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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국제정세 변동

2. 6세기 국제정세 변동

5세기 이래의 안정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6세기 이후 서서히 변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변화는 먼저 북위의 분열로 시작되었다. 494년에 낙양 천도 이후 북위 조정은 급속한 한화정책을 추진해 갔고, 이에 따라 북쪽 변경의 선비족 출신의 무인 귀족들은 그 지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되면서 조정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523년 옥야진(沃野鎭)에서의 반란을 시작으로 하여 북위의 지배를 받던 변방의 이민족과 연결되어 서북의 6개 군진에서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뒤이어 528년 이후에는 궁정 내부의 권력투쟁이 지방 장군들의 무력과 연결되어 광범위한 내란으로 확대되었고, 그 결과 북위는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다. 즉 534년에 고환(高歡)은 스스로 효정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업성으로 천도하여 동위를 세웠고, 535년에는 우문태(宇文泰)가 장안(長安)으로 피신하고 있었던 효문제를 독살하고 문제를 즉위시켜 장안에서 서위를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북위의 왕조는 2개의 정권으로 나뉘어 근근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정치적 실권은 고씨와 우문씨 양대 군사 집단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가장 강대한 세력인 북위의 내분은 곧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남조의 양(梁)은 북위의 내분을 이용하여 524년과 526년에 북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526년의 정벌에서는 요충지인 수양(壽陽)을 회복하여 회하일대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529년에 다시 북벌을 시도하여 낙양을 점령하는 등 한때 남북조의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형세를 조성하기도 하였으나, 곧 패퇴하고 말았다. 또 547년에는 동위로부터 투항해 온 후경(侯景)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진을 도모하려다가, 거꾸로 후경의 역공을 받아 수도 건강(建康)이 함락되는 등 수년간 혼란에 빠졌다. 오히려 양은 후경의 난을 틈탄 동위와 서위의 공격을 받아 익주와 양양지역을 서위에게 빼았기고, 회남의 땅을 동위에게 점령당하여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그런데 550년에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동위의 효정제를 폐하고 북제(北齊)를 세웠고, 서위에서도 557년에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자립하여 북주(北周)를 세웠다. 이후 북제와 북주는 남북으로 흐르는 황하를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 상쟁하였다. 그리고 양에서도 북제의 침공을 격파한 진패선(陳覇先)이 556년에 양의 경제를 폐위하고 자립하여 진(陳)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후경의 난 이후 북주나 북제에게 양자강 이북의 땅을 대부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진의 영역은 양자강 이남의 일부지역에 국한되었고, 또 각지의 무장세력이 항상 내전을 일으켜 정국이 매우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북조의 공격에 저항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리하여 북위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은 다시금 북제·북주·진의 3국 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한편 북방의 유연은 북위의 내분을 틈타 점차 강성해져 갔다. 동위와 서위 및 이를 계승한 북주와 북제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로 유연의 힘을 빌리려고 경쟁하는 형편이 되었고, 유연은 이러한 역관계를 이용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워 갔다.
그런데 6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몽고 고원에도 세력 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552년에 신흥 돌궐(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몽고고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돌궐은 본래 흉노족의 일부로 알타이산 남쪽에서 유목하면서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세기 중엽 이후 점차 강성해져서 아사나토문(阿史那土門)이 유연을 대파하고 돌궐국을 건설하였다. 이후로 돌궐은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여 점차 동쪽으로 밀려왔다.
일찍부터 몽고고원의 세력과 관계를 맺으면서 북위를 견제하였던 고구려로서는 이러한 세력 교체를 예의 주시하였다. 특히 돌궐에 의해 격파된 유연의 남은 무리들이 남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요하 상류의 거란족 지역과 북제의 북경에 연쇄적인 파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에 따른 무력 충돌과 군사적 동원이 빈번해지면서, 이 지역 일대에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고구려는 돌궐의 동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돌궐의 동진이 계속되어 흥안령을 넘어 거란족과 말갈족에 그 세력이 미치고, 심지어 고구려 국경을 침범하는 사태에 이르자, 이후 고구려는 돌궐과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북제와 북주의 등장으로 북중국과 북방지역에서 정세변화가 일어났다. 552년에 북제는 고막해(庫莫奚)의 정벌끝에 문선제(文宣帝)가 영주(營州)에 머물며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북위 말기의 혼란기에 고구려로 이주하였던 유민 5천호를 쇄환해 갔다. 이듬해에도 북제의 문선제는 거란족에 대한 대규모 친정을 감행하면서 요서의 창려성까지 직접 순행하였다.
이러한 북제와의 긴장도 남조인 진과의 연결을 적극적으로 꾀함으로서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552년 이후 북제가 망할 때까지 25년 동안 고구려는 북제에 4차례 입공한 데 비하여, 진에는 5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특히 565년 북제와 신라가 외교관계를 맺은 후부터는 북제와의 관계를 끊고 진과의 관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대외 정책과 근본적으로는 북제를 포함한 대륙정세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와 북제 간에도 평온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도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동이 일어났다. 즉 551년에는 고구려의 내분을 포착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게 되어 한반도에서의 고구려의 주도권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553년에 신라가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공격하여 이를 독차지하고, 이듬해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가 깨졌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의 상쟁이 치열해졌다.
그러면 6세기 중반의 국제 정세의 변동 속에서 백제와 신라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을까? 백제는 전통적으로 남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570년에는 북제와, 577년에는 북주와 각각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북위가 무너지고 북제·북주가 등장하면서 고구려와 대립하게 되자, 이들 북조 국가와의 연결을 모색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외교 전략으로 보인다. 또 544년의 관산성(管山城) 패전 이후 적대관계로 돌아선 신라가 564년에 북제와 외교관계를 맺자, 이를 외교적으로 견제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도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적극적으로 중국의 제국가와 외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는 북제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남조인 진과 활발한 교섭을 맺고 있었다. 이 역시 백제를 견제하려는 외교 정책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대고구려 견제책으로서 북제 등의 북조 국가와의 교섭에는 소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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