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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포르투갈-중국의 은 교역망

1. 일본-포르투갈-중국의 은 교역망

1) 명의 조세 은납화
명에서는 15세기 중반 이후 점차 세량(稅糧)과 요역에서 은납화가 전개되었다. 요역 가운데 은납화가 먼저 전개된 것은 원격지에 가서 제방 등 국가적인 건설계획에 종사하는 잡역이었다. 이러한 요역은 은으로 환산하여 징수하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원격지로부터 강제적으로 모인 농민을 사역시키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16세기 전반에 잡역은 거의 대부분 은납화하였다. 세량은 15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은납화가 진행되었다. 환산된 은액은 금화은(金花銀)이라 불리었다.주 467
각주 467)
上田信(2005),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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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북쪽 변경을 침입하던 몽골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명은 15세기 후반부터 만리장성을 정비하고, 9개의 군관구(軍管區)를 두어 대량의 군대를 북방변경에 배치하였다. 명 초기에는 곡물 등 현물로 세를 거두는 현물주의 재정제도를 채택하였으나, 부피가 큰 곡물을 전쟁터로 운반하는 것이 곤란하므로, 차츰 운반하기 쉬운 은을 세로 거두어 북방에 운반한 후, 그곳에서 군수물자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이행하였다.주 468
각주 468)
岸本美緖(2001), 9~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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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이 되면, 대량의 일본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은납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세량과 요역은 각각 단계적으로 은납화가 진행되었으나, 이를 일괄 납부하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이 1565년 저장성에서 시행되면서, 1570년대가 되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명은 본격적인 은경제 시대를 열게 되었다.주 469
각주 469)
조영헌(2009),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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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명에서 은에 대한 수요가 점점 강해지고 있던 때에, 일본은의 산출이 급증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명으로 은의 흐름이 분출한 것이다.주 470
각주 470)
岸本美緖(2001), 9~13쪽 ; 上田信(2005),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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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일본 조공무역 종언과 민간상인 활동
은의 흐름은 명 초기부터 실시된 해금정책에 의해 저지되었고 있었다. 1550년대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기를 근절한 명은 방침을 전환하여, 1567년경에는 해금(海禁)을 완화하여 민간 해상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것은 여전히 금지하였다. 명이 해금을 푸는 정책으로 전환한 시기는 동아시아 은유통에서 하나의 획기가 되었다.주 471
각주 471)
岸本美緖(2001), 9~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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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일본 간에 이루어진 조공무명을 감합(勘合)무역이라 부른다. 감합무역은 닝보[寧波]에서 무역 허가증을 받았다. 감합무역에서 명의 수출품은 생사, 비단, 면사(綿絲), 사탕[砂糖], 도자기, 서적, 그림, 동전 등, 일본의 수출품은 금, 동, 유황, 칼, 부채, 칠기 등이었다. 감합무역을 담당하는 견명선(遣明船) 파견은 사카이[堺]상인의 후원을 받는 호소가와[細川]씨와, 하카다상인의 후원을 받는 오우치[大內]씨가 장악하고 있었다. 양자 사이에 무역쟁탈전이 1523년에 일어난 ‘닝보의 난’이다. 명은 닝보의 난 때문에 조공무역을 단절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하고, 일본에서 오는 선박을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조공에 수반한 교역도 심하게 제한하였다. 1547년 마지막 견명선을 끝으로, 명과 일본의 조공무역은 단절되었다.주 472
각주 472)
五味文彦 외(1998), 179~180쪽 ; 樂承輝(1995), 『寧波古代史綱』 : 寧波出版社, 306~309쪽 ; 陳尙勝, 『閉關與開放』, 濟南 : 山東人民出版社, 248~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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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간의 교역은 조공무역체제를 넘어, 민간이 무장한 해양상인(海洋商人)이 담당하게 되었다.주 473
각주 473)
上田信(2005),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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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대에 중국의 푸젠, 광둥[廣東], 저장 등 상선이 규슈 방면으로 내항하여 교역을 하려고 하였다. 이들 민간상선의 교역목적은 이제까지 일본 감합선이 수출하던 동, 유황, 칼 등의 구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은을 가져오는 데 있었다.주 474
각주 474)
湯淺赳男(1998), 『文明の「血液」』, 東京 : 新評論,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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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합무역의 종언은 중국-일본간 무역의 성격은 물론 무역품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이 등장하기 이전에 중국상인은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밀무역을 하였다. 중국무역상인은 동남아시아산 소목(蘇木), 후추[胡椒] 등을 수입하고, 중국산 도자기 등을 수출하였다. 중국 물산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서아시아, 유럽으로 운반되었다. 동남아시아와 밀무역을 하는 거점은 장저우[漳州] 동남쪽에 위치한 위에강[月港, 하이청[海澄]]이다.주 475
각주 475)
林仁川(1987), 『明末淸初私人海上貿易』, 上海 : 華東師範大學出版社, 142~153쪽 ; 晁中辰(2005), 『明代海禁與海外貿易』, 北京 : 人民出版社, 210~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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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강은 비단을 생산하고, 외국 물산을 소비하는 경제중심지 강남과 직결되지 않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때문에, 16세기에 위에강을 능가하여 급성장한 항구가 조우산[舟山]군도에 위치한 쑤왕위[双嶼]이다.주 476
각주 476)
上田信(2005),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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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포르투갈 상인이 쑤왕위를 거점으로 정하였다. 강남을 상권으로 하는 후이저우[徽州] 상인들도 이 항구를 왕래하였다. 1540년경부터 일본은이 본격적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강남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로에 위치한 쑤왕위는 명, 포르투갈, 일본 등 상인이 모이는 국제교역항의 양상을 보였다.주 477
각주 477)
林仁川(1987), 131~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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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왕위를 관리한 해양상인은 처음에는 ‘이광두(李光頭)’라고 불리는 푸젠상인 이칠(李七)이다. 강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신안[新安]상인의 세력이 신장하였다. 이칠 다음은 후이저우 출신의 허동(許棟, 許二)이었다. 허동 등은 신안상인과 상거래 관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일본 상인이 필요한 중국물산을 쉽게 입수할 수 있었다.주 478
각주 478)
上田信(2005), 202~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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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의 휘하에 있다가 해양상인의 대표자로 두각을 나타낸 상인이 왕직(王直)이다. 그는 은 산출국으로 급부상한 일본과의 교역 루트를 개척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1545년에 일본으로 도항하였다. 이 해에 스케자에몬[助才門]이라는 하카다 상인 등 3명이 그의 안내를 받으며 쑤왕위를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명-일본의 교역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1548년 관군이 쑤왕위를 토벌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양상인들은 명조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해양상인들은 왕직의 휘하에 집결하였다. 조우산과 대륙 사이에 있는 리에강[烈港]에 새 거점을 만들었다. 1553년에는 리에강을 다시 공격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왕직은 명조 관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일본 규슈의 히라도[平戶]와 고도[五島]에 거점을 정하였다. 히라도에 거점을 정한 후 포르투갈 상인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교역을 거의 독점하였다.주 479
각주 479)
上田信(2005), 203~206쪽 ;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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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르투갈 상인의 등장
16세기에 명조는 ‘북로남왜’라는 이중의 현안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남쪽의 왜구는 명의 해금정책이 만들어낸 대규모 밀무역 활동이다. 해양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무역이 활발하던 시기에, 이들의 유력한 경쟁 상대로 동아시아에 등장한 것이 포르투갈 상인이다.주 480
각주 480)
東野治之(1997), 139~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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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대두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광둥, 닝보, 장저우 등을 전전한 후, 1557년에 명으로부터 마카오 거주를 허가 받아서 중국연안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1570년경에는 일본에서도 크리스찬 다이묘[大名]인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의 영지 안에 나가사키항을 열어서, 나가사키-마카오를 연결하는 교역을 포르투갈이 장악하게 되었다.주 481
각주 481)
岸本美緖(200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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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상선은 인도 고아(Goa)에서 은화, 기름, 포도주를 가져와, 마카오에서 중국의 생사, 비단, 한방약재, 자기, 사탕으로 교환한 후, 일본에 가서 은으로 교환하였다. 귀항때 다시 그 은으로 마카오의 금이나 생필품 등을 구입하여 고아로 돌아왔다. 1580년 전후로 포르투갈은 1년에 대략 5천~6천관의 은을 일본에서 가져갔다. 일본과 명 간의 조공무역인 감합무역이 1547년 단절된 이후, 일본에 온 포르투갈 상인은 그 공백기를 메우면서, 일본의 은과 중국의 생사라는 동아시아 최대의 달러박스(dollar box)노선을 확보하면서 큰 이익을 거두었다. 일본의 은산출이 최고조이던 1600년 전후까지, 동아시아에서의 포르투갈 상인의 무역 황금기는 계속되었다.주 482
각주 482)
任鴻章(1988), 『近世日本と日中貿易』, 東京 : 六興出版. 26~27쪽 ; 岸本美緖(200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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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67)
    上田信(2005), 230쪽. 바로가기
  • 각주 468)
    岸本美緖(2001), 9~13쪽. 바로가기
  • 각주 469)
    조영헌(2009), 180쪽. 바로가기
  • 각주 470)
    岸本美緖(2001), 9~13쪽 ; 上田信(2005), 230~231쪽. 바로가기
  • 각주 471)
    岸本美緖(2001), 9~13쪽. 바로가기
  • 각주 472)
    五味文彦 외(1998), 179~180쪽 ; 樂承輝(1995), 『寧波古代史綱』 : 寧波出版社, 306~309쪽 ; 陳尙勝, 『閉關與開放』, 濟南 : 山東人民出版社, 248~259쪽. 바로가기
  • 각주 473)
    上田信(2005), 199쪽. 바로가기
  • 각주 474)
    湯淺赳男(1998), 『文明の「血液」』, 東京 : 新評論, 346쪽. 바로가기
  • 각주 475)
    林仁川(1987), 『明末淸初私人海上貿易』, 上海 : 華東師範大學出版社, 142~153쪽 ; 晁中辰(2005), 『明代海禁與海外貿易』, 北京 : 人民出版社, 210~214쪽. 바로가기
  • 각주 476)
    上田信(2005), 202쪽. 바로가기
  • 각주 477)
    林仁川(1987), 131~137쪽. 바로가기
  • 각주 478)
    上田信(2005), 202~204쪽. 바로가기
  • 각주 479)
    上田信(2005), 203~206쪽 ; 249~250쪽. 바로가기
  • 각주 480)
    東野治之(1997), 139~141쪽. 바로가기
  • 각주 481)
    岸本美緖(2001), 13쪽. 바로가기
  • 각주 482)
    任鴻章(1988), 『近世日本と日中貿易』, 東京 : 六興出版. 26~27쪽 ; 岸本美緖(2001), 13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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