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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8~9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Ⅵ. 8~9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8세기 이후 나당관계사 연구동향을 보면 전반적인 정치교섭사는 물론이고 구법승과 유학생을 통한 문화교류사, 공무역과 사무역에 의한 경제교역사, 나당간의 무력충돌 같은 민족항쟁사 등등 다양한 각도에서 신라와 당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그럼에도 정작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기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조공과 책봉의 관점에서 나당관계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조공과 책봉을 매개로 한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조공과 책봉만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없지 않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이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고 유용한 개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나당관계사를 책봉과 조공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680년대의 화해무드 속에서 신라와 당은 각각 한 차례씩의 사절교환을 통하여 그동안 단절되다시피 하였던 나당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692년에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이 즉위하자 측천무후가 사신을 보내 신문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효소왕을 ‘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 신라왕(輔國大將軍行左豹韜衛大將軍 鷄林州都督 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신라의 불응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는 재차 신라에 국교 재개를 시도하였는데, 효소왕 8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나당관계 복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의 견당사 파견은 30여 년간 단절되었던 나당관계를 실질적으로 복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신라 전시기를 통하여 선덕왕대만큼 대당교섭이 활발한 때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성덕왕대는 나당교섭사에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나당관계는 성덕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순조롭게 이어져 나갔다. 이 시기 신라는 정기적으로 하정사를 보내 신라의 사정을 알렸고, 수시로 사은사(謝恩使)와 고주사(告奏使) 그리고 경조사(慶弔使) 등을 보내 당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신라의 적극적인 대당외교에 대하여 당 역시 신라의 왕위 교체시에 빠짐없이 책봉사(冊封使)를 파견하여 신라왕과 왕비 등을 책봉하였다.
8세기 이후 안정적인 나당관계 속에서 신라는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고 이른바 조공무역을 통하여 활발한 경제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이 시기 나당관계에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나타났다. 그것은 종전에 비해 양국간 인적 왕래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종래 신라의 대당관계는 견당사절단을 통한 조공과 책봉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 공적인 교류와 교섭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하대에는 이들 외에 구법승과 유학생 그리고 민간 상인들의 왕래가 활발해짐으로써 이른바 준(準)조공관계와 비(非)조공관계의 비중이 높아졌다.
물론 나당관계의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조공과 책봉이다. 신라가 당에 접촉한 것은 조공으로 시작하였고, 당은 책봉으로 화답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라와 당은 조공과 책봉이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290년간의 교류와 교섭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신라와 당은 유교적 명분론과 의리론을 이념적 매개로 하여 종주국과 번국 관계 곧 종번관계(宗蕃關係)를 형성하였다. 당과 신라의 종번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공고해졌다. 중고기보다는 중대의 조공·책봉이 더욱 규범화되었고, 중대보다는 하대의 그것이 훨씬 체계적이었다.
비록 조공·책봉제도가 종주국과 번국이라는 상하 위계질서로 규정되어 있으나,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념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나름대로의 합리적 국제관계였다. 따라서 나당간의 조공과 책봉은 오늘날 인식하는 정치적 지배·종속관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오히려 신라는 그러한 제도 속에서 자주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당 중심의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와 문화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한편 발해는 당·일본과 활발히 교섭하였다. 발해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145회에 이르고, 중국에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16회 이상이 된다. 이러한 사신 파견 횟수는 같은 시기 통일신라와 비교해도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발해는 주로 조공, 하정(賀正), 교역, 학생 입학 등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에 비해서 당은 왕의 책봉을 위해서 파견하였다.
발해는 8세기에 들어 일본과의 교섭에 주력하였다. 일본에는 사신을 34회 파견하였는데, 처음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무관을 보내다가 사회가 안정되는 8세기 중반부터 문관으로 바꾸었다. 특히 9세기에 들어 발해가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하였지만, 일본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발해와 신라와의 교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신라 국경도시인 천정군(泉井郡)에서 발해 책성부(柵城府)까지 39개 역이 운영되고 있었고, 신라가 교류의 창구인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쌓은 것을 보면 발해와 신라의 교역도 나름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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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