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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에도시대 초기 주자학의 수용

3. 일본 : 에도시대 초기 주자학의 수용주 324
각주 324)
에도시대 초기의 주자학 수용에 관한 내용은 성해준(2003), 「일본 주자학의 전래와 수용」 『남명학연구』 15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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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학은 284년에 백제의 아직기(阿直岐), 이듬해에 역시 백제의 학자 왕인(王仁)이 일본으로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한 이후 시작되었다. 백제로부터 전래된 유학 서적은 조정·호족·승려 등에 의해 학습되었고, 고도쿠[孝德] 천황(597~654)이 집권한 다이카노 카이신[大化改新]때는 고대 율령 국가의 귀족과 관료들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創時代, 1185~1333] 초기에 걸쳐서 중국 송나라와의 교역이 확대되고 송의 신문화가 수입되었는데, 이때 유학에서는 선종 승려들을 통해 주자학이 전래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까지 유학 서적은 주로 교토[京都]의 조정, 쿠게[公家], 하카세게[博士家], 고잔[五山]의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가마쿠라 시대 중기부터 1500년대까지 유불 일치의 테두리 속에서 처음에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유교가 이해되었고 또 유교는 불교에 예속된 형태로 머물고 있었다. 당시 선승들의 중국 일본 간 왕래를 통해 전래된 주자학은 ‘유불일치(儒彿一致)’ ‘신유불합(神儒佛合)’ 등의 과정을 거쳐 난보쿠쵸[南北朝]·무로마치 말기부터 아즈치 모모야마[安士桃山] 시대가 되면 불교색에서 벗어나 독립된 주자학으로 연구되었다. 한편 조정·관가·신도가에서도 주희의 저술과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가 점점 늘어났다. 특히 신도가에서의 주자학 수용은 몽고의 일본 침략기부터 조금씩 나타나다가, 무로마치 시대의 간빠쿠[關白] 이치죠 카네라[一條兼良]에 이르면 정주(程朱) 학설의 바탕 위에서 신도 중심의 신도·유교·불교의 융합론이 전개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전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하카세게의 학자들이 전란을 피해 교토에서 지방으로 이동하여 다이묘[大名]·무장(武將) 등의 지방 유력자들에게 의존하였다. 이에 따라 주자학은 지방에도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지위도 점차 향상되었다. 하지만 일본에는 한국이나 중국의 과거와 같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단지 조정 관리나 신분이 높은 고잔의 승려, 신도가, 쿠게 등 극히 한정된 일부 지식인들의 교양으로 읽혀졌을 뿐이다. 이처럼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유학은 불교보다 세력이 약했지만, 장기간 지속된 전파를 통해 유학이 융성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76]에 들어와서는 주희의 사서학(四書學)이나 이기심성(理氣心性)의 철학에 대한 왕성한 학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잔 승려 출신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와 그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567]에 의해 일본 주자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즉,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은 후지와라 세이카와 하야시 라잔에 의해 근세 주자학의 기초가 마련되면서 막부의 관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에도 초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와 하야시 라잔의 주자학 수용과 학문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후지와라 세이카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는 18세 때 교토 고잔의 소코쿠지[相國寺]의 승려가 된 후 주자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30세 때 (1590)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잠(許箴) 등과 교류하면서 주자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세키가하라[關が原] 전투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주자학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후지와라가 사상적으로 불교나 하카세가와 대립하면서 주자학으로 전향하게 된 데에는 송(宋)·원(元) 및 조선에서 출판되어 일본에 유입된 서적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서적들 중 상당 부분은 임진왜란(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당시 조선에서 가져간 것들이었다. 또,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 억류되었던 퇴계학파의 학자 강항(姜沆, 1567~1618)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후지와라는 처음으로 유학자로 독립한 사람이었지만, 주자학을 신봉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 역시 수용할 만큼 표용적인 학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상적 뿌리였다고 할 수 있는 불교에 대해서는 인륜을 도외시하는 사상이라 하여 크게 배척하였다. 후지와라는 주자학 초창기의 학자로서 시정(市井)에 은거하면서 철저한 공부를 함으로서 고잔 선승의 교양이었던 유학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켜 경학파(京學派)를 탄생시켰다. 또 그의 문하에서 하야시 라잔을 비롯하여 기요하라 히데타카[淸原秀賢], 마츠나카 세키고[松永尺五], 나와 카쇼[那波活所], 호리 쿄안[堀杏庵] 등 여러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2) 하야시 라잔
후지와라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하야시 라자[林羅山]은 교토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13세 때 선문(禪門)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가 3년 후에 하산하여 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야시는 후지와라와 마찬가지로 고잔 전래의 문학과 사학을 배웠고 기요하라 노부타가[淸原宜賢, 1474~1550]의 유학과 신도학을 흡수했으며, 후지와라 등의 유학자들을 만나면서 점차 주자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후지와라가 양명학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비해 하야시는 양명학을 엄격히 배척하면서 오로지 주자학만을 신봉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 때문에 한때 후지와라와 의견 대립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22세 때인 1603년 후지와라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이후 1605년 후지와라의 추천을 받아 막부의 문교정책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었으며, 1607년에는 시노부오카[忍岡]의 린테가숙[林家家塾]에 강습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자학은 1634년 막부의 교학으로 확정되었다.
하야시는 막부에서 활동하면서도 지속적인 학문 활동을 통해 중국과 조선·일본의 사학(史學)·문학·본초학(本草學)·병학(兵學)·신도학(神道學) 등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는 등 박학다식한 면모를 보였다. 그에 따라 그의 학문의 목적도 폭넓은 교양을 갖춘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에도 시대의 주자학은 ‘경학파(京學派)’ 또는 ‘경사학파(京師學派)’라고 하는 후지와라·하야시 계열이 주류를 이루면서 근세 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 각주 324)
    에도시대 초기의 주자학 수용에 관한 내용은 성해준(2003), 「일본 주자학의 전래와 수용」 『남명학연구』 15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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