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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성리학 출현의 배경

1. 성리학 출현의 배경

1) 당나라 말기 유학의 새로운 흐름
송대(宋代)에 출현한 성리학은 기존의 유학, 즉 한(漢)·당(唐)의 훈고학(訓詁學)과는 다른 차원의 유학이었고, 그에 따라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도 부른다. 이 새로운 유학의 단초는 당대(唐代) 말엽부터 서서히 나타났다. 640년[당 정관(貞觀) 14]에 공영달(孔穎達, 574~648) 등에 의해 편찬된 『오경정의(五經正義)』는 국자학(國子學)을 비롯한 각급 학교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과거 시험이 교재로 자리매김하면서 당나라 유학의 권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경정의』의 주소(注疏)가 부동의 권위를 가지고 절대화되면서 학자들이 이를 묵수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학문 연구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유학이 보수화·경직화되어 결국에는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를 거치는 동안 유학이 쇠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유학이 쇠퇴하면서 남긴 빈자리는 점차 불고와 도교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당나라 말엽부터 『오경정의』로 대표되는 기존의 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오경정의』의 주소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유교 경전을 해석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참된 문장은 도(道)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재도주의(載道主義) 문학관에 기초한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자가 바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824)였다.
한유는 사회 규범으로서의 유교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관점에서 당시 성행하던 불교를 강력하게 배척하였다. 특히 당나라 헌종(憲宗)이 석가의 뼈인 불골(佛骨)을 궁 안으로 맞아들이려 하자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표문을 올려 불교를 ‘중국의 미풍양속을 깨뜨리고 백성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오랑캐의 가르침’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한유는 「원도(原道)」 「원인(原人)」 「원성(原性)」 등의 저술을 통해 도(道)·성(性)·정(情) 등의 개념, 인의(仁義)에 기초한 사회의 계급 질서, 도통(道統)의 문제 등 송대 신유학의 주요 명제들을 서술하였다. 그 결과 한유는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다음 시대에 본격화 된 신유학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밖에도 한유의 제자로서 『복성서(復性書)』를 지어 한유가 제기한 성론(性論)에 사상적 내실을 부여하고 불교·도교에 대립하는 유교적 성론을 정립하고자 했던 이고(李翶, 772~841), 『천설(天說)』을 저술하여 전통적인 천명론(天命論)에 반대하고 하늘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를 강조함으로써 송대 신유학에서 나타난 천관(天觀) 변화의 단초를 열었던 유종원(柳宗元, 773~819) 등이 당나라 말기 새로운 유학의 흐름을 주도했던 대표자들이었다.
2) 북송 초기 ‘경력정학’
당나라 말에서 오대(五代)를 거쳐 북송 초에 이르는 시기는 ‘당송 변혁기(唐宋變革期)’라고 일컬어질 만큼 정치·사회·사상적 변동의 폭과 깊이가 매우 컸다. 이 시기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육조(六朝) 이래 지속된 문벌(門閥) 중심의 귀족 지배가 막을 내리고, 황제를 위계질서의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 중앙집권체제가 구축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귀족 계층을 대신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과거(科擧)를 통해 관료로 진출한 사대부 계층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북송 초기 과거제도의 개혁은 사대부 계층의 지속적인 관료 진출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과거제 개혁을 주도한 이는 범중엄(范仲淹, 989~1052)으로, 그는 당시 학자들의 시부(詩賦)에만 몰두하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 당나라 때에 주류를 차지했던 시부나 주소(注疏) 중심의 학문을 물리치고, 경의(經義)와 책론(策論), 즉 도덕과 경세의 방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과거제를 개혁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경의·책론을 먼저 시험하고 시부를 나중에 시험함으로써 경학과 시무에는 밝은 인재들이 시부 때문에 일찍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를 정립하였다.주 309
각주 309)
경의(經義)와 책론(策論)을 중시하는 범중엄의 과거제 개혁은 동시기의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고려 중기의 과거제는 예종·인종대의 개혁을 통해 초장(初場)에서 경의, 중장(中場)에서 논(論)·책(策), 그리고 종장(終場)에서 시부를 시험하는 것으로 정비되었다. 이는 위에서 본 범중엄의 과거제 개혁의 취지를 수용한 것으로, 고려 중기의 과거제 개혁은 시부를 경시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용적 논·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문철영(1992), 「고려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신유학」 『국사관논총』 37,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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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범중엄은 과거제의 개혁을 통해 기존의 문벌에 의존했던 유제(遺制)를 타파하고 명실공히 과거에 의한 능력 본위의 관료 등용의 길을 확립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경학과 경세제민의 시무를 중시하는 과거제의 개혁은 북송대 유학의 성격변화를 가져왔다. 즉,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대부들은 학문의 정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강렬한 경세의식(經世意識)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유학은 훈고·주소 중심의 기존 유학에서 탈피하여 의리적 관점에서 경서를 해석하고, 이를 통해 터득한 인성론과 우주론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정책을 모색하는 경세의 이데올로기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은 유학의 성격 변화는 북송대에 성리학이 출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학문적·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북송 초기에 아직 본격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정립한 것은 아니었지만, 송대 성리학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유학의 기풍을 일으킨 학자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범중엄을 비롯하여 호원(胡瑗, 993~1059), 손복(孫復, 992~1057), 석개(石介, 1005~1045) 등이 그들로, 이들은 한(漢)·당(唐)의 훈고주소학(訓詁註疏學)에 대한 비판과 이전 시대의 사상계를 지배해 온 도교와 불교에 대한 배척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와 같은 북송초기 유학의 새로운 조류는 그것이 인종(仁宗)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시작되었다고 하여 ‘경력정학(慶曆正學)’이라고 부른다.
‘경력정학’에서 사상·교육의 측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소위 ‘송초 삼선생(宋初 三先生)’이라 불리우는 호원·손복·석개 등 세 사람이었다.
호원은 젊은 시절에 태산(泰山)에서 손복, 석개 등과 함께 10여 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오중(吳中) 지방에서 경학(經學)을 강의하며 제자를 양성하던 중에 북송 초기의 개혁가 범중엄에게 발탁되어 소주부학(蘇州府學)의 교수에 임명되었고, 이후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경학 교수로 명성을 얻었다. 또, 역시 범중엄의 추천을 받아 송나라의 예악(禮樂)을 제정하였고, 태학(太學)의 수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호원은 수(隋)·당(唐)에서 유행했던 사(辭)·부(賦) 중시의 학풍과 문사(文詞)에 의한 관리 선발에 반대하면서, 경학 연구와 시무(時務)를 중시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교 교육에서 분과(分科) 교육의 시행을 주장했다. 즉, 학교에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治事齋)’를 설치해서 경의재에서는 육경(六經)을 가르치고 치사재에서는 치용학(致用學)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전자가 이론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실천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손복도 주로 태산에 거주하면서 강학(講學)에 전념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그에 따라 학자들은 그를 태산선생(泰山先生)이라고 불렀다.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 독창적인 견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삼강오륜(三綱五倫)으로 대표되는 유교의 도덕규범을 중시하였고, 인간의 도덕규범이 하늘의 자연법치과 일치한다는 인륜(人倫)과 천도(天道)의 상통(相通)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에 등장하는 성리학의 중요 원칙과 개념들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당시의 대표적인 『춘추(春秋)』 연구가로서,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 『춘추총론(春秋總論)』 등을 저술하여 『춘추』의 대의명분(大義名分)과 정치·사회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였다.
석개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부모상을 당하자 조래산(徂徠山)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 때문에 조래선생(徂徠先生)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손복이 태산에 거주할 때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석개는 이후 부필(富弼), 범중엄, 한기(韓琦) 등 당시 명재상들의 천거를 받아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 태자중윤(太子中允)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북송대 태학(太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석개는 호원, 손복 등과 함께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강력하게 비판·배척하였으며, 재도주의적 문장론을 주장하면서 한유 등의 고문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동시대에 등장했던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석개는 성(性)·정(情)·도(道)와 같은 성리학적 개념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즉,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 정을 도로써 제재하여 정이 강상윤리(綱常倫理)에 저촉되지 않도록 하고 불선(不善)의 저을 도로써 조절하여 그 정이 선한 것으로 바뀌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성리학의 핵심 이론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호원·손복·석개 등 세 사람을 중심으로 북송 초기에 나타났던 ‘경력정학’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북송위 성리학은 ‘경력정학’을 통해 그 싹이 처음 나타났고, 이후 주돈이(周惇頤)·장재(張載)·이정(二程)이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되었으며, 남송의 주희(朱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 각주 309)
    경의(經義)와 책론(策論)을 중시하는 범중엄의 과거제 개혁은 동시기의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고려 중기의 과거제는 예종·인종대의 개혁을 통해 초장(初場)에서 경의, 중장(中場)에서 논(論)·책(策), 그리고 종장(終場)에서 시부를 시험하는 것으로 정비되었다. 이는 위에서 본 범중엄의 과거제 개혁의 취지를 수용한 것으로, 고려 중기의 과거제 개혁은 시부를 경시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용적 논·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문철영(1992), 「고려중기 사상계의 동향과 신유학」 『국사관논총』 37, 71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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