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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관계

4. 중국과 일본의 관계

명은 중화적 국제질서에 도전했던 일본에 대해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해 전쟁을 치렀지만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결국 전쟁을 통해 명은 확실한 전과를 거두지도 못한 채 막대한 전비만 허비했다는 자체 비판에 시달렸고, 대국으로서의 위신도 상당히 실추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명은 전란 후 일본에 대한 무시정책을 취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도쿠가와막부는 1600년 국교정상화를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과의 감합무역(勘合貿易) 부활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유구(琉球)를 통해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복건성(福建省)의 총독에게 직접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감합무역 재개와 국교정상화를 타진했지만 명은 끝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주 386
각주 386)
紙屋敦之(1997), 『大君外交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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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일본의 접촉은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일본은 전쟁 중인 1592년 가토군[加藤淸正軍]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면서 여진족의 상황을 일부 파악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후 명과의 공로(貢路)를 확보하려고 했을 때 그 주요 루트로 요동로를 상정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여진족에 의해 단절되자 위기의식과 함께 만주지역의 상황에 예민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임진전쟁을 계기로 후금과 일본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명과 조선이 개재되어 상당히 미묘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존재를 이용해 후금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며, 그러한 시도는 17세기 초반에도 있었다.주 387
각주 387)
『선조(宣祖)실록(實錄)』 권71, 선조 29년 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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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또한 후금에 대한 견제의식에서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으로 원병을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내기도 하였다.주 388
각주 388)
紙屋敦之(1987), 「幕藩制國家의 成立과 東アジア」 『歷史學硏究』573, 8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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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강력한 도전 앞에 수세에 몰리고 있었던 명은 전쟁 직후 일본의 국교정상화 요청을 무시했던 것과는 달리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명은 1633년 후금의 위협에 시달리던 조선에게 일본에 청원할 것을 종용하였다. 1638년부터는 청을 견제하기 위해 명이 일본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는 풍문이 조선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마침내 청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남쪽으로 피난한 1645년과 1646년에는 남명(南明)의 융무정권(隆武政權)과 정지룡(鄭芝龍)이 일본의 도쿠가와막부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주 389
각주 389)
한명기(2009), 위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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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명과 청이 교체된 상황에서 명과 일본의 처지가 역전된 상황을 상징하는 사실이다. 임진전쟁이 일어난 지 50년 사이에 거대한 역전이 벌어진 것이다.

  • 각주 386)
    紙屋敦之(1997), 『大君外交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216~217쪽. 바로가기
  • 각주 387)
    『선조(宣祖)실록(實錄)』 권71, 선조 29년 정유. 바로가기
  • 각주 388)
    紙屋敦之(1987), 「幕藩制國家의 成立과 東アジア」 『歷史學硏究』573, 83~87쪽. 바로가기
  • 각주 389)
    한명기(2009), 위의 논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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