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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3. 일본

13세기 후반 몽골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침략은 막부 지배체제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막부의 싯켓[執權]이던 호조씨의 지휘 아래 몽골의 침략을 막는 데 성공하였다. 외세의 침략이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본래 막부의 지배 밖에 있던 공령·장원으로부터도 군사와 물자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막부에 부여함으로써 막부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특히 싯켄 호조씨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몽골 침략을 방어하는 데 동원되었던 고케닌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군역 부담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해짐에 따라 고케닌 제도 자체가 동요하였다. 이 무렵에는 일족 간의 분할 상속에 의한 영지의 세분화가 진전되었기 때문에 고테닌의 궁핍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더욱이 몽골과의 전쟁에 들어간 전비를 스스로 부담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이처럼 막부의 권한은 강화된 반면 고케닌들은 몰락함으로써 양자 간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막부는 고케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고케닌의 토지 매매와 저당을 금지하고, 고케닌이 저당잡힌 토지는 무상으로 돌려받도록 하였으며, 고케닌의 빚에 관한 소송은 접수하지 않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하였지만, 고케닌의 몰락을 막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케닌과 중소 무사들 가운데 주변의 민중을 끌어들여 막부의 지배를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무력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막부지배를 뿌리째 흔들었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를 무시하였으므로 ‘악당(惡黨)’이라고 불리었다. 호조씨는 정치·사회적 동요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제정치를 강화하였지만, 유력 고케닌뿐 아니라 막부 내부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고케닌과 ‘악당’들의 막부 타도 움직임이 수그러들지 않자 막부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교토에 대군을 파견하였다(1333). 그런데 당시 책임자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막부를 배신하고 천황 편에 붙어 교토의 막부 거점을 함락시켰다. 또한 막부의 동요를 지켜보던 유력 고케닌 닛다 요시사다가 거병하여 가마쿠라를 함락시킴으로써 약 150년 동안 지속되었던 가마쿠라 막부는 막을 내렸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치는 새로운 천황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이대장군에 올라 막부를 열었다(1338). 이후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막부를 교토의 무로마치에 두었으므로 이를 무로마치 막부라고 한다. 한편, 다카우치에 의해 쫓겨난 고다이고 천황이 다른 무사와 ‘악당]을 기반으로 조정을 열고(남조) 무로마치 막부의 지원을 받는 조정(북조)과 대립하였다. 이후 북조와 남조의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남조의 천황이 북조 천황에게 양위함으로써 60년 만에 내란이 종식되었다(1392).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일족을 중심으로 한 유력 고케닌의 연합으로 유지되었다. 이 시기 정치의 중심은 쇼군릐 보좌역인 관령으로서, 아시카가 일족의 유력 고케닌 3씨가 교대로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인 사무라이도코로쇼시는 유력 고케닌 4씨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무사를 구니(지방의 행정구)별로 총괄하는 슈고[守護 : 군정 담당관]가 무로마치 막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슈고는 막부의 권위를 배경으로 지배 구니 내의 무사를 가신으로 삼고, 농민에게 세금과 노역을 부과하였으며, 장원에서 연공의 절반을 징수하는 등의 권한을 강화하며 슈고다이묘[守護大名]로 성장해 갔다. 슈고다이묘에게는 경제적인 대가 이외에도 사법권 같은 권한을 더 부여하였는데, 그 결과 이들이 영지 내의 사법권 및 경제권 모두를 인정받고 막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다이묘의 정치적 성장을 우려한 막부는 이들을 교토에 머물게 하면서 감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로써 교토에 머무는 슈고다이묘들은 자신들이 정한 슈고다이[守護代]를 대리인으로 삼아 본거지에 보내 간접지배를 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그런데 본거지에 내려간 슈고다이가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오히려 슈고다이묘보다도 막강해지는 경우가 생겨났는데, 이들이 15세기를 거치면서 슈고다이묘를 제압하고 본거지를 사유화하는데 성공하며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로 성장해 나갔다.
무로마치 쇼군의 전제적인 권위는 6대 쇼군이 하리마[효고 현]지방의 슈고에게 암살되는 등 차츰 약화되었다. 1467년에는 8대 쇼군의 후계 다툼과 슈고다이묘인 호소카와 씨와 야마나 씨의 대립 등으로 교토에서 전란이 일어났다(오닌의 난). 이 전쟁에는 많은 슈고다이묘가 참전하였다. 호소카와 측은 24개 구니에서 16만 명을, 야마나 측은 20개 구니에서 11만 명의 대군을 징발하여 11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 결과 교토는 불바다로 변했고, 쇼군의 권위는 실추되었으며 고대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던 조정·귀족·사찰과 신사의 힘도 쇠퇴하였다.
오닌의 난을 계기로 신분이 낮은 자가 윗사람을 실력으로 쓰러뜨리는 하극상의 풍조가 확산되어 갔다. 15세기 말경에는 막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으로 영지를 지배하는 센고쿠다이묘가 전국 각지에서 출현하였다. 센고쿠 다이묘는 하극상을 통해 지역의 지배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자신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 전쟁을 되풀이하였다. 또 유력한 가신과 상공업자를 모아 조카마치를 만들고 이를 영지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들은 치수 공사를 통하여 경지를 늘리고 광산 개발도 추진하였으며 교통망을 정비하였다. 영지 내에서 통용되는 법률인 분국법을 정하는 이도 있었다. 오닌의 난 이후 약 100년에 걸친 이 전란시대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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