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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1.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16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의 경제상황을 보면 한·중·일 세 나라 모두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고, 상공업과 국제무역도 활발하였다. 명의 비단, 조선의 면포, 일본의 광산물이 주요 교역품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일본 상인의 교역 확대 요구가 중국에서 수용되지 않자 소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523년에 일언 영파(寧波)의 난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교역의 현장인 동아시아 해역에서는 새로운 변동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명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하였다. 해금령(海禁令)이란 책봉·조공관계에 있는 나라와의 사행무역과 공무역만 허락하고, 연해의 주민이 사사로이 외세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해외 무역이나 해양진출도 금지하는 조치였다. 또 하나 핵심적인 내용은 연해주민을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명 정부는 연해와 도서의 주민을 내륙으로 옮기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조선 정부가 왜구로부터 연해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한 공도(空島) 조치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치의 실시로 연해지역을 왜구의 근거지로 제공함으로써 왜환(倭患)을 더욱 조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연해 천리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주 349
각주 349)
김한규(2007),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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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해금은 원양(遠洋) 항해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명의 해군력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나아가 일본과의 교역을 크게 위축시킴으로써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사무역은 물론 감합무역(勘合貿易)까지 불가능하게 되었다. 명이 제해권을 포기한 동아시아해역에는 이른바 후기왜구가 횡행하면서 중국의 동남연해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국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힘의 공백은 서양의 해상세력이 진출하기에 편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 16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이 동아시아해역에 진출하였다. 1521년 스페인함대가 태평양을 횡단해 필리핀에 도착하였고, 포르투갈은 1577년 마카오를 획득하였다. 이들은 남미에서 가져온 은으로 명, 일본과 비단·모직물·자기 등을 교역하였다. 이 국제무역은 명과 일본에 많은 이익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명대 초기 엄격하게 정비되고 운용되었던 책봉·조공 체제도 동요되기에 이른다. 이 체제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외교·정치·경제·문화적 효과가 유지되는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게 기능한다. 이 체제에 참여하는 주변 국가는 정치적 복속에 대한 대가로써 집단안보체제를 통한 안전 보장, 군주의 대내적 위상과 정치적 안정, 고급한 중국문화의 수입, 물자의 구매와 같은 경제적 이익 등을 기대한다. 그런데 명대 중기 이후에는 이러한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주 350
각주 350)
명에서도 주변 나라들이 책봉·조공체제에 순응하는 이유를 “華風을 사모하고 歲賜의 이익을 탐했을 뿐.”(『文獻通考』 325권)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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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는 동요되고 서서히 붕괴될 조짐을 잉태하고 있었다.

  • 각주 349)
    김한규(2007), 「임진왜란의 국제적 환경」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99쪽. 바로가기
  • 각주 350)
    명에서도 주변 나라들이 책봉·조공체제에 순응하는 이유를 “華風을 사모하고 歲賜의 이익을 탐했을 뿐.”(『文獻通考』 325권)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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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자료번호 : edeah.d_0004_001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