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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사람의 이동

1. 사람의 이동

전쟁 중에 이동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는 피로인(被虜人)과 항왜(降倭)를 들 수 있다.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의 피로인과 1만여 명의 항왜 또한 전쟁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주 390
각주 390)
김문자(2005), 「임란시 항왜문제」 『임진왜란과 한일 관계』, 363~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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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로인
피로인이란 전란 중 일본군에 강제로 잡혀갔던 민간인 포로를 가리킨다. 피로인의 전체 규모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대체로 5만에서 10만 명으로 추산해 왔다. 현재 일본에서는 2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의 연구는 대부분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주 391
각주 391)
민덕기(2005), 「임진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395쪽 ; 이채연(1993), 『임진왜란 포로실기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원순(1985), 「임진왜란시의 조선부로노예 문제-왜란성격 일모」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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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피로인을 납치하는 목적은 ① 농촌노동력의 보충, ② 가사노예주 392
각주 392)
때문에 피로인 가운데 여자가 더 많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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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도공(陶工), 재봉녀(裁縫女), 공인(工人) 등 기술자 노예의 획득, ④ 노예 매매를 통한 이익 등이다. 조선피로인의 일본 내에서의 활동상을 보면, 유학자나 도공과 같이 일정한 대우를 받으며 재능을 발휘한 사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피로인들은 농업노예로 사역되었다.
피로인의 납치는 전쟁 초기부터 있었지만, 특히 제2차 침략 때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때는 노예로 납치해 매매하기 위한 노예상인들이 군인들과 결탁해 포르투갈노예선이 조선 해안에까지 출동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노예를 철포, 백사(白絲) 등과 교환하였다. 노예로 매매하는 것이 폭리를 남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규군은 물론 출병한 다이묘들도 노예매매에 간여하였다.주 393
각주 393)
이장희(1995), 「왜란 중의 사회상」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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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조선 피로인들이 노예시장으로 나와 국제노예시장의 가격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나와 있던 천주교 선교사들이 노예시장에서 이들을 구매해 해방시킨 숫자만도 수천 명에 달한다. 서양선교사들이 그 잔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이 전쟁을 ‘사람사냥전쟁’이자 ‘노예전쟁’으로 성격 규정하기도 한다.주 394
각주 394)
이원순(1985), 위의 논문, 6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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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피로인을 쇄환하는 일이 조선 조정으로서도 큰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전후 3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의 명칭도 회답겸쇄환사로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대마도주는 여러 차례에 걸쳐 피로인을 송환하였고, 사명대사 유정과 세 차례의 회답겸쇄환사가 쇄환해 오는 등 17세기 전반기까지 총 59차례에 걸쳐 7,300명이 돌아왔다.주 395
각주 395)
米谷均(2000), 「17세기 일조관계에서의 조선피로인의 송환」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331~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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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전체 숫자의 1할도 되지 못하는 비율이다. 도쿠가와막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피로인을 소유한 주인들이 돌려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항왜
항왜(降倭)란 임진전쟁 때 전쟁 중에 조선에 투항한 일본 군인을 가리킨다.주 396
각주 396)
『조선왕조실록』에는 ‘投降倭’ ‘順倭’ ‘降倭’ ‘逃倭’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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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의 규모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사자와 포로로 사로잡힌 자[俘虜倭]를 제외하고도 1만 명이 투항했다면 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이들이 항복해 귀순한 배경에는 멀리는 조선 초기 이래의 향화정책(向化政策)의 효과와 전쟁 중의 적극적 회유정책을 생각할 수 있다.주 397
각주 397)
이장희(1995), 위의 논문, 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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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초기에 귀순한 사야카(沙也可 : 金忠善)는 “조선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흠모하려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왜노(倭奴)가 덕의(德義)를 사모해 항복해 온다.”라는 기사가 종종 나오는데, 이러한 사례가 전자의 경우이다. 한편 1594년 이후에는 조정에서 항왜에 대해 적극적 유치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조총 제조, 검술에 능숙한 자, 염초자취법(焰硝煮取法)을 해득한 자 등 기술자에게 군직(軍職)을 하사하고 결혼도 시켜주는 등 항왜에 대한 우대정책을 실시하자 일본군의 집단적 투항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기아와 추위, 전세가 불리해진 후 염전(厭戰) 분위기와 패배의식, 귀국 후의 생활에 대한 걱정 등으로 인해 항왜가 늘어났다.주 398
각주 398)
김문자(2005), 위의 논문, 330~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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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항왜는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첫째, 조총과 창검 제조기술자, 검술에 능한 자, 염초자취법 해득자 등은 우대받으면서 자신의 기술을 발휘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관직과 급료도 주었다.주 399
각주 399)
『선조실록』 권88, 27년 2월 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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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특별한 기술이 없는 자들은 격군(格軍)으로 편입되거나, 변방의 수비, 내란 진압군 등으로 동원되었다. 셋째, 일본군과의 전투 및 정보탐색에 동원되었다. 1596년에는 항왜를 중심으로 투순군(投順軍)을 편성하여 정유재란 때 군공을 세웠다. 넷째, 전후에는 대부분 북쪽 변경에 군사로 배치되어 여진족 방비에 동원되었다.

  • 각주 390)
    김문자(2005), 「임란시 항왜문제」 『임진왜란과 한일 관계』, 363~364쪽. 바로가기
  • 각주 391)
    민덕기(2005), 「임진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395쪽 ; 이채연(1993), 『임진왜란 포로실기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원순(1985), 「임진왜란시의 조선부로노예 문제-왜란성격 일모」 『변태섭박사화갑기념 사학논총』, 삼영사. 바로가기
  • 각주 392)
    때문에 피로인 가운데 여자가 더 많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바로가기
  • 각주 393)
    이장희(1995), 「왜란 중의 사회상」 『한국사』22, 국사편찬위원회, 175쪽. 바로가기
  • 각주 394)
    이원순(1985), 위의 논문, 628쪽. 바로가기
  • 각주 395)
    米谷均(2000), 「17세기 일조관계에서의 조선피로인의 송환」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331~334쪽. 바로가기
  • 각주 396)
    『조선왕조실록』에는 ‘投降倭’ ‘順倭’ ‘降倭’ ‘逃倭’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로가기
  • 각주 397)
    이장희(1995), 위의 논문, 162~163쪽. 바로가기
  • 각주 398)
    김문자(2005), 위의 논문, 330~334쪽. 바로가기
  • 각주 399)
    『선조실록』 권88, 27년 2월 무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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