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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북송대 성리학의 정립

2. 북송대 성리학의 정립

1) 천관의 변화주 310
각주 310)
북송대 천관 변화에 관한 내용은 토가와 요시오[戶川芳郞] 외·조성을·이동철 공역(1990), 『유교사』 (이론과 실천), 262~269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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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회였다. 하지만 이때의 ‘천(天)’은 시대마다 그 개념을 달리하였는데. 크게 보면 동중서(董仲舒) 등이 주장한 한대(漢代)의 천관과 북송 이후 성리학의 발흥과 함께 등장한 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대(漢代)의 천관은 하늘을 주재자적 성격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와 같은 천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동중서는 하늘이 덕(德)이라는 법도를 가지고 인간 사회를 주재한다는 고대의 천 인식을 수용하여 인격적·주재자적 천의 개념을 확립하였고, 이에 근거하여 천명을 받은 ‘군주=천자(天子)’의 권위를 절대화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하여 군주의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지배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천인감응설은 천지가 만물을 생육하는 것을 덕으로 삼기 때문에 군주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주재자로서의 천은 재이(災異)를 통해 군주에게 경고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천지의 재이를 군주의 어떤 구체적 행적에 대한 견책(譴責)으로 간주하는 ‘천견사응설(天譴事應說)’로 발전하였다.
이상과 같은 한 대의 천관은 북송대 성리학의 발흥과 함께 변화하였다. 즉, 군주의 실정에 견책을 내리는 천견적(天譴的)·주재자적 천에서 천리적(天理的)·자연적 천으로 인식의 전환이 나타난 것이다. 송대의 성대학자들은 천을 항상적인 법칙을 가지고 운동하는 자연 현상으로 인식하였고, 천의 항상적인 법칙을 ‘천리(天理)’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자연 법칙으로서의 천리가 한편으로 현실의 정치적 질서 및 인륜·도덕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구양수(歐陽脩, 1007~1072) 등에게서 보이는 천견사응설의 부정이다.
천견사응설이 적용된 예를 보자면, 『구당서(舊唐書)』 「오행지(五行志)」에서 영휘(永徽) 원년에 일어난 지진은 황제가 총애하는 궁녀가 정사에 간섭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한 북송의 학자 구양수는 이와 같은 사응설(事應說)을 비판하면서 “재이는 기록하지만 그 사응(事應)은 삭제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구당서』의 천견사응에 관한 기록을 모두 삭제하였다. 즉, 그는 재이 현상에 대해 위정자는 다만 공구수성(恐懼修省)할 뿐이지, 그것을 개별적인 행적에 결부시키는 것은 그 행적만 고치면 재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 오히려 군자로 하여금 태만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재이 현상을 하늘의 구체적인 지도 행위로 보는가 아니면 위정자의 정치 자세에 관련된 것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다. 북송 성리학자들의 천관은 바로 후자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재이현상을, 하늘의 지도에 대한 수종이 아니라 공구수성이라는 이가의 주체적 행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곧 사람을 정치와 윤리 실천의 주체로 간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의(天意)의 실현이란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늘의 이법(理法),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오륜(五倫)으로 대표되는 도덕적·정치적 당위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북송대 나타난 성리학적 천관은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천관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2) 사서의 중시
북송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한(漢)·당(唐)의 경학(經學)을 극복하고 ‘주공(周公)→공자(孔子)→맹자(孟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正統)을 직접 계승했다는 도통론적(道統論的) 자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한·당대의 경학과 준별하는 경전적 근거로서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의 사서(四書)를 중시하였다.
당대(唐代)까지의 유학에서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이 중시되어 태학(太學)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반면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에서 경전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오경과 동등시되지는 못했고, 『맹자』는 제자서(諸子書)의 하나로 인식되었으며,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에 불과하여 학자들로부터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서가 중시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대 성리학이 정립되면서부터였다.
사서 가운데 특히 성리학 이전의 유학과 준별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것은 『대학』과 『중용』으로, 송대의 학자들은 『대학』과 『중용』을 『예기』로부터 독립시켜 독자적인 경저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대학』은 학문과 인륜(人倫)의 근본을 수록한 책으로 중시되었다. 정호(程顥)는 『대학』을 공자의 유서(遺書)로 규정하면서 이 책을 따라서 학문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정이(程頤)도 『대학』을 ‘입덕(入德)의 문’이라 하여 성리학의 입문서로서 중시하였다. 정이·정호의 『대학』 인식을 계승한 주희는 『대학』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을 확립하고 경문(經文)을 보완·교정하여 ‘경일장(經一章) 전십장(傳十章)’ 체재로 『대학』을 새롭게 재편하였다. 그 결과 『대학』은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윤리·질서 확립, 그리고 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학문 수련과 인간 내면의 윤리적 수양을 제시한 경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중용』은 성리 철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천리(天理)’ ‘천명(天命)’ ‘성(性)’ ‘도(道)’ ‘심(心)’ 등과 같은 성리학의 주요 개념들과 ‘존덕성(存德性)’ ‘도문학(道問學)’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수양론·학문관 등에 대한 이론들이 바로 『중용』에 기반을 두고 정립되었다. 한편, 『맹자』의 경우에도 맹자(孟子)가 주장한 성선설(性善說)이 북송의 성리학자들에게 유교적 심성론의 기초로서 받아들여지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논어』 『맹자』 『중용』은 이전 시대에 비해 그 위상이 크게 높아졌고 ‘사서(四書)’로 한데 묶여서 중시되었다. 이와 같은 사서 중시의 학풍은 남송으로 이어져 주희가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비롯한 사서의 주석서를 저술한 것에서 절정이 이르렀다. 그에 따라 사서는 기존 오경의 권위를 뛰어넘어 유가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즉, 성리학은 이른바 ‘사서학(四書學)’의 수립을 통해 한·당의 경학과 구분되는 새로운 경학 체계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3) 북송의 주요 성리학자들
(1) 주돈이
주돈이(周惇頤, 1017~1073)는 원래 이름이 주돈실(周惇實)이었으나 송나라 영종(英宗)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돈이(惇頤)’로 바꾸었다. 20세 때인 1036년에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간 이래로 55세에 사직할 때 까지 30여 년간 관료로서 활동하였는데,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주로 지방 관리나 형옥(刑獄)에 관련된 직임을 담당하였으며, 소송이나 옥사(獄事)를 잘 처리한다는 평을 받았다. 한편, 남안군사리참군(南安軍司理參軍)으로 재직 중이던 1046년(30세)에 남안태수(南安太守) 정향(程珦)의 두 아들이 주돈이에게 와서 사사(師事)했는데, 이들이 바로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였다.
주돈이는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서 『태극도(太極圖)』 『역통(易痛)』 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이 중에서 『태극도』는 주희의 해석을 통해 성리학적 우주 생성론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갖는 저술이다. 본래 주돈이의 『태극도』는 도가(道家)의 『태극선천지도(太極先天之圖)』를 차용한 것이며, 따라서 그의 우주 생성론은 도가의 흐름을 흡수한 것이었다.
도가적 우주론의 영향을 받은 주돈이의 『태극도』가 성리학적 이론 정립의 기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남송의 주희가 『태극도』의 ‘무극(無極)’ ‘태극(太極)’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성리학 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기(理氣) 세계관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즉, 주희는 『태극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태극을 기(氣)의 원초적인 발현 상태로, 무극을 이(理)로 대체함으로써 태극에서 발현되는 기의 운동·생성 및 그 근원으로의 이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바로 이점이 북송대 성리학의 정립 과정에서 주돈이의 『태극도』가 갖는 사상적 의의라고 할 수 있다.
(2) 장재(張載)
장재(1020~1077)는 관료 가문 출신으로, 조숙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병서(兵書)를 탐독했다고 한다. 21세(1040) 때 범중엄으로부터 유가의 학문에 힘쓸 것을 권고 받은 수 『중용(中庸)』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후 육경(六經)을 차례로 읽었으며, 다른 학문·사상은 모두 배척하고 오직 유학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 결과 장재의 학풍은 지극히 순수하게 유가적이었으며, 이 점에서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주돈이와 대비된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정몽(正蒙)』 『서명(西銘)』 『경학이굴(經學理屈)』 등이 있다.
장재는 1057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근본을 돈독히 하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것[敦本善俗]”을 정치의 급선무로 삼아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교화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반면, 왕안석이 주도하던 신법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이 때문에 지방으로 좌천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관중(關中) 지방으로 좌천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관중(關中) 지방으로 돌아와 육경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장재의 학문은 ‘관학(關學)’으로 불리면서 정이·정호 형제의 낙학(洛學), 왕안석의 신학(新學)과 함께 북송 학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장재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주희가 이(理)를 우주 생성의 근원으로 이해한 것과는 달리, 기(氣)를 근원으로 간주했으며, 이점에서 주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재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언설은 이후 주희에 의해 불교의 심성론이나 육상산(陸象山)의 심학(心學)과 구별되는 성리학의 인간관과 도덕관의 근거로 수용되었다. 또 장재가 성(性)을 ‘천지지성(天地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이원화시킨 것이나 기질의 변화 가능성을 제시한 것 등도 주희에게 수용되어 성리학적 인성론의 골격을 이루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장재는 경세론의 측면에서 정전제(井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는 『주례(周禮)』에 의거하여 정전제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토지와 재산이 많은 부민(富民)을 전관(田官)으로 임용하여 토지를 다스리게 하면 정전이 봉건(封建)으로 귀결되어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재지(在地)의 유력 지주층에게 권력의 말단을 담당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전과 봉건[분치(分治)]의 통일을 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 장재 등과 함께 북송대 성리학의 태두(泰斗)로 일컬어지는 이들이 바로 정호(1032~1085)·정이(1033~1107) 형제이다. 당시 왕안석의 신학에 대항하는 그룹은 장재의 관학(關學),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부자의 촉학(蜀學), 그리고 정호·정이 형제의 낙학(洛學)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고 낙양(洛陽)에 근거한 정호·정이 형제 그룹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정호·정이 형제의 학문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강렬한 도덕주의(道德主義)라고 할 수 있다. 정호는 “군주의 도리는 지성(至誠)과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여 위정자의 덕성 확립을 정치의 제1요체로 강조하였다. 또 정이도 신종(神宗)에게 올린 상소에서 “욕심을 구하는 마음[求欲之心]을 버리지 않으면 비록 부국강병을 달성한다 해도 그것은 실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호·정이 형제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내세운 왕안석의 신학에 반대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도덕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호·정이 형제의 도덕주의적 성향은 철학적인 면에서 ‘천리(天理)’ ‘성즉리(性卽理)’ ‘이일분수(理一分殊’ ‘존천리 멸인욕(存天理滅人欲)’ 등의 리(理)에 대한 강조로 나타났다. 각각의 개념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리’는 ‘천=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우주와 자연의 항상적인 질서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천을 유의지적인 존재에서 자연적·이법적(理法的) 존재로 인식하는 북송대 천관(天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성즉리’는 『중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성(性)이다”라는 언설에 기반하여, 천이 곧 리이므로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 또한 리가 된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하늘에서의 리가 우주·자연의 항상적인 질서인 것처럼 사람에게 성(=리)은 사회에서 반드시 비켜야 하는 인륜의 도리가 되며, 구체적으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오륜(五倫)을 의미한다. ‘이일분수’는 모든 사물이 각각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리를 개별적으로 ㄱ비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 개별적인 리는 보편의 ‘하나(一)’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한편, 정이는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이원화한 후, 본연지성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 항상 선하지만, 기질지성은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어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정이는 도덕적인 수련을 통해 인간의 욕심을 제거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순선(純善)한 본성을 항상 유지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존천리 멸인욕’이며, 여기에서 성리학의 엄격한 도덕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경학의 측면에서 정호·정이 형제는 『주역』을 매우 중시했는데, 그에 따라 정이는 『이천역전(伊川易傳)』이라는 『주역』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의리역(義理易)의 관점에서 『주역』을 해석한 대표적인 주석서로, 후대 학자들로부터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와 함께 성리학적 『주역』 해석의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또, 정호·정이 형제는 『대학』과 『중용』을 『예기』에서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같은 경서의 반열에 올려 존중하였다. 이러한 이정(二程)의 경서 인식은 남송대 주희에게 계승되어 사서(四書) 체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이상과 같이 이정의 학문은 성리학 이론의 측면과 경학의 측면 모두에서 주희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성리학은 이정(二程)과 주희의 학문, 즉 정주학(程朱學)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 각주 310)
    북송대 천관 변화에 관한 내용은 토가와 요시오[戶川芳郞] 외·조성을·이동철 공역(1990), 『유교사』 (이론과 실천), 262~269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술하였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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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대 성리학의 정립 자료번호 : edeah.d_0003_004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