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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문물의 교류

2. 문물의 교류

1) 일본의 조선 문물 약탈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초기부터 전투부대와는 별도로 6개의 특수 부대를 편성하여 조선의 문물을 조직적으로 약탈하였다. 그 부대의 명칭과 약탈대상은 다음과 같다.주 400
각주 400)
崔永禧(1978), 「일본의 침구」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324~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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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도서부(圖書部 : 典籍類) ② 공예부(工藝部 : 공예품 및 木工·陶工) ③ 포로부(捕虜部 : 민간인) ④ 금속부(金屬部 : 兵器·금속·공예품·금속활자) ⑤ 보물부(寶物部 : 金銀寶貨와 珍奇品) ⑥ 축부(畜部 : 가축)
이러한 약탈을 정부가 조직적으로 진행시켰다는 점에서 임진전쟁은 ‘문화약탈전쟁’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과 가축까지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왜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이렇게 인적·물적 자원을 약탈해감으로써 조선의 선진문화를 대량으로 흡수하였고, 전쟁 이후 에도시대의 문화 발전에 전기를 마련하였다. 임진전쟁을 통해 일본으로 전래된 조선의 문물 가운데 조선성리학, 금속활자와 전적(典籍), 도자기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주 401
각주 401)
전란 후의 인적 교류와 물적 교류에 관해서는 하우봉(2005), 「임란 직후 조선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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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조선성리학의 전수이다. 2차 침략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姜沆)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만나 성리학을 전수하였고, 세이카는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에게 전해주었다. 이후 도쿠가와막부의 다이가쿠노가미[太學頭]가 된 하야시 라잔에 의해 성리학은 막부의 교학으로 채택되어 지배적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강항이 세이카를 통해 막부의 성리학주자학 수용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며, 번(藩)의 차원에서 유학사사을 전한 조선 피로인들도 있었다. 이진영(李眞榮)과 전직(全直) 부자(父子), 홍호연(洪浩然), 이순(李順 : 高本紫溟)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기 기이번(紀伊藩)과 사가번[佐賀藩] 및 구마모토번[熊本藩]에서 조선성리학을 전파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둘째, 금속활자와 전적의 유출이다. 2차 침략 때 일본군총사령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경복궁의 교서관(校書館) 주자소(鑄字所)를 습격하여 조선의 금속활자 20만 자와 인쇄기구, 및 조선본과 중국본의 서적을 가져가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였다.주 402
각주 402)
秀吉은 1595년 이 典籍을 曲直瀨正琳에게 하사하였고, 그는 후일 養安院文庫를 설치하였다. (李俊杰(1986), 『朝鮮時代 日本과 書籍交流 硏究』, 弘益齋,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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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금속활자 외에도 조선의 목활자를 약탈해 갔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1593년에는 『고문효경(古文孝經)』을, 1596년에는 『몽구(蒙求)』를 간행하였다.
히데요시는 교토고잔[京都五山]의 승려들을 종군승(從軍僧)으로 파견해 조선의 서적과 한의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서적의 약탈은 개전 초기인 성주성 전투부터 시작해 전란 중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전란 후 도쿠가와막부를 비롯하여 출전한 다이묘들은 약탈한 조선의 전적들을 중심으로 문고(文庫)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보관하였다. 이러한 문고들은 오늘날 일본 도서관의 모체가 되었다.주 403
각주 403)
小野則秋(1973), 『日本圖書館史』, 玄文社,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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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대량의 활자와 서적의 유입에 의해 에도시대는 문화적 부흥이 일어났다. 에도시대 초기의 문화부흥은 물론 도쿠가와막부의 문치주의 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또 대중화에 성공한 바탕에는 조선의 금속활자와 서적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에 반해 대량약탈로 인해 조선은 전쟁 후 한동안 서적을 출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셋째, 임진전쟁을 통한 일본으로의 기술 전수에는 도자기 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일본에는 다도(茶道)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비롯한 다이묘들에게 보급되어 유행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고급 도자기의 수요가 늘어났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도자기는 일본에 비해 훨씬 발전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보배로 여겨졌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다도에 조예가 깊었던 장수들은 전란 중 앞다투어 도자기를 약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공(陶工)을 납치하였고, 심지어는 흙과 유약까지 가져갔다.
일본에 납치되어 온 도공들은 일정한 지역에 집단을 이루며 지방영주의 보호 하에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각 번에서는 그들이 재정에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지원을 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이삼평(李參平)이 세운 아리타요[有田窯]에서는 1644년 한 해에 45,000점의 도자기를 네덜란드에 수출하였다. 임진전쟁 이전까지 일본의 도자기술은 유치하였으나 조선 도공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에도시대 일본은 세계최고의 도자기 수출국가가 되었다. 이들의 후예들이 도예 명문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오늘날까지도 일본 도자기업계의 주요세력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 도쿠도미 소호[德富蘚峰]는 임진전쟁에 관해 “이 전쟁으로 인해 일본과 조선 양국이 이익을 얻은 것은 결코 없지만, 일본으로서는 문화상으로 활판인쇄의 수입, 공예상으로 도자기가 있고, 외교상으로는 명과의 접촉이라는 수익을 얻었다”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조선역(朝鮮役)은 사치스런 해외유학이었다.”라고 평하였다.주 404
각주 404)
德富蘚峰(1935), 「朝鮮役」 下卷, 『近世日本國民史』 9卷, 民友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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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적과 같이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대신 조선의 문물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다. 조선피로인들을 통해 전해진 조선성리학과 도자기 기술, 그리고 금속활자 및 서적의 대량 유입 등은 근세 일본사회의 형성과 문화부흥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가(史家)들은 이 전쟁에 대해 ‘문화전재’ 혹은 ‘도자기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래한 문물
임진전쟁으로 계기로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전래된 문물로서는 조총, 고추, 담배를 들 수 있다.
(1) 조총
임진전쟁 초기 조선군이 육전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일본군이 소지하였던 조총 때문이었다.주 405
각주 405)
일본에서는 원래 鐵砲라고 하였는데, 조선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능히 맞출 수 있다.’고 해서 조총이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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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은 15세기말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졌는데 1543년 9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1575년 나가시노[長篠]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조총은 일본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총은 조선군의 활에 비해 치사율은 물론 명중률이 5배나 되었으며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큰 효과를 보았다. 이에 따라 전란 중 이순신·김시민·김성일 등이 조총의 제작에 앞장섰다. 그들은 전리품으로 조총을 확보하였고, 항왜 가운데 조총제조 기술을 가진 자를 등용하였다. 그 결과 1593년 3월에 이르러 조총제조 기술을 익히게 되었으며, 각 지역에 보급하였다. 초기전투의 패배 이후에는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밀리지 않은 것은 이러한 조총의 제작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주 406
각주 406)
박재광(1999), 「전쟁도구」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국립진주박물관, 102~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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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조총의 제조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래서 1657년(효종 8)에는 청에서 다량의 조총을 사가겠다고 요청할 정도로 조선의 조총제조기술의 우수성이 인정받았다.
(2) 고추와 담배
이 전쟁을 통해 들어온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고추와 담배가 있다. 이것들은 조선인의 식생활과 기호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조선후기 경제사 및 생활사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추는 중부아메리카가 원산지인데 일본의 『초목육부경종법(草木六部耕種法)』에 의하면, 1542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한다. 이것이 언제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임진전쟁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되어 ‘왜겨자’라고 한다는 기사가 있다.주 407
각주 407)
卉木部 「木」 『芝峰類說』 권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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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기록에도 고추를 ‘남만초(南蠻草)’ 혹은 ‘왜초(倭草)’로 불렀음으로 보아 일본으로부터 온 것이 유력하다고 여겨진다. 고추는 조선후기 사회부터 한국인의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식품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후추를 밀어내었으며 특히 김치의 양념으로 사용됨에 이르러서는 한국인의 식성을 바꾸었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담배가 조선으로 전래된 시기에 관해서는 임진전쟁 때 일본으로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1614년에 저술된 『지봉유설』에 “담배를 남령초(南靈草)라고 하며 근래에 왜국으로부터 전해졌다.”주 408
각주 408)
食物部 「藥」 『지봉유설』 권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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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을 통해 들어온 담배를 ‘남초(南草)’ ‘왜초(倭草)’라고 하여 북경이나 서양인을 통해 도입된 ‘서초(西草)’와 구별하였는데, 시기적으로는 전자가 앞섰다. 담배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내수용뿐만 아니라 상업적 재배를 통한 중국에 대한 주요수출품이 되었다.
전란을 통해 조선은 전 분야에 걸쳐 참담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얻은 것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조총 제조기술, 그리고 고추와 담배의 전래 등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일정한 의의를 지니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 각주 400)
    崔永禧(1978), 「일본의 침구」 『한국사』 12, 국사편찬위원회, 324~325쪽. 바로가기
  • 각주 401)
    전란 후의 인적 교류와 물적 교류에 관해서는 하우봉(2005), 「임란 직후 조선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바로가기
  • 각주 402)
    秀吉은 1595년 이 典籍을 曲直瀨正琳에게 하사하였고, 그는 후일 養安院文庫를 설치하였다. (李俊杰(1986), 『朝鮮時代 日本과 書籍交流 硏究』, 弘益齋, 181쪽) 바로가기
  • 각주 403)
    小野則秋(1973), 『日本圖書館史』, 玄文社, 103쪽. 바로가기
  • 각주 404)
    德富蘚峰(1935), 「朝鮮役」 下卷, 『近世日本國民史』 9卷, 民友社. 바로가기
  • 각주 405)
    일본에서는 원래 鐵砲라고 하였는데, 조선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능히 맞출 수 있다.’고 해서 조총이라 불렀다. 한다. 바로가기
  • 각주 406)
    박재광(1999), 「전쟁도구」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국립진주박물관, 102~105쪽. 바로가기
  • 각주 407)
    卉木部 「木」 『芝峰類說』 권20. 바로가기
  • 각주 408)
    食物部 「藥」 『지봉유설』 권19.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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