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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조선의 대외관계

1. 전후 조선의 대외관계

임진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가장 큰 피해자는 조선이었다. 전란 중 경작 인구의 감소와 농토의 황폐화로 150만결의 토지가 50만결로 줄어들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각종 문화재가 소실되고 약탈당하였으며, 또 전란 중에 노비대장과 토지대장이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노비가 급감함으로써 조선사회를 유지하던 지주의 하나인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비록 조선왕조 자체는 망하지 않고 유지되었지만 조선전기의 사회체제가 무너져 내렸다. 전란 후 조정에서는 국가 재건을 위해 수취체제 등 제도적 개편을 시행하였으나 양반지배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은 없었다.
7년간의 전란의 참화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조선은 중원에서의 명·청 교체라는 소용돌이에 다시 휩쓸려 들어갔다.
금(金)이 멸망한 이후 여진족은 만주지역에서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여러 부족이 산거(散居)하는 상태로 있었다. 명대에는 이러한 여진부족에 대해 200여 개의 위소(衛所)를 설치해 통치했으며, 조선 또한 기미정책을 통해 견제하였다. 그런데 1580년대부터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1583년 명군의 휘하에서 해서여진(海西女眞) 공략에 참여했다가 부(父)와 조(祖)가 명군에 살해된 누르하치는 이후 독자적인 세력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여진 각 부족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부(富)를 축적한 후 1588년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91년에는 해서여진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조선전기 이래 여진족을 통제해왔던 명과 조선은 그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 했지만 임진전쟁으로 인해 여유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오히려 1592년과 1597년 일본의 1, 2차 침략 때 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안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는 1615년 팔기제(八旗制)를 완성한 다음, 1616년에는 통일국가의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고쳤으며, 마침내 1618년 명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후금과 명의 전쟁 과정에서 조선은 명으로부터 원군 파병을 요구받았다. 광해군은 숙고 끝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5천명의 군사를 주어 파견하였다. 그러나 1619년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조명연합군이 패배하자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였다. 이후 국제정세를 현실적으로 파악한 광해군을 명의 원조 요구를 거부하면서 후금과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대외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인조정권은 친명(親命)의 기치 아래 명의 후금 공략에 적극 협조하였다. 가도(椵島)에 주둔해 있던 명의 모문룡(毛文龍)에 대해서도 원조를 강화하였다. 결국 1627년 후금은 모문룡을 제거하고 경제적 지원을 확약받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2개월에 걸친 전투에서 조선은 패배하였으며,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명과 국교를 단절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1636년 청의 태종은 칭제건원(稱帝建元)하면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이에 조선에 대해 ‘형제의 맹약[兄弟之盟]’을 ‘군신의 의[君臣之義]’로 바꾸자고 하면서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 명을 요구해 왔다. 조선에서 이를 용납하지 않자,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른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2개월간의 전투에서 패배한 인조는 항복하였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청의 책봉을 받는 군신 관계로 바뀌었고, 명에 대한 공격에 동참한다는 등 11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같이 청은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조선에 대한 두 차례의 침략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1644년에 입관(入關)한 수 명을 제압하고 중원을 차지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하였다.
임진전쟁과 후금에 의한 두 차례의 침략, 일본에서의 정권 교체, 중원에서의 명·청 교체 등으로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의 양상은 실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임진전쟁 후 동북아시아에서의 변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후금과 일본의 군사적 위상의 강화이다. 국제질서의 운영자로서의 명의 위상은 형편없이 훼손되었으며, 조선의 처지 또한 더욱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주 380
각주 380)
한명기(2009),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본 임진왜란-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명·청·일 관계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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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는 일본의 힘을 빌려 청을 견제하자는 논의[以倭制淸論]가 나올 정도로 얽히고 설킨 혼돈의 정세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일본의 도쿠가와막부에서 실제 원병 파견을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임진전쟁 후의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전환기에서 조선은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명과의 전통적 관계 위에 새롭게 군사강국으로 부상한 청과 일본의 사이에서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전반기 혼돈의 와중이었던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삼번(三藩)의 난(1673~1681)이 진압되고, 1683년 타이완을 거점으로 한 정경(鄭經)의 저항도 진압되면서 안정을 되찾았고, 조선과 청의 관계도 긴장관계에서 정상적인 관계로 변하였다.

  • 각주 380)
    한명기(2009),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본 임진왜란-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명·청·일 관계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경인문화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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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조선의 대외관계 자료번호 : edeah.d_0004_0010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