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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조선

문물·제도의 정비와 성리학 연구 심화

1. 조선 : 문물·제도의 정비와 성리학 연구 심화

1) 건국 초기의 성리학 : 정도전과 권근
건국 초기 조선의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권근(權近, 1352~1409)을 들 수 있다. 정도전은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心氣理)」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저술을 통해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정립하고 그 기반 위에서 강력한 불교 비판을 전개하였다. 또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등과 같은 경세학 저술도 지어서 새나라 조선의 틀을 설계해 나갔다. 권근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이라는 성리학 입문서를 지어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을 도설(圖說)로 정리했으며, 또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여 성리학적 관점에서 오경(五經)의 의미를 해석하였다. 『오경천견록』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경전 주석서이다. 한편, 권근은 태종대 이후 조선의 문교(文敎) 정책을 총괄하면서 권학사목(勸學事目) 건의, 삼관(三館)의 학식(學式) 제정 및 시행 등을 추진하여 관학 진흥에 힘썼다. 권근의 문교 정책은 이후 변계량(卞季良) 등에 의해 계승되어 15세기 관학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두 사람은 고려말에 수용된 성리학의 기반 위에서 여러 저술들을 남기고, 또 관료로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15세기 성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본 절에서는 정도전과 권근 두 사람의 성리학 이해를 천인관계론(天人關係論)과 윤리관의 두 측면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성리학적 ‘천인관계론’의 수용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된 이후 여말선초의 학자들은 하늘을 주재자(主宰者)로 보는 한대(漢代)의 천관(天觀)에서 탈피하여 하늘을 천리적(天理的)·이법적(理法的)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천인관계에서 인간의 주체적 역할이 보다 강조되었다. 정도전과 권근도 예외는 아니어서, 두 사람은 모두 성리학적 천관에 기초한 천인관계론(天人關係論)을 피력하였다.
정도전은 만물의 근원인 리가 천지만물에 선행하는 태극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동시에 천지만물의 자연 질서 속에 두루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체와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을 선기옥형(璇璣玉衡)으로 측량할 수 있고 24절기를 정확하게 분할할 수 있는 것은 이법적인 존재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정도전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바른 기를 얻어 태어난 것이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또 “성(性)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 나는 리로서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라고 규정하였다. 즉, 인간이 하늘의 리와 기를 받아 태어난 존재임을 강조한 것으로, 이는 그가 하늘과 사람을 같은 리와 기를 지닌 동일체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권근 역시 하늘과 사람이 리와 기를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양자를 동일체로 인식하였다. 그는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의 「예운(禮運)」에서 사람이 하늘의 리와 기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 「악기(樂記)」에서도 성(性)은 인심(人心)이 받은 바의 천리(天理)이며 사람 마음의 이치가 곧 하늘의 리와 사람의 성(性)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늘과 사람이 합일(合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도전과 권근은 하늘과 사람의 동일체 인식에 기초하여 하늘과 사람의 상관관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정도전은 사람의 마음이 바르며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시도 순해지며, 따라서 천지의 재해와 상서(祥瑞)는 모두 인사(人事)의 득실(得失)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견 한 대의 천인감응론과 비슷한 논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도전은 하늘이 주재자로서 인사에 직접 지시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음양오행의 기가 어그러져 나타나는 재이를 정치 자세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인간의 의지적인 도덕 실천과 군주의 수덕, 즉 인간의 주재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 점에서 정도전의 천관은 성리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근 역시 정도전과 마찬가지로 천인관계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실현 여부는 사람이 그 마음의 사욕을 제거하여 인심의 바름을 얻을 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그는 재이(災異) 현상도 하늘의 경고가 아니라 기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인 자연현상일 뿐이며, 이 또한 인사를 바르게 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 실천윤리의 강조
고려말 성균관을 중심으로 정착된 성리학은 지경(持敬) 위주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원나라 허형(許衡)의 노재학풍(魯齋學風)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성균관에서 성장했던 정도전과 권근도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을 보였다. 다만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차이를 보이는데, 즉 정도전이 불교 배척의 측면에 강조점을 두었던 반면 권근은 가정 윤리의 확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정도전은 ‘인간이 타고난 천리(天理), 즉 천성(天性)을 실현하는 것’을 윤리로 규정하였다. 특히 그는 인(仁)이 모든 도덕규범 가운데 으뜸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과 오륜(五倫)도 기본적으로 인을 바탕으로 해서 나타나는 작용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도전이 강조한 윤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인을 실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그는 윤리를 실천함에 있어서 마치 물이 흐를 때에 가까운 웅덩이부터 차례로 채워나가듯이 부모를 1차 대상으로 하고, 그 다음에 점차 다른 사람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윤리의 실천을 중시하였고, 바로 이 점에 근거하여 불교를 반인륜적인 사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가 짐승이나 곤충, 굶주리고 헐벗은 남에게는 보시(普施)라 하여 은혜를 베풀면서도 부자·부부·군신 등의 인륜은 ‘가합(仮合)’으로 규정하여 끊어버리고자 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불교는 천륜(天倫)을 무시함으로써 국가·사회·가족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반인륜적 사상이라는 것이 정도전 불교 비판의 핵심이었다.
권근은 가정 윤리를 바르게 하는 것이 인도(人道) 확립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권근은 가정 윤리 중에서 ‘효(孝)’를 가장 중시하였으며, ‘효’의 정신이 발현되는 예제로서 제사(祭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그는 자신의 선조인 권보(權溥)·권준(權準)·이제현(李齊賢) 등이 지은 『효행록(孝行錄)』주 320
각주 320)
『효행록(孝行錄)』은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이자 권근의 증조부인 권보(權傅)가 아들 권준(權準), 사위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편찬한 책으로,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62인의 행적이 글과 그림, 찬(讚)으로 정리되어 있다. 권보가 85세 되던 해에 권준이 아버지를 위해 24인의 효행(孝行) 설화를 그림으로 그린 다음 이제현의 찬(讚)을 받아 책으로 만들어서 권보에게 올렸고, 여기에 권보가 다시 38인의 효행 설화를 추가하고 역시 이제현의 찬을 받아서 최종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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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석을 붙여서 간행·보급하는 등 효 윤리의 실천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2) 15세기 관학의 문물·제도 정비 : 집현전
15세기는 새로이 건국된 조선이 국가로서의 문화적·제도적 틀을 확립해 나가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 조선의 관학(官學)은 정도전, 권근 등의 이전 선배들의 성리학을 이론적인 측면에서 연구했던 것과는 달리, 선배들이 정립한 이론을 어떻게 현실의 문물·제도 정비에 반영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이 시기 관학의 학문은 이른바 고제(古制) 연구, 즉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 및 고려의 문물·제도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에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세종대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이다.
집현전은 관학의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1420년(세종 2)에 설치된 학술 연구 기관이다. 집현전의 활동은 경연(經筵), 고제 연구, 서적 편찬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종은 집현전을 자신의 정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두뇌집단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세종은 집현전 관원들이 경연을 전담하게 한 다음, 경연에서의 토론 과정을 통해 유교적 이념에 기반한 덕치(德治) 실현과 학문의 정치적 실용을 중시하는 자신의 통치철학과 학문경향을 집현전 관원들에게 관철시켜 나갔다.
집현전의 고제 연구는 1428년(세종 1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주로 중국 당 역대 왕조들의 제도를 연구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히 중시되었던 것은 당(唐)과 송(宋)의 제도였다. 당시에는 집현전 외에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등에서도 고제 연구를 실시하였다. 예조와 의례상정소의 연구가 제도의 큰 틀을 확립하는 것에 집중되었다면, 집현전의 고제 연구는 의례·제도의 세부적인 문제들이나 국정 운영 과정에서 수시로 당면하는 정치·제도적 문제 해결에 참고하기 위한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집현전의 고제 연구 결과는 각종 보고서와 서적의 편찬으로 이어져 수많은 서적들이 발간되었다. 특히 편찬 서적의 분야가 유학·예제·정치·역사·과학·의학·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어서 학문의 정치적 실용을 중시하는 학풍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집현전 관원들은 경연과 고제 연구, 서적 편찬 등의 사업을 수행하면서 공동 연구와 토론을 통해 학자들간에 합일되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또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도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학술 활동의 공동 시행은 집현전 관원들이 공통의 학문 경향을 갖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집현전 관원들은 경세학의 관점에서 성리학을 이해하였으며,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시대적 과제의 실현을 위해 역사학·기술학 등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학문이 정치에 발현되는 것은 문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문장의 역할을 중시하는 입장을 보였다. 또,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와 관료 정치의 확립을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관료는 학문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420년에 설치되어 1456년(세조 2) 혁파될 때까지 37년간 존속했던 집현전은 비록 그 존속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신숙주(申叔舟)·서거정(徐居正)·양성지(梁誠之)·정인지(鄭麟趾) 등 수많은 관료형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이후 성종대까지 정계와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문선(東文選)』 등으로 대표되는 15세기 문물·제도 정비의 완성을 주도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집현전이 조선의 학계와 정계에 끼친 영향이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3) 16세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 심화
(1) 성리학규범 실천과 도학정치 추구
15세기 관학의 학자들은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에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세조~성종대에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였고, 그 결과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보수화되면서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중앙 정계에 새로이 진출한 신진 관료들은 기성 관료들의 도덕적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성리학적 윤리 규범의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주 321
각주 321)
15~16세기 정치사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15세기 후반 이후 기성관료들의 정치·사회적 폐단을 비판하며 새롭게 등장한 신진 관료·학자들을 ‘사림(士林)’이라는 용어로 범주화하였다. 그리고 이에 상대하여 15세기에 활동했던 기성의 학자·관료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훈구(勳舊)’라는 용어로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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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사림(士林)’이라고 하는 신진 관료·학자들이 ‘훈구(勳舊)라고 불리는 15세기 관학자들에 비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깊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성 관학자들이 문물·제도 정비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여타의 학문·사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반면, 15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신진 관료·학자들은 성리학의 원칙과 규범만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15세기 말 성종~연산군대에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그의 문인인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등이 신진 세력이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관료의 도덕성을 중시하였으며, 이를 위해 수신(修身)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소학(小學)』을 철저히 학습하고 『소학』에 담긴 성리학의 윤리와 규범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을 만큼 『소학』의 규범을 궁리하고 실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굉필은 『소학』의 규범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인격의 기초가 확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신념을 교육의 기본 원칙으로 강조하였다.
연산군대 두 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잠시 위축되었던 ‘사림’의 활동은 중종대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신진 관료들의 등장과 함께 다시금 활발해졌다. 김굉필의 문인인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과 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했던 인물로, 특히 개인적 차원의 윤리 실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정치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이른바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조광조는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왕이 성리학의 규범을 체질화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경연(經筵)을 통한 국왕의 성리학 학습과 수신(修身)을 강조하였다. 또, 그는 불교·도교 등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철저히 배격했으며, 성리학 규범의 사회적 확산을 위해 향약(鄕約) 실시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소학』 등의 보급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도학정치를 지지해 줄 인물들을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라는 관리 선발 제도를 실시했으며, 기존 공신들 중에서 실제 공적이 없는 이들을 가려내서 공신책봉을 취소하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였다.
이상과 같은 조광조의 개혁은 ‘훈구’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파가 처형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선조대 이후 ‘훈구’가 도태되고 이른바 ‘사림정치(士林政治)’가 본격화되면서 조광조가 추진했던 도학정치의 정신과 정책들은 ‘사림’에 의해 계승되었다.
(2) 성리학 연구 심화와 학파 형성
15세기 말~16세기 초 ‘사림’의 등장과 더불어 성리학적 규범의 실천이 강조되었던 조선의 성리학은 16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학풍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윤리적 실천의 측면을 강조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성리철학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단계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16세기 중반 명종·선조대의 조선 학계에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이들을 예로 들어 보면, 영남에서는 경주의 이언적(李彦迪), 안동의 이황(李滉), 합천의 조식(曺植) 등이 활동하였고, 호남에는 정읍의 이항(李恒), 장성의 김인후(金麟厚), 광주의 기대승(奇大升) 등이 있었으며,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서경덕(徐敬德),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이 학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각각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비롯한 성리학의 주요 이론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나름의 학설을 정립했으며, 때로는 학자들 간에 치열한 이론 논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 사이에 벌어졌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상의 여러 성리학자들 중 학문·사상적인 면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고 또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1501~1570)은 주희(朱熹)의 학설을 충실히 수용하고 연구함으로써 조선 학계에서 주자성리학이 주류 사상으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입장에서 이(理)와 기(氣)가 서로 작용한다는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하여 근원적 존재로서의 理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황의 입장에서 볼 때 불의(不義)가 의(義)를 핍박하는 16세기 전반의 외척정치(外戚政治)와 사화기(士禍期) 속에서 악(惡)에 매몰될 수 없는 선(善)의 절대적 가치와 근원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깊이 연구하여 그 결과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차하였다. 또, 송대(宋代) 이후 중국의 유학사를 도통론(道統論)의 입장에서 정리한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한글로 번역한 『사서삼경석의(四書三經釋義)』, 성리학의 입장에서 성학(聖學, 국왕학)의 핵심을 도설(圖說)로 정리한 『성학십도(聖學十圖)』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한편, 이황은 주자성리학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불교나 노장(老莊) 사상은 물론 같은 유학이라 할지라도 주자학적 기반에서 벗어난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단으로 강력하게 배척하였다. 이황의 학문은 이후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등 영남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이(1536~1584)는 일생의 대부분은 관료로 활동하면서 당시 정치·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개혁하기 위한 경장론(更張論)을 제시했는데, 그의 성리학 연구는 경장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작용의 원인이 되는 이(理)의 주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기(氣)라고 인식하여, “기(氣)가 작용하고 이(理)는 작용하는 기(氣)를 타고 있을 뿐”이라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입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기(氣)의 측면, 즉 정치·사회·경제의 모순들에 대한 개혁을 통해 새로운 변혁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초등교육을 위한 교과서인 『격몽요결(격몽요결(擊蒙要訣))』, 사서(四書)를 한글로 번역한 『사서언해(四書諺解)』 『소학(小學)』을 주석한 『소학집주(小學集註)』, 군주성학(君主聖學)의 지침을 제시한 『성학집요(聖學輯要)』, 성리학의 보편적 정치원리와 조선의 정치현실에 대한 나름의 진단 및 해결책 등을 제시한 『동호문답(東湖問答)』 등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경세론을 피력하였다. 이와 같은 이이의 학문은 이후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 기호(畿湖) 지역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황과 이이 외에 16세기 학자들 중에서 주목해 볼 만한 인물로는 서경덕과 조식을 들 수 있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개성 지역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했던 서경덕(1489~1546)은 조선의 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氣)를 중시하는 소옹(邵雍)·장재(張載) 계통의 학풍을 수용하여 우주 만물의 근원을 기(氣)로 인식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였다. 또, 그는 개성이라고 하는 지역적 특성의 영향으로 상공업을 중시하였고 다른 사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피력하였다.
합천·산청·진주 등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식(1501~1572)은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평생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고 山林의 處士로 자처하며 연구와 교육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일상에서 경(敬)으로써 내면의 심성을 수련하고 의(義)로써 외면의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고원(高遠)한 성리철학의 탐구에 몰두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면서 배운 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상과 같이 16세기 중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나름의 이론적 기반을 정립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활동 지역에서 교육활동에 전념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에 이르며, 지역별로 유력 학자들의 문인·제자들이 결집해서 하나의 학파(學派)를 형성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먼저 영남에서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좌도(慶尙左道)에서 이황의 학풍을 따르는 ‘퇴계학파(退溪學派)’가 형성되었다. 또, 서울 지역에서는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따르는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등장하였으며, 개성 일대에서는 서경덕의 학풍을 계승한 ‘화담학파(花潭學派)’가 나타났다.
학파의 형성에 따라 각 학파의 종장(宗匠)이 되는 이황·이이·조식·서경덕의 학문은 그 제자들에게 계승되었고, 성리학 이론에 대한 연구도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학파들은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학파 간의 학문적 입장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경세(經世)의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즉, 학문적 차이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에 등장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바로 학파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정파(政派)의 분립으로 이어지면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이상과 같이 16세기에는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사승(師承) 관계가 형성되면서 학문적·사상적 입장을 같이하는 학자들이 하나의 학파로 결집하였다. 그 결과 성리학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진전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성리학 연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유가 경서에 대한 언해(諺解)와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典)』에 대한 연구였다. 전자는 유가 경전에 대한 한글번역을 통해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표준 해석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후자는 주희 학문의 정수(精髓)를 담은 『주자대전』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주자성리학이 조선 학계의 주류 사상으로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경서언해’의 추진
‘경서언해(經書諺解)’는 경전의 원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유가 경전의 올바른 해석 지침을 세우기 위해 일찍부터 경서 언해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정확한 언해를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구결(口訣)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결은 한문 원문의 구두점 위치에 한글 또는 한자의 차자(借字)호 토(吐)를 붙이는 것으로 ‘현토(懸吐)’라고도 한다. 구결은 한문과 우리말 사이의 언어 간격을 좁히기 위한 독특한 한문 독해법으로, 구결이 경문의 뜻을 규정하여 올바른 경서 해독의 지침이 된다. 경서에 구결을 붙이고 언해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에 따른 경서 해석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경학 및 성리학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했다. 따라서 구결과 언해는 당시의 경학 및 성리학 이해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경서에 대한 구결과 언해는 이미 15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15세기에는 구결이 중심이었다면 16세기에는 기존 구결의 성과를 바탕으로 언해를 추진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먼저 15세기에는 권근이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등의 경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또, 세조대에는 왕명에 따라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서오경에 대한 새로운 구결 작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5세기 경서 구결의 결과물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현전하는 경서의 구결과 언해는 모두 16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이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황(李滉)의 『사서삼경석의(四書三經釋義)』, 유희춘(柳希春)의 『대학』과 『논어』에 대한 언해, 이이(李珥)의 사서(四書) 언해, 그리고 선조대 교정청(校正聽)에서 편찬·간행한 경서 언해 등이 있다.
이황의 『사서삼경석의』는 주자학적 입장에서 경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시하려는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다. 대략 1550년경 구결과 언해가 완성되었으며 간행은 1609년(광해군 1)에 이루어졌다. 사서삼경 중에서 중요하면서도 잘못 해석되고 있거나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선별하여 언해하였고, 오역(誤譯)의 사례와 올바른 해석 및 그 근거를 함께 보여주었다.
유희춘은 1574년(선조 7) 선조의 명을 받아 경서 언해에 착수하여 『대학』과 『논어』의 언해는 완성하였지만, 나머지 경서 언해의 완성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유희춘은 당시 학계의 공론을 수렴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으로 언해를 시도했는데, 그 결과 『대학석소(大學釋疏)』의 경우 선조나 다른 학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이는 1575년 선조의 명을 받아 사서의 소주(小註)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사서에 대한 언해에 착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언해 과정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이이의 언해 결과물은 그 제자들에 의해 필사본으로 전수되다가 숙종대 학자 박세채가 해주에서 입수한 『중용언해(中庸諺解)』 수택본(手澤本)을 기준으로 수정·보완하여 1749년(영조 25)에 간행되었다.
한편 선조는 1585년(선조18) 경서언해교정청(經書諺解校正廳)을 설치하고 여러 학자들을 모아『소학』과 사서삼경의 언해 작업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587년 『소학언해(小學諺解)』, 1588년 7월 사서삼경에 대한 언해가 완성되었고, 또 1589년에는 홍문관에서 『효경언해(孝經諺解)』를 편찬하였다. 이중에서 삼경의 언해는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어 전란 이후 다시 편찬·간행하였다. 교정청의 경서 언해는 동인(東人, 영남학파(嶺南學派))이 언해 작업을 주도하면서 이황의 『사서삼경석의』를 많이 수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고려말 이래로 지속되어 왔던 경서 구결과 언해의 노력이 일단락되어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4) 『주자대전』 연구와 주자서 간행
16세기 조선 학계의 연구 동향에서 주목할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텍스트로 하는 주자학 연구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주희의 문집인 『주자대전』은 총 121권에 달하는 거질의 책으로 고려말부터 부분적으로 그 내용이 우리나라에 알려졌으나, 전질이 공식적으로 처음 수입된 것은 1518년(중종 13)이다. 당시 사은사로 북경에 갔던 김안국(金安國)이 『주자대전』 『주자어류(朱子語類)』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구입해 옴으로써 『주자대전』의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에서 새로운 판본의 『주자대전』이 간행될 때마다 지속적으로 수입하였으며, 수입된 판본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자대전』을 다시 간행하였다.주 322
각주 322)
현재까지 파악된, 조선에서 간행된 『주자대전』 판본은 중종대의 활자본(1543), 선조대의 활자본(1575), 인조대의 목판본(1635), 영조대의 목판본(1771) 등이 있다. 조선에서의 『주자대전』 간행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문식(2007), 「조선본『朱子大全』의 간행과 활용」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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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대전』은 학자들로부터 주희의 학문과 실천이 가장 잘 드러나는 서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주자학 연구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경연과 서연에서도 중요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의 학자들은 단순한 학습에만 그치지 않고 『주자대전』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실시하였다. 조선 학자들의 『주자대전』 연구는 선본(選本) 편찬과 교감 및 주석 편찬 등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연구의 효시가 바로 이황이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이다.
이황은 1543년(중종32)에 『주자대전』 간행을 위한 교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주자대전』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 때 『주자대전』의 내용에 큰 감명을 받은 이황은 벼슬을 사직하고 『주자대전』 연구에 전념하였다. 특히 이황은 주희 학문의 정수가 『주자대전』에 수록된 그의 서간문에 담겨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는 『주자대전』의 서간문 1,700여 편 중에서 주희의 학문과 출처(出處)를 잘 보여주는 편지 1,008을 선별하여 편집·정리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자서절요』이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각 권의 서두에 주희의 편지를 받은 인물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한 ‘제자목록(諸子目錄)’을 수록했고, 편지의 제목 아래에 그 편지가 작성된 배경을 기록했으며, 또 서간의 끝에는 본문의 어려운 구절에 대한 주석도 수록하였다. 이황의 『주자서절요』는 1558년(명종 13)에 편찬되어 1561년에 활자로 처음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인쇄·보급되면서 주자학 연구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주자서절요』로부터 비롯된 『주자대전』의 선본(選本) 및 주석(註釋) 편찬의 흐름은 이후의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먼저 영남학파에서는 『주자서절요』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과 『주자서절요기의(朱子書節要記疑)』, 정경세(鄭經世, 1563~1632)가 『주자대전』에서 서찰 이외의 글 중 긴요한 것을 선별·정리한 『주문작해(朱文酌海)』, 이재(李栽, 1657~1730)와 이상정(李象靖, 1710~1781)이 『주자서절요강록』을 보완한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 이상정이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중요내용을 선별·정리한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이 『주자서절요』를 재편집한 『주절휘요(朱節彙要)』 등이 편찬되었다.
기호학파에서는 조익(趙翼, 1579~1655)이 『주자서절요』를 재편집한 『주서요류(朱書要類)』와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주자대전』에 누락된 유문(遺文)들을 모아 편집한 『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송시열(宋時烈, 1606~1689)이 손자 송인석(宋麟錫, 1650~1692)과 함께 『주자서절요』와 『주문작해』를 통합하여 정리한 『절작통편(節酌通編)』, 그리고 송시열이 『주자대전』 전체를 주석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및 이에 대한 일련의 보완 저술들이 편찬되었다.주 323
각주 323)
송시열이 『주자대전차의』를 편찬한 이후, 서인(西人) 학계에서는 이를 보완한 저술들이 꾸준히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창협(金昌協)·어유봉(魚有鳳)의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 이의철(李宜哲)의 『주자대전차의후어(朱子大全箚疑後語)』, 이항로(李恒老)·이준(李埈) 부자의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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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이황으로부터 시작된 『주자대전』 연구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양쪽으로 모두 계승되어 조선시대 주자학 연구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 각주 320)
    『효행록(孝行錄)』은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이자 권근의 증조부인 권보(權傅)가 아들 권준(權準), 사위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편찬한 책으로, 효행으로 널리 알려진 62인의 행적이 글과 그림, 찬(讚)으로 정리되어 있다. 권보가 85세 되던 해에 권준이 아버지를 위해 24인의 효행(孝行) 설화를 그림으로 그린 다음 이제현의 찬(讚)을 받아 책으로 만들어서 권보에게 올렸고, 여기에 권보가 다시 38인의 효행 설화를 추가하고 역시 이제현의 찬을 받아서 최종 완성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21)
    15~16세기 정치사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15세기 후반 이후 기성관료들의 정치·사회적 폐단을 비판하며 새롭게 등장한 신진 관료·학자들을 ‘사림(士林)’이라는 용어로 범주화하였다. 그리고 이에 상대하여 15세기에 활동했던 기성의 학자·관료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훈구(勳舊)’라는 용어로 지칭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22)
    현재까지 파악된, 조선에서 간행된 『주자대전』 판본은 중종대의 활자본(1543), 선조대의 활자본(1575), 인조대의 목판본(1635), 영조대의 목판본(1771) 등이 있다. 조선에서의 『주자대전』 간행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문식(2007), 「조선본『朱子大全』의 간행과 활용」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참조. 바로가기
  • 각주 323)
    송시열이 『주자대전차의』를 편찬한 이후, 서인(西人) 학계에서는 이를 보완한 저술들이 꾸준히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창협(金昌協)·어유봉(魚有鳳)의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 이의철(李宜哲)의 『주자대전차의후어(朱子大全箚疑後語)』, 이항로(李恒老)·이준(李埈) 부자의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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