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베트남의 성리학

전근대 시대의 베트남은 때로는 중국의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를 받거나 때로는 조공(朝貢) 관계라는 외교 방식을 통해 중국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수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중국의 후한 말 삼국시대 초기에 짜오 찌[交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했던 사섭(士燮)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그는 젊은 시절 낙양에 가서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짜오 찌에 중국의 문화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사섭 자신은 유교 문화를 베트남에 이식하는데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도 포용하였다.
중국 지배 하의 베트남에서 유학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는 것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였다. 이 때 신라의 최치원처럼 베트남 사람 중에서도 당 조정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고위관직에 오르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당나라 전시기를 통해 과거로 벼슬길에 오른 베트남 사람은 10명도 못되었다.
사실 중국 지배기의 베트남에서는 유학보다 불교가 더 크게 발달했다. 유학이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오히려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였다. 즉 독립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면서 통치에 필요한 관료군의 양성이 요구되었던 것이 이 시기 유학 활성화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주 325}

각주 325)

물론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15세기까지는 불교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단적인 예로, 리[李] 왕조(1009~1225) 때의 한 저명한 불승은 과거에 합격하여 한 때 관직에도 있었으나 곧 출가하여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과거시험이 처음 실시된 것은 리 왕조[李朝, 1009~1225] 전기에 해당하는 1075년이었는데, 이 시험에서 10여 명이 합격하여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이 설치되어 유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과거시험이 시행되고 유학 교육이 활성화된 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이 아니라, 그에 앞서 1070년에 베트남에 최초로 문묘(文廟)가 세워지고 학교도 부설되어 황태자와 고급 관리들의 자제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과거시험은 리 왕조 200년을 통해서도 일곱 번밖에 실시되지 않았으며, 과거 합격자들도 대개는 말단 관리에 임명되어 행정 문서를 정리하는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에 그쳤다.
쩐 왕조[陳朝, 1225~1400]는 리 왕조보다 관료 체제를 강화했지만, 정치적 지배 이념으로서의 불교의 지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정치의 실권은 쩐 왕실의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쩐 왕조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1250년대부터 1280년대에 걸친 3차례의 몽골 침입이었다. 몽골의 침입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또는 침입 이후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담당했던 이들은 문신 관료였다. 이를 계기로 문신 관료들은 조정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 나갔으며, 그에 따라 유학의 위상이나 영향력도 이전에 비해 높아졌다. 그러나 이들 문신 관료는 국난을 해결할 방책으로 유학의 고전들을 참조했기 때문에 순수한 유학자라기보다 ‘고전주의자’의 성격이 짙었고 따라서 신유학(新儒學)은 관심 밖이었다.
쩐 왕조에서 유학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켜준 것은 1380년대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던 호 꾸이 리[胡季犛]였다. 그가 강조한 것은 선진(先秦) 유학이었다. 주공(周公)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했던 호 꾸이 리는 쩐 왕실로부터 선양을 받기 위해 선진 유학을 강조했고 그에 따라 신유학은 철저히 배격했다. 이는 그가 한유(韓愈)를 ‘도유(盜儒)’라 부르고, 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은 박학(博學)하기는 하나 표절에만 힘썼다고 비난한 사실은 신유학을 배척한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진 유학 강조는 베트남 사회가 불교로부터 유교 사상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407년 명나라가 베트남을 침공하여 이를 직접 지배하에 두고 취한 동화 정책은 베트남 유학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은 베트남을 ‘교화’시키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및 유교적 윤리의 핵심인 효순(孝順)에 관련된 여러 서적들을 각급 학교에 나누어 주었다. 명의 지배한 기간이 20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끊임없는 독립투쟁으로 인해 명의 동화정책은 가시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가 베트남 유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428년 명을 물리치고 탕 롱[昇龍, 현재의 하노이]에서 제위에 오른 레 러이[黎利]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학자 응우옌 짜이[阮廌]는 황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한 명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신유학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 러이의 사후 어린 황제들이 즉위한 틈을 타서 정권을 장악한 개국공신 무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유학 이념을 계승했지만, 실제로는 유학의 진흥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4대 타인 똥[聖宗, 1460~1497]에 이르러 신유학은 베트남 유학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신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결혼할 때 유교적 의례에 따랐는가 여부를 관리의 임명 및 승진에서 중요한 평가 항목으로 고려하도록 하였다. 또 아무리 학문이 출중한 학자라 하더라도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자매와 화목하지 못하며 불의(不義)를 행하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등 유교의 윤리·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이와 같은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볼 때, 타인 똥이 유교 윤리의 실천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가 중시했던 유교 윤리가 신유학에 기반한 것임을 향시(鄕試)의 첫 시험 과목이 사서(四書)였다는 것을 통해 입증된다. 그 결과 타인 똥은 베트남 사회, 특히 베트남 가족을 신유학의 이념에 따라 변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1527년 레 왕조[黎朝]의 왕우를 찬탈한 막 당 중[莫登庸]은 민심 수습의 차원에서 신유학에 호의를 보여, 레 왕조 타인 똥의 정책을 이어받아 신유학을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레 왕조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면서 부흥세력과의 대결이 지속됨에 따라 신유학의 보급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1592년 막씨[莫氏]를 축출하고 중흥된 레 왕조는 공식적으로 타인 똥의 정책을 채택하여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유학의 가족 윤리를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그리하여 유교의 가족 윤리에 충실한 인물들, 예컨대 열녀(烈女)와 효자 등에 상금을 내리고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는 왕조 중흥에 공을 세운 찐씨[鄭氏]가 실권을 장악하고 레 황제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국가 이념인 신유학을 위반하였다. 즉 표면적으로는 신유학의 가르침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찬양하였지만 실제로는 신유학에서 혐오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시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찐씨와 더불어 레 왕조의 중흥에 공을 세운 응우옌씨[阮氏]는 찐씨와 대립하는 가운데 베트남 중부로 이주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웠다. 이들도 공식적으로는 레 왕실을 존중했지만 독자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신유학의 이념을 위반했다는 점에서는 찐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새로이 정복한 지역으로 인구가 적어 응우옌씨는 능력있는 인물들을 구하기 위해 출신 배경이나 도덕성 문제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북쪽에서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광대의 후손까지도 고위직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남부의 응우옌씨는 북부의 찐씨보다도 신유학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