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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제1차 침략

2. 제1차 침략

1) 초기 육전의 상황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외교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침략군을 결성해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1591년 정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군량·병선·군사의 수를 할당하여 동원령을 내렸고, 큐슈[九州]의 북쪽 조그만 항구인 나고야[名護屋]에 행영(行營) 본부를 축성하여 침략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조선 침략의 일자를 1592년 3월1일로 정한 히데요시는 이 해 정월 수륙침공군의 편성을 마치고 3월에 재편하였다.
1차 침입 때의 일본군의 구성과 규모를 보면, 육군은 9개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총병력이 158,700명이었다. 수군은 별도로 편성하였는데, 5,000명이었고, 나고야에 잔류한 지원병력이 118,300명으로 도합 20여만 명에 달하는 대군사였다.주 360
각주 360)
최영희(1995), 「왜란 전의 정세」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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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의 병력은 각 다이묘들이 할당된 군사를 다 충당하지 못해 명목상 숫자보다는 적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선봉부대를 보면, 제1번대가 고니시 유키나가군[小西行長軍]으로 18,700명이었고, 제2번대는 가토 키요마사군[加藤淸正軍]으로 22,800명, 제3번대는 구로다 나가마사군[黑田長政軍]으로, 11,000명이었다. 4월13일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이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어 2번대와 3번대가 상륙하였고, 이들은 중로·좌로·우로로 나누어 서울로 북상하였다. 이 침공로는 조선 전기 일본사절단의 상경로(上京路)를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1번대의 선봉군으로 나섰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향도로 안내하였다. 부산성과 동래성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은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을 거점으로 막아보고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4월 24일 경상도순변사(慶尙道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4월 26일에는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이 충주전투에서 패배하였다. 4월 27일 패배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으로의 파천(播遷), 광해군으로 분조(分朝)를 설치하는 것, 왕자들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 군사를 모집할 것 등을 결정하였고, 4월 30일 서울을 떠났다. 이에 일본군은 5월 3일, 1번대의 고니시군[小西行長軍]을 필두로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후 1번대 고니시군은 평안도, 2번대 가토군은 함경도, 3번대 구로다군은 황해도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부대는 도성과 하삼도(下三道)를 지키도록 합의하였다.
5월 18일 조선의 관군은 임진강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면서 명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고니시군은 6월 13일 평양성을 점령하였고,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류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입성하였고, 2개월 만에 평양까지 함락시킬 정도로 연정연승하면서 쾌속질주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승리는 여기까지였다.
1차 침입 초기 육전에서 조선의 관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히데요시가 동원한 일본 군대는 10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보유하였다. 또 용맹과 규율로 유명하며, 조총으로 무장된 우세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병력의 숫자에서도 조선과 비교가 되니 않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당시의 일본군은 16세기 후반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주 361
각주 361)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2007), 「脣亡齒寒 :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전쟁』,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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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조선의 군대는 200년 동안 지속된 평화 속에서 군정과 기강이 해이해졌고, 대역납포(代役納布),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의 현상으로 실제 군적(軍籍)이 텅 비어있는 상황이었다. 군사적·기술적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규모 침략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2) 의병 봉기
의병(義兵)이란 국난에 즈음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나 적과 싸운 민병(民兵)을 가리킨다.주 362
각주 362)
김강식(2005), 「임란시 의병전쟁」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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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전투에서 관군이 패배하자 향토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근왕창의(勤王倡義)를 기치로 자발적으로 거병하였다. 의병의 정신적 기저로서는 유교적 근왕정신, 향토방위, 민족적 저항의식의 세 요소를 들 수 있다.주 363
각주 363)
최영희(1975), 『임진왜란 중의 사회동태』, 한국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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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병은 침략을 받은 경상도지역에서 일어났다. 1592년 4월 22일 의령에서 곽재우(郭再祐)의 거병을 시작으로 거창에서는 김면(金沔), 합천에서는 정인홍(鄭仁弘)이 일어났고, 이어 5월 16일에는 호남의 나주에서는 김천일(金千鎰), 광주에서는 고경명(高敬命)이 거병하였으며, 호서지역에서는 5월 21일 조헌(趙憲)이 주도해 일어났다. 초기 의병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공을 올리자 6월초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도 의병을 공적인 군대로 인정하였다. 또 왕자 등을 동원해 봉기를 촉구하였다.
의병은 모집방식에 따라 자모의병(自募義兵)과 소모의병(召募義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자가 의병이며, 무기와 군량도 스스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임진전쟁에서는 소모의병도 많았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비율이 증가하였다. 창의(倡義)의 동기에 따라서는 향토 위주의 지역방어를 하는 향보의병(鄕保義兵 : 鄕兵)과 한성 수복과 같은 국가방위를 목표로 하는 근왕의병(勤王義兵 : 忠義軍)으로 나눌 수 있다. 전란의 초기에는 향병이 중심이었으나 1592년 6월 이후 소모의병이 많아지면서 근왕의병으로 성격이 변화해 갔다.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료나 유생이었으며, 군사는 농민이 주력이었다. 그밖에 특수부대로서 의승군(義僧軍)이 있었다. 묘향산의 휴정(休靜)이 기치를 들자 관동지역의 유정(惟政), 호남의 처영(處英) 등 승려들이 전국의 사찰에서 궐기하였다. 의승군은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고 때로는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의병의 전술은 지리와 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의병군의 희생을 줄이고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후방을 교란해 전의를 상실케 하는 등 전술적인 의의가 매우 컸다. 초전에서 관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할 때 의병에 대한 유격전은 일본군의 진군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부는 대규모ㅢ 부대로 정규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광주의 고경명(高敬命)과 양대박(梁大撲) 부대는 6천명의 부대를 형성하였다.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부대는 1592년 9월에서 12월까지 가토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수복하는데 결정적 공로를 세웠다.
1592년 10월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100여 부대에 달하는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의 총 규모를 보면 조직된 의병으로 확인되는 인원이 28,000명에 달한다.주 364
각주 364)
송정현(1995), 「왜란의 발발과 경과 – 의병의 봉기」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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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으로도 관군의 4분의 1을 넘는 수치이다.주 365
각주 365)
1593년 명에 통보한 조선군의 규모를 보면, 관군과 의병을 합쳐 도합 168,400명이다. 이 가운데 의병이 027,900명으로 나와 있다. (李炯錫(1974)), 『壬辰戰亂史』 상권,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76~177쪽) 그런데 이 통계에서 의병은 12개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만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의 의병 숫자는 이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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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593년 정월 명의 원군과 조선군이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하였고, 이를 계기로 관군이 재정비된 이후로는 주도권이 관군에게 넘어갔으며 의병투쟁의 전술적 의의가 줄어들었다. 그 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의병의 역할이 줄어들었고, 대신 폐단도 빈발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의병을 관군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며, 관군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1596년 광주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희생된 후 의병은 쇠퇴하였다.
3) 수군 승리와 전세 반전
임진전쟁이 발생하기 이전 조선 수군의 상태는 열악하였다.주 366
각주 366)
1555년 을묘왜변 이후 군사제도가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 체제로 바뀜에 따라 연해의 각 읍마다 수군기지를 설치해 수사(水使)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것은 종전의 해방체제(海防體制)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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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1591년 2월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현지주민으로 수군을 편성하였고, 다양한 신분층의 수군병력을 널리 확보하였다. 또 대형전함인 판옥선(板屋船) 20여 척과 포작선(鮑作船) 46척을 건조하였다. 1592년 3월에는 거북선 2척을 완성하였으며, 전라좌수영 앞 바다에 철쇄(鐵鎖) 장치를 설치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은 전선, 화포 등 군비를 준비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하였다.
초기 해전에서 경상좌수영의 수사(水使) 박홍(朴泓)이 도망가고 우수사 원균(元均)의 군대가 패전하면서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부대는 1592년 5월 4일 경상도해역으로 출동하였다. 이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이었는데, 한산도에서 경상도 우수군의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합류하였다. 제1차 출전은 5월 4일부터 10일 사이에 벌어졌다. 5월 7일 최초의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한 데 이어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16척을 격침하였다. 이 해전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큰 의미를 지닌다. 해전에서의 승리는 조선군에게 자신감을 회복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의병의 봉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2차 출전은 5월 29일에서 6월 10일까지 벌어졌는데, 사천포,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도합 적선 70여 척을 격침하였다. 이때부터 3도연합수군이 형성되었다. 3차 출전은 7월 6일에서 12일까지 이루어졌다. 이때는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3군 연합으로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은 일본 수군의 최정예부대와 한산도에서 결전을 벌여, 6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다. 한산도대첩에 이어진 안골포 해전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적의 정예 수군을 궤멸시킴으로써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렸다.주 367
각주 367)
조원래(1995), 「왜란의 발발과 경과 – 수군의 승첩」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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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의 전략적 의의는 실로 커서 임진전쟁의 전세를 반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구상했던 일본군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서해로부터의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의 육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주 368
각주 368)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도해전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개 왜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이 한 번의 해전에 의해 그들의 한 팔이 끊어져 버린 것처럼 되고 말았다. 따라서 小西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았다고는 하나 그 형세가 외롭게 되어 감히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해지역 일대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또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중흥이 이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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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일본 수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해전을 포기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고 웅거하면서 육지로부터 공격하는 작전으로 바꾸었다.
4차 출전은 8월 24일부터 9월 2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9월 1일의 부산초해전은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각각 332척과 470척의 병선을 동원한 대격돌이었다. 지금까지의 방어전략에서 공격전으로 나선 최초의 해전이기도 한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130척을 격침시켰다. 사실상 1차 침략전쟁의 해전을 마무리한 전투였다.
5개월간 10여 차례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33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는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해전에서의 승리는 1차 침략에서 전세를 수세에서 공세로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일본군은 제해권을 뺏기면서 서해안을 통해 보급하려고 한 작전이 무산되었다. 또 부산에서 평양까지 이어지는 긴 육상보급로는 후방지역의 의병에 의해 교란되면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전세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조선 수군의 승리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수군의 편제를 들 수 있다. 조선 수군은 바다와 선박에 익숙한 연해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되었다. 그 이유는 16세기 들어 삼포왜란과 을묘왜변 등 여러 차례의 왜변을 겪는 과정에서 연해지역 총동원체제와 같은 강화된 수군제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해전을 치러본 경험이 거의 없고 제도적으로 수군을 양성하지 않음으로써 육군과 전투기능상 별로 차이가 없었다.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군의 지도부는 수군의 역할과 기능을 잘 몰랐으며, 군량미를 수송하는 보급선으로의 역할 정도를 기대하였다. 또 조선의 수군력에 대해 전혀 모르고 무시하였다.주 369
각주 369)
德富蘚峰(1935),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 丁篇, 民友社, 671쪽.
그는 秀吉이 예상하지 못한 요소이면서 패전으로 끝나게 된 주된 요인으로 첫째, 조선의 의병 봉기 둘째, 수군의 우세 셋째, 명군의 내원, 이 세 가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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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선박의 우수성이다.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을 크고 견고하였으며 일본선은 작고 허약하였다. 일본선은 선저(船底)가 V형으로 속도는 빠르나 전투시 방향을 바꾸기 힘들었는데 비해 조선의 판옥선은 U형으로 방향선회와 기동성이 뛰어났다. 또 일본 수군은 선박에 뛰어올라 육박전투를 벌이는데, 조선의 판옥선은 선체가 높아서 접근할 수 없었다. 판옥선은 대형선이었기 때문에 화포를 많이 적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원거리 전투에서는 화포로 공격하고, 근거리 전투에서는 거북선과 같이 충돌로 격파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셋째, 함재화력이다. 일본이 조총을 사용한 데 비해 조선군은 대형함선에 각종 대포와 총통(銃筒), 완구(碗口) 등 철포를 적재함으로써 화력에서 압도하였다.
넷째, 이순신의 전략이다. 그는 서남해상의 지리와 조수 등을 활용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치밀하게 작전을 운용하였다. 명량해전에서 조수를 이용한 것과 한산도해전에서 화포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학익진(鶴翼陣)을 채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때문에 열세의 전력으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또 바닷길에 익숙한 연해민이 자발적으로 합류한 이른바 해상의병이 많이 포함된 점도 그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4) 명군 내원과 관군 재정비
조선은 일본군에게 도성을 점령당하고 평양으로 피난하던 가운데 5월 임진강전투에서 패배하자 명에 원군(援軍) 파견을 요청하였다. 명의 조정에서는 조선에 원군을 파병할 것인가에 관해 격론을 벌였다. 그 사이에 평양성까지 함락당해 선조가 의주까지 피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명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원인에 대한 학설을 검토해 보면, 첫째, 조공국 보호론이다. 이는 책봉(冊封)·조공체제(朝貢體制)에 따른 전통적 우호관계와 그에 따른 종주국으로서의 책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론일 뿐 이것만으로 막대한 전비가 드는 원병을 파견하는 실질적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둘째는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이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조선을 방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주 370
각주 370)
楊暘(1988), 『明代遼東都司』, 中國 鄭州 中川古籍出版社 (케네스 스워프, 「脣亡齒寒」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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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명 조정의 논의 가운데 설득력 있는 파병의 논리는 명 자체의 안보와 국경방위를 위해서는 조선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주 371
각주 371)
시기를 놓쳐 명의 본토를 전쟁터로 삼기보다는 조선을 전장으로 하는 것이 낫고, 평원지대인 요동보다 산악지역인 조선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명군이 조선에서 싸우면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조선에 요구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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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원병을 파견하면 조선군과 연합할 수 있지만, 만일 조선이 망한 후에는 조선이 일본군과 연합하기 때문에 지금 원군을 보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어차피 일본이 조선을 함락시키면 이어 명을 침공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기 때문이다.주 372
각주 372)
한명기도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역사비평사)에서 명의 파병동기가 외형적으로는 조선을 구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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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히데요시의 야망을 저지함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만력제(萬曆帝)의 개인적인 욕망이라는 설이다.
명의 조정에서는 원군을 파병하기로 결정은 하였지만 당시의 상황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 무렵 중국의 서부지역에서는 영하(寧夏)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몽골계 신하인 발배(悖拜)가 주도하였고, 오르도스 몽골 추장들이 합류해 1592년에 꽤 오랜 기간 동안 섬서(陝西) 일대를 휩쓸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요동총병(遼東摠兵) 이여송(李如松)과 10만 명의 요동군사가 파견되었다. 조선과 인접한 요동의 주력부대가 이탈한 상태였기 때문에 원군을 구성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우선 요동부총병 조승훈(祖承訓)에게 4천의 군사를 맡겨 파견하였다. 조승훈은 7월초 압록강을 건너온 후 7월 17일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8월 1일 2차 탈환작전에서는 조선 관군도 합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명은 시간을 벌기위해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강화회담을 시작하였다. 한편 평양성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명이 교전당사국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일본도 긴장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로 전국에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게 된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은 강화회담에서 50일간 휴전하기로 합의하였다.
1592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요동총병 이여송은 닝샤의 난을 진압한 후 요동제독에 임명되어 4만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원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1월 6일에서 9일까지 제2차 평양성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의 군세를 보면, 명군 43,000명 조선군 8,000명, 일본군 15,000명이었다. 명과 조선의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개성까지 탈환하였고, 평안도·황해도·경기도·강원도의 4도를 수복하였다. 한편 함경도의 가토 키요마사도 의병장 정문부부대에 패배하여 일본군은 모두 서울로 퇴각하였다.주 373
각주 373)
서울에 퇴각한 일본군은 전력의 30~40%를 소모해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조선 침공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15만 명이었는데, 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3분의 1인 5만명이 전사, 혹독한 추위,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한다. 厭戰意識과 패전의식으로 서울에 퇴각한 일본군은 이미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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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여송은 적을 경시하다 벽제관전투에서 일본군의 복병에 걸려 패배하였다. 그 후 이여송 군대는 개성에 주둔하다가 평양으로 퇴각하였고, 이후 전의를 상실하고 강화교섭에 주력할 뿐이었다.
명군의 내원은 제1차 침공의 전세를 반전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로는 별다른 실질적인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명은 전쟁 기간 중 도합 10만 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것의 심리적 효과만으로도 결코 적지 않다. 대신 폐단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의 의견이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일본과 강화교섭을 일방적으로 진행하였다. 또 명 관리들의 월권행위, 직할통치론 대두, 내정간섭 등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였다. 민폐도 상당히 심하게 끼쳤다.
초기 육전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했던 관군은 평양성전투를 계기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8월 제1차 평양성 전투에서비록 패하였지만 명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으며, 의병과 수군의 승리에 힘입어 일본군의 진격이 그치자 관군도 재기하게 되었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관군과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연합해 승리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사는 8,600명이고 일본군은 3만 명이었지만 성을 굳건히 지켜내었다. 1593년 2월에는 권율(權慄)이 이끈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조선군은 의승군을 포함해 1만 명이었고, 일본군은 3만 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화차와 비격진천뢰, 총통 등 화포가 위력을 발휘해 압도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인해 일본군이 도성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 각주 360)
    최영희(1995), 「왜란 전의 정세」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21쪽. 바로가기
  • 각주 361)
    케네스 스워프(Kenneth M. Swope)(2007), 「脣亡齒寒 : 명나라가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전쟁』, 휴머니스트. 바로가기
  • 각주 362)
    김강식(2005), 「임란시 의병전쟁」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81쪽. 바로가기
  • 각주 363)
    최영희(1975), 『임진왜란 중의 사회동태』, 한국연구원. 바로가기
  • 각주 364)
    송정현(1995), 「왜란의 발발과 경과 – 의병의 봉기」 『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42~43쪽. 바로가기
  • 각주 365)
    1593년 명에 통보한 조선군의 규모를 보면, 관군과 의병을 합쳐 도합 168,400명이다. 이 가운데 의병이 027,900명으로 나와 있다. (李炯錫(1974)), 『壬辰戰亂史』 상권,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76~177쪽) 그런데 이 통계에서 의병은 12개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만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의 의병 숫자는 이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366)
    1555년 을묘왜변 이후 군사제도가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 체제로 바뀜에 따라 연해의 각 읍마다 수군기지를 설치해 수사(水使)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것은 종전의 해방체제(海防體制)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었다. 바로가기
  • 각주 367)
    조원래(1995), 「왜란의 발발과 경과 – 수군의 승첩」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63쪽. 바로가기
  • 각주 368)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도해전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개 왜적은 본래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쳐들어오려고 하였는데, 이 한 번의 해전에 의해 그들의 한 팔이 끊어져 버린 것처럼 되고 말았다. 따라서 小西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았다고는 하나 그 형세가 외롭게 되어 감히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해지역 일대까지 보전할 수 있었다. 또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중흥이 이룩될 수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369)
    德富蘚峰(1935),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 丁篇, 民友社, 671쪽.
    그는 秀吉이 예상하지 못한 요소이면서 패전으로 끝나게 된 주된 요인으로 첫째, 조선의 의병 봉기 둘째, 수군의 우세 셋째, 명군의 내원, 이 세 가지를 들었다. 바로가기
  • 각주 370)
    楊暘(1988), 『明代遼東都司』, 中國 鄭州 中川古籍出版社 (케네스 스워프, 「脣亡齒寒」에서 재인용). 바로가기
  • 각주 371)
    시기를 놓쳐 명의 본토를 전쟁터로 삼기보다는 조선을 전장으로 하는 것이 낫고, 평원지대인 요동보다 산악지역인 조선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명군이 조선에서 싸우면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조선에 요구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372)
    한명기도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역사비평사)에서 명의 파병동기가 외형적으로는 조선을 구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중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73)
    서울에 퇴각한 일본군은 전력의 30~40%를 소모해 전투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조선 침공에 동원된 일본군은 약 15만 명이었는데, 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서울로 퇴각한 일본군은 3분의 1인 5만명이 전사, 혹독한 추위, 기아, 질병 등으로 죽었다고 한다. 厭戰意識과 패전의식으로 서울에 퇴각한 일본군은 이미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한 군대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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