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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고려의 과거제와 음서제

2. 고려의 과거제와 음서제

고려는 신라의 폐쇠적인 골품제를 극복하고 세워진 왕조였다. 따라서 지방 세력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관리가 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리 선발 제도가 마련되었다. 고려의 가장 중요한 관리 선발 제도는 과거제와 음서제였다.
과거제는 중국의 수당 시대에 이미 만들어졌지만, 한국에 도입된 것은 고려 초의 일이었다. 후삼국 통일 후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던 중에 광종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과거제를 처음 실시하였다(958년). 당시 광종은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도입했는데, 후주에서는 세종이 군주권 강화를 위해 과거제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과거제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도입되었지만, 광종사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관리 선발 제도로서 기능하였다.
과거는 시부(詩賦) 등 문예의 능력과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평가하였으므로 출신 배경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력한 가문 출신자들이 학습의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므로 과거에 급제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귀족제적 요소를 탈피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고려 초에 광범하게 존재하였던 지방 세력이 중앙의 문신관료로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과거였던 만큼 고려 초 지방 세력의 성장에서 과거가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컸다.
과거의 시행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학교의 건립이었다. 고려 이전에도 신라의 국학(國學)같은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고려 태조 때 이미 학교를 세웠다. 교육 기관의 설립은 성종 때 특히 두드러졌는데, 지방에서 260명의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는가 하면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창건하였다.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 유학부(儒學部)와 서학(書學)·산학(算學)·율학(律學) 등 잡학부(雜學部)가 설치되었으며, 이를 모두 합쳐 경사 6학(京師六學)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국자학·태학·사문학에서는 『효경』과 『논어』를 공통 필수 과목으로 하고 『상서(尙書)』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가운데 하나, 『주역(周易)』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가운데 하나, 『예기(禮記)』 『좌전(左傳)』 가운데 하나를 이수하도록 하였으며, 잡학의 경우 율학에서는 율(律)과 영(令)을, 서학에서는 고문·대전(大篆)·소전(小篆)·예서(隷書) 등의 8서(八書)를, 산학에서는 산술을 교육하였다. 한편, 인종 때 정해진 학식에 따르면 국자학에는 문무 3품 이상 관리의 아들과 손자, 태학에는 문무 5품 이상 관리의 아들과 손자, 사문학에는 문무 7품이상 관리의 아들, 잡학에는 8품 이하 관리의 아들 및 서인이 입학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제 역시 정비되어 시험 과목에 따라 문예를 시험하는 제술업(製述業)과 경전을 시험하는 명경업(明經業), 그리고 명법업(明法業)·명산업(明算業)·명서업(明書業)·의업(醫業)·주금업(呪噤業)·지리업(地理業) 등 잡업(雜業)으로 구분되었으며, 이 가운데 제술업이 가장 중시되었다. 고려시대에 제술업은 대략 2년마다 실시되었고, 매번 33명을 선발하여 총 6,300여명 정도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다. 시험 절차는 예비 시험인 국자감시와 본 시험인 예부시로 구분되었는데, 본 시험 이후 국왕이 주관하여 재시험하는 복시(覆試) 또는 친시(親試)는 고려 전기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는 문신의 선발에서 국왕의 개입이 제한되고 대신 고시관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의 과거는 지방 세력을 중앙의 관리로 흡수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응시 자격이나 절차가 복잡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지방 출신의 응시자를 향공(鄕貢)이라 하여 중앙관리의 자제들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고, 별도의 예비 시험 없이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중앙권력이 안정되면서 지방 향리들에 대한 응시 제한치 두어졌는데, 1024년(현종 15) 주현의 크기에 따라 향공의 숫자를 제한하여 정(丁)의 수가 1,000명 이상인 주현에서는 3명, 500명 이상이면 2명, 그 이하이면 1명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와 동시에 향공들은 본 시험에 앞서 각 지방의 계수관이 주관하는 시험과 서울의 국자감시를 거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규정은 과거제의 정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지방 향리들의 과거를 통한 진출을 막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의 과거는 초기에는 합격과 동시에 관직에 임명되었을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임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즉,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실직(失職)이 아니라 동정직(同正職)이라는 산직(散職)을 받고 이후 별도의 절차를 거쳐 관직에 임용되었는데, 끝내 동정직에 그치고 실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고려의 과거는 관리 선발에 앞선 자격시험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문벌귀족 사회가 안정화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 문벌 출신이나 중앙 관인에 비해 지방 향리의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므로, 과거를 통한 향리의 진출은 점점 더 어려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과거가 관리 선발제도로서 제한적인 기능을 하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음서제에 있었다. 음서는 전적으로 가문에 배경을 둔 관리선발 제도로서, 왕족 및 공신의 후예와 5품 이상 관리의 자손들에게 8품 이하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이 가운데 5품 이상 관리들의 경우 품계에 따라 아들, 손자뿐 아니라 사위, 조카, 동생에게까지 관직을 줄 수 있었고, 음서의 기회도 여러 차례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관직에 오르기가 쉬웠고, 그럼으로써 5품 이상으로 승진할 가능성도 높았으며, 이를 대물림하여 문벌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음서제를 공음전시와 함께 고려를 귀족제 사회로 보는 중요한 근거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관리선발 제도로서 음서가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과거는 여전히 중시되었고, 그에 합격하는 것은 커다란 명예로 여겨졌다. 실제로 고려시대에는 문한직처럼 과거에 급제한 사람만이 임용될 수 있는 관직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서만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음서로 관직에 오른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과거가 중시되었던 사실에 주목하여 고려를 관료제 사회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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