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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10~16세기 동아시아 세계

Ⅰ. 10~16세기 동아시아 세계

10세기에 들어서면 동아시아 지역은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당대의 국제적인 문화는 중국과 인접한 민족들의 문화발전을 크게 자극하였고, 당왕조의 멸망에 따라 중국 주변의 민족들이 여러 개의 정권을 수립하여 기존의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와해되었다. 당왕조를 대신해서 오대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건립된 송왕조는 주변의 민족정권들을 제어할 수 없었고, 북방에서는 거란과 여진 및 몽고가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면서 정치적·군사적인 측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서북방에서는 당항족(党項族)이 서하(西夏)를 건립하여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북방민족과 중원민족 사이에서 균형추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고, 남방에서는 한대 이래로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던 베트남이 최초로 응오[吳]왕조를 건립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한 이외에 토번(土蕃)과 대리(大理)정권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 세계는 몽고가 여러 정권을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절대적인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상호간에 수많은 전쟁 혹은 선린 외교를 수행하면서 매우 복잡하면서도 다변적인 국제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환경으로 인해서 중국은 송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와 거란과 여진 및 몽고 등의 유목사회가 병존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농업과 농민들의 생활을 서술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당시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유목사회나 유목민들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고자 한다.
이 시기에 중국은 매우 독특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곧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접국을 점령하면서 대제국을 건립했던 한당왕조와는 달리 송왕조는 정치적·문화적으로는 비교적 발전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유목민족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초기에 거란이 북경을 포함한 북중국을 점유하였고, 여진은 그 영역을 더욱 확대하여 화이슈[淮水] 이북을 통치하였고, 급기야 몽고족은 송이라는 한족왕조를 멸망시키고 원왕조를 수립하였다. 이후 다시 주원장에 의해서 명왕조가 건립되고 유목민족은 다시 만리장성의 바깥으로 축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중국은 왕조가 송[농경문화]-원[유목문화]-명[농경문화]으로 이어지면서 본문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농업과 농민 자체는 커다란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역사시기 안에서 송원명으로 이어지는 600여 년의 기간은 농업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송대를 예로 들면 1무(畝)의 토지에서 일반적으로 1석에서 2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고, 비옥한 타이후[太湖]유역을 중심으로 한 양절로 지역의 경우 1무당 생산량이 4석에서 6석 심지어는 7석에 이르기까지 하였다.주 206
각주 206)
조복현(2007), 「宋代 米價의 變動과 消費生活」 『歷史學報』194집, 238쪽에 의하면, 송대의 1畝는 567㎡이고 명대의 1畝는 580㎡로서 현재의 667㎡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宋代의 1石은 지금의 6.6斗이고, 46.2㎏에 해당하여 도량형의 차이에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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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농업의 노동생산성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으로 볼 때, 전국시대에 비교하여 최소한 3~4배가 높아졌다. 그리고 농업의 노동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송대의 수공업, 상업과 도시의 경제 또한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신속하고 큰 폭으로 신장되었다. 사회경제의 전면적인 발전에 따라 봉건적인 소작관계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태호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양절지역은 실물로써 혹은 화폐로써 납부하는 정액지조가 출현하였고, 상품과 화폐의 관계 또한 신속하게 발전하게 되고 사회경제 관계도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발생했다. 하지만 14세기 후부터는 중국사회의 발전이 점차로 느려지고 지체되어 갔으며, 비록 명 중엽이후에 자본주의 맹아가 출현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미 명확하게 유럽의 몇몇 국가에게 뒤처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918년에 고려가 건국되어 1392년에 멸망하고 이어서 조선이 건국되면서 현재 중국의 영역 내에 있는 북방민족들과 많은 전쟁을 치르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에서 요와 송이 ‘전연지맹(澶淵之盟)을 체결하여 중원의 전선이 앙ㄴ정되자 거란족의 요가 고려를 수차례 침범한 바가 있고, 12세기 초엽에는 윤관이 여진을 공격하여 9성을 축조하고 당시의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이를 여진에게 환부한 바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몽고족이 흥성하고 동녕부와 쌍서총관부 등이 설치되면서 고려 영토의 잠식이 있었지만 몽고 세력의 약화에 따라 전쟁과 외교적 방식으로 이들을 수복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서 신흥의 명조와 철령위의 설치를 둘러싸고 외교적 마찰이 있었지만 현재 한반도의 영역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우선 신라 말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골품제도가 동요되고, 무신집권기와 원의 간섭기에는 전통적인 신분제가 더욱 심하게 동요되는 가운데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여 조선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와 수당시기를 지나면서 송대 이후에는 유, 불, 도의 삼교가 서로의 장점을 취하면서 점차로 ‘삼교귀일(三敎歸一)’의 특징을 보인다. 반면에 고려에서는 불교가 특별히 중시되는 가운데, 고려 초기에 과거제도가 시행되면서 유학이 발달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도교나 풍수지리도 유행하기는 하지만 점차적으로 불교와 유교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원의 간섭기인 고려 말에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중원의 농경민족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유목민족의 특성에 따라서 목화나 화약 등과 함께 성리학이 유입되어 조선의 주도적인 이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고려는 거란과 여진 및 몽고 등 북방민족들과 전란을 치르고, 특히 몽고의 침략기에는 30여 년에 걸쳐서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발전은 상대적으로 어려울 밖에 없었다. 하지만 농업생산량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토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였으며, 시비법을 개발함과 동시에 새품종을 도입하고 경종법(耕種法)을 변화시키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주 207
각주 207)
박용운(2010), 『고려시대사』, 一志社, 6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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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은 10세기 초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장원을 비롯한 사유지를 확대하는 동시에 황실의 외척이 되어 섭정하면서 관백으로써 천황을 능가하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이른바 섭관정치를 열면서 10세기 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 11세기 말부터 12세기 말까지 1세기 동안은 천황의 경험자인 상황에 의한 정치형태가 나타났는데, 이때를 ‘원정(院政)시대’라고 한다. 상황은 천황보다 관례에서 자유로웠고, 장원을 정식으로 인가했기 때문에 상황에게 장원을 기진(寄進)하는 경우가 늘면서 서서히 경제적으로 섭관가를 압도했다.
12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이라[平]가문과 미나모토[源]가문, 그리고 후지와라가문의 정치적 투쟁을 거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전국을 제패하여 가마쿠라에 막부를 열고,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된 1192년부터 1333년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기까지 140여년을 가마쿠라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정권을 장악하고 1336년에 교토에 막부를 열 때까지 1573년에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약 240년인데 무로마치라는 이름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77년에 교토 무로마치에 ‘하나노고쇼[花の御所]’를 지은 일에서 유래한다. 그 사이 1392년까지의 약 60년간 조정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항쟁했지 때문에 남북조시대라고도 하는데, 1392년에 남북 양조가 합쳐졌다. 또한 1568년에 이르는 1세기는 각지에 다이묘가 할거하여 전국시대하고 한다.
이 시기 일본 경제의 바탕이 된 것은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에 입각한 장원이었는데, 이것은 크게 간전지계(墾田地系) 장원과 기진지계(寄進地系) 장원으로 나뉘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이르러서는 후자의 형태가 전국적으로 우세한 형세로 변모하여 유력한 권문의 등장을 야기하였다. 또한 이 시기 장원은 대토지사유였을 뿐만 아니라 조세 면제와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의 출입을 통제하는 치외법권적 권리까지 누렸다. 이 때문에 중앙과 지방은 끊임없는 긴장 관계가 이어져 지방 장원을 관리하는 호족들이 무장하기 시작하는 한편, 조세 수취를 위해 파견된 고쿠시[國司]도 무장하면서 무사계층이 발생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주 208
각주 208)
松山良三(2004), 『日本の農業史』, 新風舍,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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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농민들 가운데에는 간전지계 장원의 출현과 더불어 간전 개발과 경작에 힘을 쏟은 농민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떠나 유랑하는 농민도 증가하여 농민의 분화가 촉진되는 한편, 점차 의식의 성장으로 도산을 비롯하여 폭동과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려 노력하였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기후의 변동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목면의 전국적 보급과 벼농사의 2모작이 간토[關東] 서쪽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전란의 시기에 발달한 축성기술과 토목기술이 개간에 활용되어 전국의 논 면적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농업생산성의 진전이 이루어지면서 농민들의 생활도 점차 나아졌다.주 209
각주 209)
稻垣泰彦(1975), 「中世の農業經營と收取形態」 『日本歷史6, 中世2』, 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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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0에서 1세기에 동아시아 3국의 역사가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서 각국의 농업에 발달이나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와 관련된 각국에 현존하는 문헌 기록의 양도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에 비교하여 고찰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이와 관련된 각국의 분산된 사료와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 각주 206)
    조복현(2007), 「宋代 米價의 變動과 消費生活」 『歷史學報』194집, 238쪽에 의하면, 송대의 1畝는 567㎡이고 명대의 1畝는 580㎡로서 현재의 667㎡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宋代의 1石은 지금의 6.6斗이고, 46.2㎏에 해당하여 도량형의 차이에 주의해야 한다. 바로가기
  • 각주 207)
    박용운(2010), 『고려시대사』, 一志社, 666쪽. 바로가기
  • 각주 208)
    松山良三(2004), 『日本の農業史』, 新風舍, 98~99쪽. 바로가기
  • 각주 209)
    稻垣泰彦(1975), 「中世の農業經營と收取形態」 『日本歷史6, 中世2』, 180~181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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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세기 동아시아 세계 자료번호 : edeah.d_0003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