다.
그림 2 정은과 마메이타은
2) 일본-동남아시아-중국 교역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상(豪商)의 해외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선박에 허가증은 슈인조[朱印狀]를 발급하였다. 특정상인에게 해외와 교역하는 특권을 주었다. 이 슈인조를 받은 선박을 슈인센[朱印船]이라고 불렀다. 슈인센이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이다. 1604~1635년의 32년간 슈인센은 적어도 356척이었다.주 500
각주 500)
岩生成一(1985), 127쪽 〈표 2〉의 합계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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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평균 11척이었다. 명은 슈인센의 입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슈인센의 주요 도항지는 중국 남부 연해에서 적도 북쪽까지 중요 항구의 대부분이었다.주 501
각주 501)
任鴻章(1988), 45~46쪽 ; 上田信(2005),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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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슈인센[朱印船]의 주요 도항지 및 선박수
하노이
[東京]
자오즈
[交趾]
캄보디아
[柬埔寨]
샴[暹邏]루손
[呂宋]
타이완
[高砂]
1604-1611322436341138
1617-352639220202035160
합계377144565436298
〈표 2〉에서 보듯이 그 중에서 베트남의 하노이와 자오즈, 캄보디아, 샴, 루손, 타이완 등이 중심지였다. 전체 356척 가운데 이 6개 지역에 298척이 도항하여, 전체의 83.7%를 차지한다. 슈인센의 수입품은 생사, 녹피, 교피(鮫皮, 말린상어 가죽), 비단, 면직물, 연(鉛), 소목, 침향(沈香, 香木), 사탕[砂糖] 등이다. 1위는 생사였다. 슈인센의 동남아시아로 도항하는 중국선으로부터 대량의 생사를 구입하였다. 그 양은 연 평균 14~15만근으로, 일본이 매년 수입하는 생사총액의 5~6할 정도였다. 수출품의 1위는 은이다. 그 다음은 동, 동전, 동제품이다. 유황, 철, 장뇌, 쌀, 맥분, 칼, 부채 등이다.주 502
각주 502)
任鴻章(1988), 45~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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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를 거점으로 이루어진 양국 사이의 무역은 일본과 아메리카의 은을 중국으로, 중국의 비단, 생사, 약재를 일본으로 수송하는 방식이었다.주 503
각주 503)
조영헌(2009),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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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본 무역선이 중국에 직항한 것은 아니지만, 도쿠가와 정권은 슈인조를 매개로 일본과 중국과의 사이의 간접적인 교역을 관리하였다.주 504
각주 504)
上田信(2005),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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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사키를 통한 일본-네덜란드, 일본-중국 무역
일본은 통화체제 정비에 따라 국내경제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은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은화 주조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1609년에는 회취은을 수출 금지품으로 지정하였다. 일본은 그리스트교의 금지와 보조를 같이 하면서, 일본인의 해외도항이나 무역을 제한하는 통제정책을 강화하였다. 1616년에는 스페인선의 내항을 금지하였다.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하여, 1623년 히라도상관을 폐쇄하였다.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도항을 전면 금지하였다. 그리고 1639년에는 포르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하였다.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부상한 것이 네덜란드이다. 그러나 1641년에는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로 옮기면서, 나가사키부교[長崎奉行]의 엄격한 감시 아래에 두었다. 중국과의 정식 부교 회복을 단념한 바쿠후[幕府]는 중국선과의 사무역을 나가사키에 한정하고, 그 밖의 장소에서 무역하는 것을 밀무역으로 간주하였다. 나가사키에 내항하는 무역선은 네덜란드선과 중국선뿐이었다. 바쿠후는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무역을 통제하는 관리시스템을 마련하였던 것이다.주 505
각주 505)
五味文彦 외(2001), 245~246쪽 ; 上田信(2005), 298~299쪽 ; 小葉田淳(1996), 「近世, 銀·金の海外流出と銅貿易の動向」 『日本の鑛山文化』, 東京 : 국립과학박물관,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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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반에 나가사키에 간 중국상선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3 17세기 전반 나가사키에 간 중국 상선
시기선박수시기선박수시기선박수
1611년70척16324164334
161230163436164454
161320163540164576
161460~70163764164631
162336163993164820
162438164074164959
162560164197165070
163160164249
〈표 3〉에서 보는 것처럼 매년 상당수의 중국상선이 나가사키를 내왕하였다. 특히 1639~1641년에는 매년 70~90척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과 중국의 무역은 민간 자유무역인 사무역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양국 정부의 간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힘을 배경으로 한 무역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주 506
각주 506)
任鴻章(1988),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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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은 1633년에는 은 25만근, 1634년에는 은 16만근을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나가사키를 통한 수입품의 중심은 중국산 생사였다.주 507
각주 507)
山脇悌二郞(1964), 『長崎の唐人貿易』, 東京 : 吉川弘文館, 6~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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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수입생사 가격의 하락을 통해 은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1604년에 이토왓푸[糸割符]제도를 실시하였다. 이토왓푸는 수입 생사를 전매하는 특권을 보장해주는 증명서이다. 특정한 상인이 모여서 이토왓푸 나카나[仲間]를 만들고, 매년 봄 수입생사 가격을 결정하여 일괄 구입한 후, 나카마에게 분배하였다. 처음에는 교토, 사카이, 나가사키상인들이 나카마를 구성하였지만, 뒤에 에도[江戶], 오사카상인이 추가되었다. 이 제도는 1631년에는 중국인에게, 1641년에는 네덜란드인에게 적용되었다.주 508
각주 508)
山脇悌二郞(1964), 6~12쪽 ; 五味文彦 외(2001),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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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쟈카르타에 있던 동인도회사의 출장소로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상관을 두었다. 네덜란드선은 생사나 모직물·견직물·면직물 등의 직물류, 약품, 시계, 서적 등을 가져왔다. 일본이 수출한 것은 초기에는 은과 구리, 중기 이후에는 이마리[伊万里] 도자기나 사쓰마[薩摩]의 장뇌(樟腦)가 중심이었다. 바쿠후의 무역통제정책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독점적인 무역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선은 생사, 비단, 서적 외에, 유럽의 면직물, 모직물, 동남아시아의 사탕, 소목, 향목 등을 가져왔다.주 509
각주 509)
五味文彦 외(2001),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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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선에 의해 유출된 일본은은 타이완을 경유하여 인도의 콜로만딜연안, 벵갈, 구쟈라토지방 등으로 운반되었다. 1637~1647년의 4년간에는 연평균 5만 7천㎏, 수출은 총액은 29만㎏에 달하였다. 중국선에 의한 은 유출이 증가하여, 최전성기인 1661년에는 6만 8천㎏이나 될 정도였다.주 510
각주 510)
水本邦彦(2008),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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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나가사키 무역을 장악한 중국인은 정즈롱[鄭芝龍]과 정청공[鄭成功] 부자였다. 이들은 정진[鄭經], 정크어상[鄭克塽]까지 4대에 걸쳐 활동한 무장해상집단이었다. 정청공은 오상(五商), 십소(十所)라는 수출을 전담하는 대외무역 기구를 만들었다. 오상은 산오상(山五商), 해오상(海五商)으로 나누었다. 산오상은 금목수화토의 오행으로, 항저우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수출품을 구입하였다. 해오상은 인의예지신의 오행으로, 샤먼[廈門]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수출품의 운수사무를 담당하였다.주 511
각주 511)
大庭脩(1980), 『江戶時代の日中秘話』, 東京 : 東方書店, 30쪽 ; 任鴻章(1988),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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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입항한 중국선 가운데 정씨집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4 나가사키에 입항한 중국선에서 정씨집단 상선의 비율
164116661670167516761678
중국선 총수973536292426
정씨집단 상선1311189107
비율(%)133150314227
〈표 4〉에서 보듯이, 1660~70년대에는 나가사키에 입항한 전체 중국선 가운데 30~50%의 선박이 정씨집단의 상선이었다. 이들은 생사 외에 사탕, 녹피, 약종 등 주로 중국과 타이완 산물,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물 등을 취급하였다.주 512
각주 512)
任鴻章(1988), 95~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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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의 ‘전해령’과 일본의 시호
청은 정청공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1656년에 해금령(海禁令)을 발포하여, 연해지역의 상선이 정청공측에 식량이나 물화를 파는 것을 금지시켰다. 1661년에는 푸젠을 중심으로 광둥-산둥[山東]에 걸쳐 해안선에서 약30리(15㎞) 이내의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천계령(遷界令), 천해령(遷海令)을 강행하였다. 연해지역을 무인화시키는 이 천계령, 천해령은 정청공 세력을 본토에서 분리시켜 해상에 고립시켰다. 정청공은 샤먼에서 철거하여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겼다. 천계령으로 중국에서 직접 생사를 조달할 수 없는 정청공은 마닐라를 경유하여 입수하였다. 청은 타이완 평정의 전망이 보이자. 1681년에 천계령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상선이 바다로 나가는 것은 여전히 금하였다. 1683년 정크어상의 항복으로 타이완의 정씨정권이 부괴된 다음해인 1684년에 전계령(展界令), 전해령(展海令)을 발포하였다. 이로써 중국 민간인의 해외무역이 합법적으로 허락되었다.주 513
각주 513)
上田信(2005), 303~304쪽 ; 원정식(2003), 「淸初 福建社會와 遷界令 實施」 『동양사학연구』, 81집, 동양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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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은의 대량 유출을 막기 위해 1604년부터 실시해 온 이토왓푸제를 1655년 폐지하였다. 네덜란드선이 싣고 온 중국 생사 수입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면 백사 수입량이 증가하여 국내 생사량의 절대 부족을 완화시킬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백사 수입량이 증가하면, 생사 원가가 내려갈 것으로 보았다. 즉 바쿠후는 국내 생사가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폐지한 것이다.주 514
각주 514)
山脇悌二郞(1964), 20~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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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다시 일본은의 유출을 증가시켰다. 그래서 무역통제책을 다시 실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1668년경부터 꽤 구체적으로 나타나, 1672년에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 시호바이바이[市法賣買]가 그것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수입품 가격 결정에서 외국상인의 참여를 배제하고, 나가사키부교의 감독을 받는 시호카이쇼[市法會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주 515
각주 515)
윤병남(2007),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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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수입품 원가와 무역고를 억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네덜란드선과 중국선이 금은을 가지고 가는 것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다. 네덜란드선과 중국선의 교역 은량을 직접 고정하여 무역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1684년에 실시된 조교레이[貞享令]에서 이루어졌다.주 516
각주 516)
山脇悌二郞(1964), 36~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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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표는 천해령 공포 이전과 이후, 그리고 시호 실시 이후에 나가사키에 내항한 중국선을 비교한 것이다.
표 5 중국 천해령과 일본 시호[市法] 시기 중국선의 나가사키 내항
시기내항 중국선 총수연 평균 선박수비고
1655~166134048.5천해령 이전
1662~167241337.5천해령 이후
1673~168429824.8시호 시기
〈표 5〉에서 보는 것처럼, 1673년부터, 내항한 중국선의 수가 명백하게 줄었다. 시호 실시가 중국선에 준 영향은 청의 천해령보다 심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시호는 일종의 무역보호주의 조치였다.주 517
각주 517)
任鴻章(1988),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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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내항하는 중국선의 선박수가 감소함에 따라, 일본의 은 유출량도 감소하였다. 1660~1671년의 12년간 중국선에 유출된 일본은의 양은 10만 5,818관 정도이고, 1673~1684년의 12년간의 은의 양은 7만 1,424관 정도였다. 시법 실시의 두 가지 목표 중 하나인 생사 수입원가의 압축은 확실하지 않지만, 또 다른 목표인 금은 유출의 감소는 틀림없었다. 시호 시행의 결과 두 가지 목표 중 하나는 확실히 나타났다.주 518
각주 518)
山脇悌二郞(1964), 4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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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6)
    조영헌(2009), 186~187쪽. 바로가기
  • 각주 497)
    瀧澤武雄 외편(2001), 『日本史小百科 貨幣』, 東京 : 東京堂出版, 265~266쪽 ; 鄭成一(2011), 「朝鮮과 日本의 銀 流通 交涉(1697~1711)」(한일관계사학회 132회 월례발표회 원고, 미공간), 2쪽. 바로가기
  • 각주 498)
    윤병남(2007), 『구리와 사무라이』, 서울 : 소나무, 156쪽. 바로가기
  • 각주 499)
    東野治之(1997), 168쪽. 바로가기
  • 각주 500)
    岩生成一(1985), 127쪽 〈표 2〉의 합계 수치이다. 바로가기
  • 각주 501)
    任鴻章(1988), 45~46쪽 ; 上田信(2005), 294쪽. 바로가기
  • 각주 502)
    任鴻章(1988), 45~48쪽. 바로가기
  • 각주 503)
    조영헌(2009), 186~187쪽. 바로가기
  • 각주 504)
    上田信(2005), 294쪽. 바로가기
  • 각주 505)
    五味文彦 외(2001), 245~246쪽 ; 上田信(2005), 298~299쪽 ; 小葉田淳(1996), 「近世, 銀·金の海外流出と銅貿易の動向」 『日本の鑛山文化』, 東京 : 국립과학박물관, 132쪽. 바로가기
  • 각주 506)
    任鴻章(1988), 2쪽. 바로가기
  • 각주 507)
    山脇悌二郞(1964), 『長崎の唐人貿易』, 東京 : 吉川弘文館, 6~12쪽. 바로가기
  • 각주 508)
    山脇悌二郞(1964), 6~12쪽 ; 五味文彦 외(2001), 244쪽. 바로가기
  • 각주 509)
    五味文彦 외(2001), 246~247쪽. 바로가기
  • 각주 510)
    水本邦彦(2008), 287쪽. 바로가기
  • 각주 511)
    大庭脩(1980), 『江戶時代の日中秘話』, 東京 : 東方書店, 30쪽 ; 任鴻章(1988), 100~101쪽. 바로가기
  • 각주 512)
    任鴻章(1988), 95~112쪽. 바로가기
  • 각주 513)
    上田信(2005), 303~304쪽 ; 원정식(2003), 「淸初 福建社會와 遷界令 實施」 『동양사학연구』, 81집, 동양사학회. 바로가기
  • 각주 514)
    山脇悌二郞(1964), 20~28쪽. 바로가기
  • 각주 515)
    윤병남(2007), 171~172쪽. 바로가기
  • 각주 516)
    山脇悌二郞(1964), 36~43쪽. 바로가기
  • 각주 517)
    任鴻章(1988), 118~119쪽. 바로가기
  • 각주 518)
    山脇悌二郞(1964), 43~44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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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의 사무역 중심 교역망 자료번호 : edeah.d_0004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