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성립
2. 몽골제국 성립
징기스 칸이 몽골리아를 통일하고 제국의 기틀을 세운 것은 1206년이었지만, 몽골리아 초원에서 위구르 제국이 무너진 840년 경부터 거의 3세기 반에 걸쳐 오랜 혼란기가 있었다. 10세기 유목민 사회는 몇 개의 커다란 정치적 블록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 블록을 당시 몽골인들은 ‘울루스’라고 불렀다. 13세기 초 몽골제국 성립 이전의 몽골 유목민 사회 단위는 동일한 부계혈통을 소유한 ‘오복’이라고 불리던 씨족이었고, 이 씨족들은 모여서 ‘울루르’라는 부족을 구성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전통적 이론에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징기스 칸은 친족적 구성원리와 무관한 새로운 사회·군사 조직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그가 1206년 건국 직후 조직한 ‘천호제(千戶制)’였다는 것이다.주 197
1206년 ‘건국’ 직후 징기스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몽골 울루스를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한 것이었다.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百戶)로, 백호는 다시 십호(十戶)로 나뉘어, 각각 백호장과 십호장도 임명되었다.주 198오늘날의 군대조직과 비교해 볼 때 백호는 중대(약 100명) 규모이고, 천호는 대대(약 450명)보다는 크고 연대(약 2천명 미만)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95개의 천호에서 9만 5천명의 병력이 배출된다고 하면, 1개 사단이 1만 5천명 정도이므로 대략 6~10개 사단 규모이니, 당시에 있어서는 기마병으로만 구성된 6~10개 사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 95개의 천호부대는 좌익, 중군, 우익 3개의 만호에 배속되어 몽골리아 전역에 배치되었다.주 199
징기스 칸 사후 몽골인들이 수행한 전쟁은 단순히 응징이나 약탈이 아니라 정복을 통해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정권에 대해서는 일단 그 명맥을 보존시키되 일련의 의무조항들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조건은 그동안 학계에서 ‘육사’라고 흔히 불렸지만, 꼭 여섯 가지의 특징 항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① 국왕 친조, ② 질자 파견, ③ 호적 제출, ④ 역참 설치, ⑤ 병력 파견, ⑥ 물자 공출, ⑦ 다루가치 주재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했고, 그 전쟁은 그저 응징이 아니라 정복을 통한 몽골제국 영역의 확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제국의 정복전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펼쳐졌다.주 200
징기스 칸은 1219년부터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1227년 서하를 정복하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태종, 재위 1229~1241년)은 금을 멸망시키고(1239년) 화북을 영유하였으며, 그 원정군은 러시아로부터 동유럽까지를 석권하였다. 제4대 몽케칸(재위 1251~1259년)은 서아시아의 압바스왕조를 무너뜨려 그 영역은 동으로는 동해로부터 서로는 남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뭉케 사후 그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마침내 1276년 남송을 함락시킴으로써 몽골제국은 그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 대영역은 몽고습관에 의해 징기스 칸의 여러 자제에게 분할되었다. 몽고의 본지 및 화북은 몽고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칸국(장자 쥬치의 아들 바투),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막내 아들 투루이의 아들 훌라구), 서투루키스탄에는 차가타이 칸국(둘째 아들 차가타이), 동투르키스탄에는 오고타이 칸국(태종의 자손에 의해 계승)의 4칸국이 세워졌고 그 밖의 지역도 징기스 칸의 일족, 유목귀족에게 나누어졌다. 그리하여 몽고황제를 종주로 하는 대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주 201
1206년 ‘건국’ 직후 징기스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몽골 울루스를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한 것이었다.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百戶)로, 백호는 다시 십호(十戶)로 나뉘어, 각각 백호장과 십호장도 임명되었다.주 198오늘날의 군대조직과 비교해 볼 때 백호는 중대(약 100명) 규모이고, 천호는 대대(약 450명)보다는 크고 연대(약 2천명 미만)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95개의 천호에서 9만 5천명의 병력이 배출된다고 하면, 1개 사단이 1만 5천명 정도이므로 대략 6~10개 사단 규모이니, 당시에 있어서는 기마병으로만 구성된 6~10개 사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 95개의 천호부대는 좌익, 중군, 우익 3개의 만호에 배속되어 몽골리아 전역에 배치되었다.주 199
징기스 칸 사후 몽골인들이 수행한 전쟁은 단순히 응징이나 약탈이 아니라 정복을 통해 세계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정권에 대해서는 일단 그 명맥을 보존시키되 일련의 의무조항들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조건은 그동안 학계에서 ‘육사’라고 흔히 불렸지만, 꼭 여섯 가지의 특징 항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① 국왕 친조, ② 질자 파견, ③ 호적 제출, ④ 역참 설치, ⑤ 병력 파견, ⑥ 물자 공출, ⑦ 다루가치 주재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했고, 그 전쟁은 그저 응징이 아니라 정복을 통한 몽골제국 영역의 확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제국의 정복전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펼쳐졌다.주 200
징기스 칸은 1219년부터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강 유역에,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에 두고, 1227년 서하를 정복하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태종, 재위 1229~1241년)은 금을 멸망시키고(1239년) 화북을 영유하였으며, 그 원정군은 러시아로부터 동유럽까지를 석권하였다. 제4대 몽케칸(재위 1251~1259년)은 서아시아의 압바스왕조를 무너뜨려 그 영역은 동으로는 동해로부터 서로는 남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뭉케 사후 그 뒤를 이은 쿠빌라이는 마침내 1276년 남송을 함락시킴으로써 몽골제국은 그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 대영역은 몽고습관에 의해 징기스 칸의 여러 자제에게 분할되었다. 몽고의 본지 및 화북은 몽고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칸국(장자 쥬치의 아들 바투),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막내 아들 투루이의 아들 훌라구), 서투루키스탄에는 차가타이 칸국(둘째 아들 차가타이), 동투르키스탄에는 오고타이 칸국(태종의 자손에 의해 계승)의 4칸국이 세워졌고 그 밖의 지역도 징기스 칸의 일족, 유목귀족에게 나누어졌다. 그리하여 몽고황제를 종주로 하는 대제국이 출현하게 되었다.주 201
- 각주 197)
- 각주 198)
- 각주 199)
- 각주 200)
- 각주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