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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발발 원인

1. 발발 원인

먼저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을 둘러싼 제 학설을 검토해 보자.
첫째, 명을 정복하겠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의 발로라는 설이다.주 354
각주 354)
池內宏(1914), 『文祿慶長の役 正編 第一』. 그는 秀吉의 전쟁발발 동기에 대해 佳名을 삼국(唐·南蠻·天竺)에 드날리고 후세에 남기려는 공명심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秀吉의 당면한 목적은 명 정복이며, ‘조선정벌’이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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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히데요시는 국제정세와 외교체제에 무지하였다. 조선과의 교린외교의 내용에 대해 몰랐고, 심지어 조선을 대마도에 조공하는 나라로 알았다고 하였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이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하니 그의 명정복설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필리핀에 보냈다는 서계에 나오는바 “태양[日輪]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도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둘째, 국제질서 변화설이다. 이 설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이 사건을 동아시아 대외관계의 변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각에서 제기되었다.주 355
각주 355)
朝尾直弘(1970), 『鎖國制の成立』(東京大學出版會) 및 佐佐木潤之介(1984), 『幕藩制國家論』(東京大學出版會) 등에서 제기되었다.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질서 속에서 ‘변경’에 속하였던 일본이었지만, 戰國時代의 통일을 달성한 秀吉은 일본의 대외적인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조선침략을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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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을 선두로 하는 서양문물의 전래와 자극을 받아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인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체제를 변동시킬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학설이다. 히데요시의 공명설과 마찬가지로 그의 주관적인 의도를 중시한 학설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를 일으키고, 1941년에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실현하기 위해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 설 또한 어느 정도 사실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셋째, 명과의 감합무역(勘合貿易) 부활설이다.주 356
각주 356)
辻善之助(1917)의 『海外交通史話』와 田中義成(1925)의 『豊臣時代史』 등에서 이 설을 제기하였다. 전후에는 鈴木良一(1954)이 『豊臣秀吉』에서 유럽상업자본에 대항해 동아시아세계에서 감합무역과 왜구의 교역을 뛰어넘는 무역을 바랐던 일본내 상업자본의 요구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감합무역부활 요구는 명 정복의 가능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실해 진 후 강화 조건의 하나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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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는 왜구를 진압하는 대가로 1547년 이후 중단된 담합무역을 부활시키기 위해 조선을 통해 명과 교섭하고자 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부해 실패로 돌아가자 조선을 공격하였다는 주장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명과의 강화회담에서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조에 감합무역의 부활이 있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히데요시의 대외팽창 시도는 당시 일본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상업자본에 의해 고취되고 있었다. 그들은 대외무역의 성장과 해외진출을 적극 지향하면서 히데요시를 지원하였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합무역 부활요구는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조건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을 전쟁 발발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넷째, 영토확장설이다.주 357
각주 357)
中村榮孝(1969),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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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계급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히데요시정권의 구조적 측면에서 유추한 주장이다. 전국시대 이래 영토의 확장을 바라는 여러 다이묘들의 요구가 있었는데,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과 명나라까지 침략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주 358
각주 358)
北島万次(1995)도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에서 제1차 침략(임진왜란)은 명 정복을 위한 침략이고, 제2차 침략(정유재란)은 조선영토를 탈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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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영주세력 약화설이다. 통일전쟁 과정에서 성장한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들의 갈등과 불만을 해외에서 해소시킬 필요에서 대외전쟁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대외전쟁에서 그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소모시킴으로써 정군의 안정을 도모했다는 것이다.주 359
각주 359)
에도시대 후기인 19세기 賴山陽이 『日本外史』에서 “秀吉이 戰國時代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여러 大名들 사이에서 공명을 바라는 마음과 전투할 힘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을 밖으로 돌려서 大名의 권력을 꺾은 것이 조선출병이다.”라고 보았다. 德富蘚峰도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 朝鮮役」(1935)에서 같은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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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여러 가지의 학설은 모두 일면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외전쟁을 통해서 영주세력의 갈등을 무마하는 한편으로 집권적인 권력을 편성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교역상의 불리함을 타파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기본적으로는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의 야망이 해외로 확장되어 대륙침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공명심 위에 국제정치에 대한 무지 등이 가미되어 일으킨 무모하고도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 각주 354)
    池內宏(1914), 『文祿慶長の役 正編 第一』. 그는 秀吉의 전쟁발발 동기에 대해 佳名을 삼국(唐·南蠻·天竺)에 드날리고 후세에 남기려는 공명심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秀吉의 당면한 목적은 명 정복이며, ‘조선정벌’이 아니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55)
    朝尾直弘(1970), 『鎖國制の成立』(東京大學出版會) 및 佐佐木潤之介(1984), 『幕藩制國家論』(東京大學出版會) 등에서 제기되었다. 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질서 속에서 ‘변경’에 속하였던 일본이었지만, 戰國時代의 통일을 달성한 秀吉은 일본의 대외적인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조선침략을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356)
    辻善之助(1917)의 『海外交通史話』와 田中義成(1925)의 『豊臣時代史』 등에서 이 설을 제기하였다. 전후에는 鈴木良一(1954)이 『豊臣秀吉』에서 유럽상업자본에 대항해 동아시아세계에서 감합무역과 왜구의 교역을 뛰어넘는 무역을 바랐던 일본내 상업자본의 요구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감합무역부활 요구는 명 정복의 가능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실해 진 후 강화 조건의 하나로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바로가기
  • 각주 357)
    中村榮孝(1969), 『日鮮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바로가기
  • 각주 358)
    北島万次(1995)도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에서 제1차 침략(임진왜란)은 명 정복을 위한 침략이고, 제2차 침략(정유재란)은 조선영토를 탈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59)
    에도시대 후기인 19세기 賴山陽이 『日本外史』에서 “秀吉이 戰國時代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여러 大名들 사이에서 공명을 바라는 마음과 전투할 힘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을 밖으로 돌려서 大名의 권력을 꺾은 것이 조선출병이다.”라고 보았다. 德富蘚峰도 『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 朝鮮役」(1935)에서 같은 주장을 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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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발 원인 자료번호 : edeah.d_0004_001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