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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전쟁기 국제정세

3. 나·당 전쟁기 국제정세

고구려의 멸망은 신라와 당의 대립을 본격화시켰다. 사실 나당연합군은 처음부터 내부 균열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노골적인 점령 의도를 드러냈다. 백제고지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나아가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독부(鷄林大都督府)로 하고 신라왕을 계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마저 복속시킨 모양을 취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664년과 665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으로 하여금 웅진도독 부여융(扶餘隆)과 동맹을 맺고 상호 침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였고, 이후 노골적으로 백제 유민을 지원하며 백제지역에서 신라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668년에 당과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670년 7월경부터 신라와 당은 백제부흥군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로 불신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고구려 중앙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고구려 전영역에서 유민들의 대당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 신라는 은근히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함으로써 당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는 한편, 백제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670년 4월에는 고구려 유민 검모잠의 거병과 한성(漢城)에서의 고구려국 재건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신라는 8월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한성의 고구려 유민세력을 지원하면서 당군의 남하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신라가 당과의 전쟁을 개시한 것도 670년 7월에 등장한 한성의 고구려국을 의식한 신라의 대당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670년을 전기로 하는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660년부터 당의 군사력이 한반도로 집중되면서, 빈틈이 생긴 서역에서는 660년에 천산지역의 서돌궐이 반기를 들었으며, 661년에는 철륵도 서역에서 당에 도전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662년에 한반도에서 군대를 돌려 설인귀(薛仁貴) 등을 서역에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서역은 당의 통제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는데, 그 중심은 토번(吐藩)이었다. 토번은 663년 이후 토욕혼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토욕혼의 연이은 군사요청에도 당은 미처 한반도에서 군대를 쉽사리 돌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665년에는 서돌궐도 내분을 청산하고 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요동과 한반도에서 당의 군사작전이 장기화되자, 토번은 669년 9월부터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여, 670년 7월에는 설인귀의 10만 대군을 청해(靑海) 지역에서 괴멸시키고, 안서(安西) 4진(鎭)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돌려지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은 대당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라는 백제지역에서 당군와 대결하여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의 한쪽에는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전개된 고구려 유민세력의 활동으로 육로에서 당군의 군사행동이 불가능해진 점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에 당은 671년에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유민세력을 격파하고 요동일대의 통제력을 확보한 후, 한반도로의 진공을 시도하였다. 672~673년에 당군은 계속 남하하여 황해도 일대의 전선에서 연이어 고구려 유민세력과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의 전쟁의 저울추는 675년 이후 신라쪽으로 기울었다. 신라군은 675년에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군 20만 대군를 매초성(買肖城)전투에서 대패시키고, 676년 11월에 설인귀가 거느린 수군마저 기벌포(伎伐浦)전투에서 격파함으로써, 당의 침공을 좌절시켰다. 당은 더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고, 안동도호부는 676년에 다시 요동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나당전쟁의 종식에도 676년 이후 급박해지는 토번과의 전쟁, 토번의 동맹세력인 서돌궐의 재흥 등이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이 7세기에는 중원세력의 움직임이 동북아정세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동북아 국제관계의 독자적 운동력이 해체되고,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세력 변동의 흐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 결과 7세기에는 고구려 및 동북아의 여러 세력과 중원세력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격화되었다는 점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면이었다.
7세기 국제질서의 변동 과정에서 동북아 일대와 중원 및 북방세력간의 연관성이 밀접해졌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와 수의 전쟁 단계만 하여도 전쟁 당사자는 수와 고구려에 한정되었고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가 주변의 강국인 돌궐과 토욕혼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에 대한 지속적인 공벌을 추진한 결과가 다른 주변 제국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5세기 이래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고구려 및 돌궐토욕혼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이들 이외의 주변세력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그만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변동의 요인이 다기화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고구려의 주도권 약화와 신라의 성장은 삼국간의 항쟁을 더욱 격렬하게 촉진하고, 나아가 이러한 삼국의 항쟁에 중원세력이 개입될 개연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즉 중원세력의 입장에서는 적대세력과 동맹세력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당(唐)대에 현실화되었다. 돌궐의 경우는 내부 분열과 수의 공벌로 일찍이 그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비록 수 멸망 직후 일시 세력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과거 유연 등 북방세력이 가졌던 위협성을 중원세력에게 보여주지 못하였다.
돌궐과 고구려의 세력 약화는 요해지역에서 거란·말갈 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요해지역을 둘러싸고 중원세력과 고구려의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요해 지역이 동북아시아의 화약고와 같은 상황으로 바뀐 것도 6세기 중반 국제 정세 변동의 결과였다. 후일 고구려 국가의 해체는 거란과 말갈의 성장을 촉진하여 이들 여러 종족의 역사적 활동이 향후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왜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정세 변동에서 한 발자욱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으며, 전통적으로 백제와의 교섭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수의 등장 이후 새로이 고구려와 왜의 외교관계도 밀접해졌으며, 왜 역시 한반도 내의 정세 변동에 연관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백제 멸망 직후 이 전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왜마저도 663년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어 백촌강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 좋은 예이다.
이처럼 신라·백제·왜 등 주변 제국은 물론 거란·말갈 등이 성장하여 이들이 갖는 국제적 위상이 달라지게 되면서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과정에서는 수대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전쟁의 당사자나 참여자가 대거 늘어났다는 점이다. 본래 이 전쟁의 기본 축은 당과 고구려이지만, 당이 돌궐·거란을 동원함으로써 다수의 세력집단이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더욱 660년 백제 정벌전부터는 신라가 이 전쟁의 또다른 중심축을 맡음으로써 전쟁 수행의 주체가 확대되었음은 물론 이제 전쟁의 기본 성격도 달라지게 되었다.
한편 이와같은 정세 변화 속에서 당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국가의 역관계가 이전보다 깊은 연관을 갖고 전개되고 있었음도 주목된다. 즉 동아시아 전체의 국가간에 전개된 외교전략과 전쟁에서 상호 연동성이 훨씬 깊어진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는 수·당을 견제하고 대항하기 위한 적극적인 국가간 동맹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지만, 북방 유목국가나 내륙아시아 국가와 동맹을 시도한 것이 좋은 예이다.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나 당과 신라의 전쟁의 경우에도 대체로 북방과 서역의 정세로부터 직간접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백제 멸망 이후 670년에 신라의 당에 대한 공세는 서역의 정세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었다. 당이 660~670년 초반까지 한반도에 군사력을 집중한 결과 서역과 북방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토번의 성장, 돌궐의 재등장을 초래하게 되었고, 서역의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당의 주력이 서역으로 돌려지게 되자 신라는 나당전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676년 나당전쟁이 종식된 배경에도 토번과 서돌궐의 재흥 북방과 서역의 동요 등이 중요한 요소였다. 696년 동북방에서 거란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말갈과 고구려 유민이 독립하여 698년에 발해가 건국된 것도 그러한 동향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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