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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관리 선발제도

과거제

 
 

1. 중국의 관리 선발제도 : 과거제

 

중국에서 사대부가 관계(官界)로 진입할 통로가 되었던 과거(科擧)는 송대에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과거가 처음 시행된 것은 587년 수(隋 : 581~618)에서의 일이었다. 위진남북조의 오랜 분열을 종식시킨 수 왕조는 관료제를 정비한 후 관료를 충원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호족이나 문벌귀족들은 황제가 아닌 가문과 지역 사회를 발판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다. 이에 민인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를 뽑아 천자의 천하 통치를 분담시키고자 과거제가 도입되었다. 과거는 지방 관아의 고급 관원을 보두 중앙에서 임명, 파견하여 세습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문벌귀족을 견제할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 과거는 ‘과목선거(科目選擧)’라는 용어로 쓰였으며, 문제 때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등의 과목이 만들어졌다.
수의 과거제는 당으로 계승되었는데, 당의 과거는 일종의 관원후보 자격시험(禮部에서 주관하는 예부시)으로, 관리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이부시(吏部試)에 다시 합격해야만 했다. 이부시는 인사권이 황제가 아닌 귀족에게 있었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선발 기주이었기 때문에 가문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과목에는 수재과, 명경과, 진사과 등이 있었는데, 경전 시험인 명경과와 시문 시험인 진사과가 가장 성행하였다.
송대에는 전시(殿試)제도를 통해 황제가 과거합격자를 최종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한 점이 특징이다. 전시제는 과거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붕당이 생기는 것을 막고 황제를 향한 충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자는 과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관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고, 과거의 합격이 천자에 의해 결정되므로 합격자는 황제의 충실한 문생(門生)으로서 천자의 질문에 대한 대책(對策), 곧 상표문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초기에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던 과거는 영종 치세에 3년에 한 번 치르는 시험으로 정례화되었다[三年一貢制]. 이로써 황제를 온존시키면서 그 하부의 관료들을 주기적으로 순환시키는 구도가 정착되었다.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는 지방의 예비시험인 해시(解試 또는 향시鄕試), 예부에서 주관하는 본시험인 성시(省試 또는 회시會試)와 함께 과거제의 기본 틀을 형성하였다. 과거의 절차는 이 틀을 유지하면서도 명·청 시대를 거치며 작은 시험이 추가되면서 점점 복잡해졌다.
송대에는 시험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우해 답안지에 수험자의 이름과 연령 등을 풀칠하여 봉하는 봉미법과, 답안 내용을 일괄적으로 옮겨 적어 필체의 차이를 없앤 다음 채점하는 등록법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과거 합격에 응시자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과거에 의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북송대 구법당 관료인 진양(陳襄)은 「선거권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과거의 개방성을 찬미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3년에 한 번 선비를 뽑으시니 저 산야의 빈천한 집이라 할지라도 자제 중에 문학의 재질이 있으면 반드시 과명(科名)을 천자로부터 사여 받아 부귀를 누리고 가문은 영광되고 요역이 없고 자손 또한 그 음(蔭)으로 대업에 보임된다(『적성집(赤城集)』 권18).
 
과거제는 재능 있는 자가 관계(官界)로 진출하는 경로이자 동시에 새로운 인재를 유인하는 효과를 지녔다. 과거제의 정착은 과거 응시자의 증가를 촉진하였다. 송대 해시 합격자 총수는 대략 2~3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경쟁률은 1023년에는 2대1, 1045년 5대1, 1093년 10대1, 1156년 100대1, 1275년 200대1로 점점 치열해졌다.
과거 응시자 및 지식인의 확대는 학교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인종 경력(慶曆) 연간(1041~1048)은 송대 문치주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시대로 간주된다. 당시 교육 진흥과 문교 개혁을 담당한 인물이 범중엄이었다. 그는 중앙의 태학을 확장하고 주현에 학교를 설립하고 종래 시부(詩賦) 위주의 교육을 바꿔 실용적인 논책(論策)과 경의(經義)를 중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개혁은 신종 희녕 연간(1069~1073)에 실시된 왕안석의 신법 가운데 문교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송초 중앙의 최고 학교인 국자감은 이후 태학으로 개편된 후 일반민에게까지 개방되고 정원이 늘어났다. 주·현 등 각급 행정단위에는 주학·현학이 설립되어 일반민의 교육 기회를 넓혔다. 사립학교인 서원은 당말·오대에 처음 등장하여 송대 본격적인 학교제도로 자리 잡았다. 서원은 특히 신유학(곧 송학)의 발달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남송 중엽 이후 관학을 대신하는 교육 중심 기관으로 부상하였다. 신유학은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층의 형성, 학교의 발달에 따른 지식의 보급, 제지술·인쇄술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대까지 유학은 경전의 주석에 치우친 훈고학이었지만 도교나 불교에 비해 사상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송대를 전후하여 유교에 대한 재해석 움직임 속에 신유학, 즉 성리학이 등장하여 인성론이나 우주론 같은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도교·불교의 철학체계를 수용하여 유교에 결여된 정미한 이론과 사상 체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북송의 소옹·주돈이·정호·정이 등이 그 선구자였으며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 남송의 주희였다. 성리학은 사대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하며 전제적 황제권의 지배 질서를 지탱해 주는 체제교학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은 이상주의적 측면과 도학적 윤리성으로 인해 자유로운 사색과 비판적 정신을 억압하여 사상적 독단과 형식주의에 함몰되기도 하였다.
송대 과거제와 학문은 주변국에도 확산되었다. [주299]
각주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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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주변국 인물들을 중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하였다. 신라인들은 당의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였는데, 58명의 합격자가 나왔다고 하며 이 가운데는 빈공과에 처음 합격한 김운경(金雲卿)을 비롯하여 최치원 등이 있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당대에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가 진사가 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신라·고려와 달리 일본에서는 견당사(遣唐使)라는 이름으로 주로 승려들이 파견되었다. 견당사는 630년부터 883년까지 약 20회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기여하였다. 견당사 시대 왜·일본의 유학승은 스승을 찾아 불법을 배워 국가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던 데 비해, 쵸넨(奝然, 938~1016) 이후 송을 방문한 승려들은 오대산 등의 성지를 순례할 목적으로 도항하였다. 곧 일본의 유학승은 당·송 시기를 거치면서 구법승(求法僧)에서 순례승(巡禮僧)으로 변화한 것이다.

고려에서 과거제를 채택하고 성리학을 수용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베트남의 사례만을 간략히 거론한다. 베트남의 리(Lý) 왕조는 1075년 송의 제도를 받아들여 최초로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국립대학인 국자감이 설치되어 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리 왕조의 과거는 미숙한 수준이었고 선발 인원도 많지 않았지만 제도적으로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아인똥(Ahn Tông, 1138~1175) 치세에 히엔 타인은 무인이면서도 유학을 장려하고 공묘(孔廟) 건립을 주도하였다.
송대에 성장을 거듭하던 과거제는 몽골제국 시기에 들어서는 거의 실시되지 못했다. 제국 말기 유학에 다소 호의적이었던 아유르바르와다[仁宗]가 1313년에야 과거를 실시했을 뿐이었다. 이는 쿠빌라이를 비롯한 몽골 대칸들이 학교나 과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문인 관료의 출사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다음 기록에 따르면 5%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주300]
각주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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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과 달리 몽골제국에서 품관은 대칸의 숙위, 곧 케식(친위대)을 거쳐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케식은 대칸에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을 육성하는 창구 역할을 했는데, 몽골인과 색목인이 그 구성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중국 한인(漢人)이나 고려인이 발탁되기도 하였다. 색목인(色目人)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란 의미로, 여기에는 티베트인, 위구르인, 킵착인, 무슬림, 나아가 유럽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벼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첫째 숙위[宿衛], 둘째 유(儒), 셋째 리(吏)에서 임용되는 것이다. 숙위에서 임용되는 자는 [임명하는] 말이 중금(中禁)에서 나와 중서성에서 봉행하니 제칙(制勅 : 황제의 詔令)일 뿐으로 10명 가운데 1명이다. 유(儒)에서 임용되는 자는 교관(校官)으로, 품관(品官)에 오른 자는 제거교수(提擧敎授)이며 중서성에서 나오고, [품관에] 오르지 못하는 자는 곧 정록(正錄)으로 아래로는 행성(行省)이나 선위사(宣慰司)로 나가는데 십분의 일의 절반이다. 리(吏)에서 임용되는 자는 중서성, 어사대, 추밀원과 중외의 서사(庶司), 군현에 10명 가운데 9.5명이다(『全元文』 권301, 姚燧3 送李茂卿序).
 
이와 달리 몽골인을 축출하고 한족 중심의 왕조를 회복한 명 태조 주원장은 학교와 과거를 병용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전국에 학교를 설립하고 경전 교육을 충분히 실시한 후에 생도 가운데 우수한 자를 과거 시험을 거쳐 발탁하였다. 이는 명대 사회 지배층으로서 신사층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주 299
과거는 주변국 인물들을 중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하였다. 신라인들은 당의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였는데, 58명의 합격자가 나왔다고 하며 이 가운데는 빈공과에 처음 합격한 김운경(金雲卿)을 비롯하여 최치원 등이 있었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당대에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가 진사가 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신라·고려와 달리 일본에서는 견당사(遣唐使)라는 이름으로 주로 승려들이 파견되었다. 견당사는 630년부터 883년까지 약 20회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기여하였다. 견당사 시대 왜·일본의 유학승은 스승을 찾아 불법을 배워 국가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던 데 비해, 쵸넨(奝然, 938~1016) 이후 송을 방문한 승려들은 오대산 등의 성지를 순례할 목적으로 도항하였다. 곧 일본의 유학승은 당·송 시기를 거치면서 구법승(求法僧)에서 순례승(巡禮僧)으로 변화한 것이다.
주 300
송과 달리 몽골제국에서 품관은 대칸의 숙위, 곧 케식(친위대)을 거쳐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케식은 대칸에 충성하는 엘리트 집단을 육성하는 창구 역할을 했는데, 몽골인과 색목인이 그 구성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중국 한인(漢人)이나 고려인이 발탁되기도 하였다. 색목인(色目人)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란 의미로, 여기에는 티베트인, 위구르인, 킵착인, 무슬림, 나아가 유럽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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