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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중국

2. 중국

1) 신품종 도입
종자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에 따라서 생산량의 다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농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따라서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과정에서 토양이나 물을 대단히 중시하기도 하였지만, 어떠한 종자를 선택하고 재배할 것인가를 고심하는 동시에 우량 품종을 도입 보급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대에 새롭게 도입된 작물로는 대표적으로 점성도(占城稻)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지대가 높은 지역에서 재배되던 내한성이 강한 벼로 “중국의 벼에 비해서 이삭이 길고 까끄라기가 없으며, 낱알의 차이가 적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생장한다”주 224
각주 224)
『宋史』卷 173 「食貨忘·農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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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여 적응성이 강한 조생종이다. 진종 대중상부5년(1012)에 강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정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복건으로 가서 점성도 3만 곡(斛)을 가져와 높은 곳에 토지가 있는 백성들을 골라서 종자를 나누어 주고, 아울러 재배방법을 조판에 새겨 인쇄하고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알려 재배를 확대하였다. 이로부터 점성도는 강회와 양절지방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 후 재배하면서 다시 계속해서 개량하고 변화시켰다.주 225
각주 225)
漆俠(1987), 『宋代經濟史』, 上海人民出版社,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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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중국의 남방에서 보편적으로 재배되는 작물이고 따라서 벼의 품종 또한 대단히 많다. 문헌기록에서 보면 시조우[歙州]에 벼가 31개 품종으로 그 중에 선도(籼稻 : 메벼의 일종)가 11종, 갱도(秔稻 : 메벼의 일종)가 13종, 나도(糯稻 : 찹쌀)가 7종이고, 후이지[會稽]는 56개 품종, 창슈[常熟]는 40여 개의 품종이 있다. 구오이[郭翼]가 기록한 어메이시엔[峨嵋縣]에는 25개의 품종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그 이름을 듣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면 우칭전[烏靑鎭]만 하더라도 메벼 70여 종과 찰벼 40여개 품종이 있으면, 푸조우[福州]에는 조생종이 6종 만생종이 10종, 찰벼가 11종이 있어서 벼의 재배가 대단히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주 226
각주 226)
漆俠(1987),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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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립도(黃粒稻)라는 벼가 환난[皖南]의 산악지대인 지우화샨[九華山]에서 생산되었는데 그 까끄라기가 뾰족하고 씨알이 기름지며, 그 색깔이 은근하고, 그 맛이 향기롭고 부드러워 보통 벼와는 다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김지장(金地藏)이 신라에 갔다가 종자를 가지고 와서 구화산에 이르러 이를 심었다고 한다.
벼 이외에도 녹두가 있는데 이는 진종대에 천국[天竺]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다. 이 품종은 종자가 크고 알이 많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남북 각로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수박이 있는데 수박의 원산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먼저 신강지역으로 전래되었고, 이후 대략 당말오대에 가장 먼저 중국 북부의 요나라로 전래되었다가 여진족이 금국을 건립하였을 때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재배되었다. 남송 초기에는 허베이[河北]와 허난[河南]지방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다가 점차 회수를 넘어 중국 전역에서 재배하여 수박이 서북 변방에서부터 도입되어 남방의 각지로 보편화되기까지 대략 2세기기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주 227
각주 227)
漆俠(1987),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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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에 새로 도입된 작물로는 옥수수가 있어서 곡물의 재배가 어려운 고산지대나 건조한 땅에서 경작하기 좋은 작물이 되었는데, 본래 옥수수는 명대인 16세기 중엽에 전래되어 18세기 중엽 이후에 각 지역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고구마도 16세기에 전래되어 구릉지와 건조한 지역 혹은 모래땅에서 재배하였는데, 고구마는 다른 작물과는 달리 무성번식이라서 재배가 쉽고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많아서 고구마는 전래된 직후부터 지방관들이 재배를 적극 권장하였다.주 228
각주 228)
오금성 외(2007), 『명청시대사회경제사』, 이산, 495~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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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기구 개선
송대는 전국시대와 진한대를 이어서 야철기술과 철제도구가 다시 한 번 변혁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특히 철 산량의 격증에 따라서 철제 쟁기의 개선과 철제 절삭도구의 창조 및 보급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의 농업사에서 쟁기에 벽(鐴)과 상(床)의 유무가 휴한농법에서 경지 전면경을 통한 연작농법으로의 이행이 결정되었는데, 화베이[華北]의 농업에서는 전한말에 벽과 상이 있는 장상리(長床犁)가 나와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주 229
각주 229)
魏恩淑(1996),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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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에는 직원리(直轅犁)로 만들었는데 이는 쟁기질을 할 때 더욱 신속하고 편리하였고,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중요한 작용을 하여 단위면적당 생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쟁기에 ‘체도(銐刀)’ 혹은 ‘개황체도(開荒銐刀)’라고 하는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사용하는 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구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칼의 일종으로 그 형태는 낫과 같고, 그 윗부분이 더 두꺼운데 그 칼날은 강철로 만들어 더욱 날카롭고 오래 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을 사용하면 보습으로 밭을 갈 때에 흙을 들어올리기가 쉽고 소도 힘이 덜 들게 된다.주 230
각주 230)
漆俠(1987), 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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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에 있어서 기계로 경작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인데 송대의 북방에는 소가 없거나 매우 적었기 때문에 남방의 소에 의존해야만 했다. 소가 없는 농민들은 생산물을 분배할 때 지주들에게 10분지 1의 소작료를 추가해서 부담해야 했다. 이처럼 경우가 부족하거나 우경을 모르는 지역에서는 답리(踏犁)와 쇠스랑과 곡괭이가 중요한 농구가 되었다.
답리는 두 사람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로서 전적으로 인력에 의지해서 땅을 뒤집어 우경의 효과에 절반 정도를 얻을 수 있고, 발을 사용하는 것이 손을 사용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기 때문에 곡괭이를 사용하여 밭을 가는 것보다 효과가 두 배이다. 이런 공구는 생산이 낙후되거나 조방농업을 경영하는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쇠스랑은 4개나 6개의 써래날을 가지고 있는데 그 날이 날카롭고 약간 구부러져 있는데 써레 같으면서 써레는 아니고 흙을 쌓아놓은 것이 탑과 같아서 이것을 철탑(鐵搭)이라고 한다. 소를 이용하는 쟁기가 부족하면 이것을 가지고 땅을 파서 경작에 대용하는데 써레와 곡괭이의 효과를 겸하여 가지고 있다. 북방지역에서 곡괭이는 쟁기의 대용품으로서 허난[河南]에서 출토된 곡괭이를 보면 형태와 구조가 상당히 큰 모습을 하고 있으며, 노동력이 풍족한 타이후[太湖]유역에서는 곡괭이로 길게 토지를 뒤집을 수 있어서 역시 중요한 경작도구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송대에 창조된 새로운 도구로 앙마(秧馬)가 있다. 이것은 모내기를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의 일종으로 위에 타고서 모내기를 하며 허리를 굽혀서 모내기를 하는 것보다 적지 않게 체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앙마는 대략 북송 신종대에 발명되었고, 느릅나무와 대추나무로 배를 만들어 미끄러지게 하고 가래나무와 오동나무로 등을 만들어 그것을 가볍게 했는데, 배 부분은 조그만 배와 같이 그 머리와 꼬리를 치켜들고 등 부분은 마치 기와를 엎어놓은 것과 같이 하여 두 다리로 흙 안에서 뛰기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 머리에다 모를 묶어놓고서 모내기를 했다. 하지만 이 도구가 체력의 소모를 줄이기는 하였으나 속도가 빠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송원대는 또한 하분루종(下糞耬種)이라고 하는 파종 도구가 발명되었는데, 이는 씨를 담는 깔대기에 따로 분뇨를 거르는 체를 설치하여 누에의 똥과 섞어서 파종할 때 종자를 따라서 떨어져 종자의 위를 덮으니 사용에 더욱 편리하였다.
송대의 남방에서는 또한 운탕(耘蕩 : 써레의 일종)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였다. 운탕의 형태는 나막신 같이 생겨서 실제 길이는 한 척 정도인데, 20여 개의 짧은 못을 배열하여서 이를 사용하여 논두둑 사이에 풀이나 흙을 쳐서 이들을 섞거나 빠트려 밭이 더욱 고르고 비옥하게 한다. 써레나 호미보다 성능과 효과가 좋아서 인력의 소모를 줄이고 노동생산율을 높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주 231
각주 231)
漆俠(1987),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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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농업기술 발전
관개용 도구 중에서는 이전부터 대나무 통을 이용해서 이를 연결시켜 물을 끌어들여 관개를 하는 이외에 송대에는 이른바 통차(筒車)라는 것이 있었다. 통차는 흐르는 물에다 만든 것으로, 물에 흐르는 힘을 이용하여 바퀴살을 돌리고 바퀴살에 부착된 대나무 통에 물을 담은 다음에 강안의 위로 끌어올려 수로를 통해 밭에다 물을 대는 것이다. 반면에 정지되어 고인 물에서는 답차(踏車)를 사용하였다. 답차는 용골차(龍骨車)라고도 하며 물에 가까운 지역이면 모두 설치할 수 있어서 비록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남방에 벼를 재배하는 지역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모두 있어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관개용 도구였다.주 232
각주 232)
漆俠(1987),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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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에는 농업 생산도구에 커다란 발전이 없었고, 이전의 것들을 답습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일명 ‘목우(木牛)’라고도 하는 ‘대경기(代耕器)’가 출현하여 세 사람이 함께 밭을 갈면서 노동력을 절감하고 효율을 높이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이러한 대경기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이러한 기계적 농기구가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명대에는 서양 서적을 통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기술이나 하천과 못에서 물을 퍼 올리는 기술 등 서양의 수리기술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수리 기술의 발달로 각 지역마다 수리시설이 정비되었는데 명대 홍무년간에 전국의 당언(塘堰)이 40,987곳이었으며, 명대에 장시[江西]성에 설치된 피당만도 수만 곳에 이를 정도였다. 명대에는 수리시설에 대한 관리가 법으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농업이 국가의 경제기반이고 수리시설이 농업의 인프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명율』에는 수리시설을 훼손하면 처벌하는 규정까지 있어서 하천의 제방을 무너뜨리거나 몰래 물을 끌어다 사용하면 장 100대에 처하였고, 아울러 수리시설 지역에 사람들이 이주하거나 개인적으로 수리시설을 만드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다.주 233
각주 233)
오금성 외(2007), 498~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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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서주시대에 이미 무성한 풀을 베어서 땅속에 묻어 비료로 하는 초분을 시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한 대에 이미 지종법(漬種法)이 시행되었고, 당대에는 소의 분뇨를 사용한 답분법 등으로 시비를 하였다. 원대에는 답분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면서 강남의 벼농사 지역에서는 델타 지역의 진흙을 비료로 사용하는 니분(泥糞)과 산성 토양을 중화시키는 석회를 새로운 비료로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주 234
각주 234)
魏恩淑(1996), 328~329쪽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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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업관련 정책
농서는 농업 관련 정보를 많이 담고 있기 때문에 한 시대의 농업기술 수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송대 이후로는 종합농서로서 송대에 진부(陳旉)의 『농서』나 원대에 『농상집요』와 왕정(王禎)의 농서가 출판되고, 전문 농서로서 『잠서』 『작약보』 『여지보』와 같은 농서들이 출현하였다.주 235
각주 235)
오금성 외(2007), 493~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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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명조를 건국한 해부터 적극적으로 권농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첫째는 황무지를 개간하면 원래 주인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개간한 자의 소유로 한다는 정책을 발표한 이후로 여러 차례 개간을 장려하는 조치를 취하여 홍무 26년에 이르면 전국의 경지면적이 850만경에 이르렀고, 황무지의 개간이 대체로 완료되었다. 둘째는 군둔과 민둔을 시행하였는데, 군둔은 주둔지에서 지휘관의 관리 하에 군인 한 사람이 50무의 경지를 경작하게 하는 것이고, 민둔은 토지가 부족한 지역의 빈한한 백성이나 호적이 없이 유랑하는 백성이나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황무지로 보내서 경작하게 하는 것인데, 홍무시대에 이러한 둔전의 면적은 89만 3천 경에 이르러 전체 경지 면적의 1/10을 조금 넘었다. 셋째는 대대적인 수리공사를 벌여서 주원장은 건국 초기에 영전사(營田司)를 설치하고 전국의 수리를 관리하게 하였다. 각종 사서에서는 명대 초기에 각종 수리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된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농업의 회복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넷째는 토지겸병의 방지로, 주원장은 원대 말기에 지방 토호들의 가난하고 힘없는 농민의 토지를 침탈하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부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방지하였다.주 236
각주 236)
范文瀾 저·박종일 역(2009), 『중국통사』, 도서출판 인간사랑, 374~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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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24)
    『宋史』卷 173 「食貨忘·農田」. 바로가기
  • 각주 225)
    漆俠(1987), 『宋代經濟史』, 上海人民出版社, 115쪽. 바로가기
  • 각주 226)
    漆俠(1987), 117~118쪽. 바로가기
  • 각주 227)
    漆俠(1987), 115~116쪽. 바로가기
  • 각주 228)
    오금성 외(2007), 『명청시대사회경제사』, 이산, 495~496쪽. 바로가기
  • 각주 229)
    魏恩淑(1996), 323쪽. 바로가기
  • 각주 230)
    漆俠(1987), 110~111쪽. 바로가기
  • 각주 231)
    漆俠(1987), 112~113쪽. 바로가기
  • 각주 232)
    漆俠(1987), 114쪽. 바로가기
  • 각주 233)
    오금성 외(2007), 498~500쪽. 바로가기
  • 각주 234)
    魏恩淑(1996), 328~329쪽을 참조. 바로가기
  • 각주 235)
    오금성 외(2007), 493~494쪽. 바로가기
  • 각주 236)
    范文瀾 저·박종일 역(2009), 『중국통사』, 도서출판 인간사랑, 374~375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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