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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국제관계

1. 5세기 국제관계

420년 송(宋)의 건국,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433·434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 439년 북위의 화북지역 통일 등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 환경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130여 년이나 계속된 중국의 5호 16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북위가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가 성립하였다. 즉 가장 강력한 세력인 북위를 가운데 두고 중국의 남조 송(宋)와 북방의 유연(柔然) 및 서의 토욕혼(吐谷渾), 그리고 동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며 북위를 포위 견제하는 한편, 각자 북위와 우호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가의 역관계에 의해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성격이 규정되었다. 한반도 내 삼국의 대외관계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로부터 일면 규정을 받으며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 간에 맺어진 적대 관계의 중심축은 북위 대 남조국가, 북위 대 유연이었다. 특히 최강대국인 북위를 사이에 두고 남조 국가와 유연은 상호 연결하여 북위를 남북 양쪽에서 위협하였다. 북위와 남조 국가는 스스로 중화의 정통을 자처하며 중국의 통일을 지향하였기 때문에 치열한 상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우월한 국력을 갖는 북위가 끝내 남조를 정복하지 못하였던 국제적 배경은 북쪽 유연의 위협 때문이었다. 이는 “유연을 꺾지 못하면 남적[南賊 : 남조]을 방어할 수 없다”는 북위의 인식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유연은 그 흥기 과정이 북위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결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충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특히 북위는 대남조 전략의 전제로서 유연의 정벌을 빈번히 수행하였으며, 때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조 국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이들 삼국 간에는 역관계의 연동성(連動性)을 바탕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균형을 기본 축으로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동북아 방면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고구려는 이들 3국과 등거리 외교관계를 맺으며,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고구려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은 일차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강대국 북위에 대한 교섭과 견제였다. 그러면 고구려와 북위(北魏)의 관계를 살펴보자.
430년대에 들어서 북중국을 제압한 북위가 그 여세를 몰아 요서 지역의 북연(北燕)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의 동진(東進)에 대응하여 일단 435년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을 받음으로써 외교관계를 열었다. 그러나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북연이 북위에 밀리기 시작하자 큰 위협을 느끼고, 북연을 지원하며 북위의 동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갔다. 436년에 북위군이 북연의 수도 화룡성(和龍城)에 진군하자, 고구려 역시 수만의 군대를 보내어 북위군과 대치하면서, 북연왕 풍홍(馮弘)과 다수의 주민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북위는 곧 풍홍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연의 침입을 경계한 북위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군사적 대결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구려도 인접한 강국인 북위와 언제까지나 대립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특히 427년의 평양천도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서변의 안정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고구려는 남조 송 및 유연과 연결하여 북위를 견제하는 한편, 직접적으로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462년에 고구려는 20여 년만에 다시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이후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시종 우호적이고 순탄한 것 만은 아니었다. 466년에는 북위의 청혼을 고구려가 거절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잠시 냉각되기도 하였다. 또 472년에 고구려의 남진에 위협을 느낀 백제가 북위에 청병을 요청하면서 양국간에 분쟁의 소지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 북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분쟁에 개입할 의사는 없었으나,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또 고구려와 여러 차례 분쟁을 일으켰던 물길(勿吉)이 북위에 접근하자, 고구려는 이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북위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가 송과 외교관계를 맺자 이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였으며, 479년에는 고구려가 유연과 합세하여 동북 내몽고 지역에 있던 지두우(地豆于)를 분할 점령하려고 하자, 이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양국은 서로를 잠재적인 위협세력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상호 이해관계의 충돌의 계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양국이 모두 현실적으로 군사적인 대결 상대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양국 간의 분쟁을 확대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아래에서 살펴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가 북위의 주된 적대 세력인 남조국가 및 유연과의 연결을 도모하는 견제책을 구사하자, 적대세력으로 포위된 북위 역시 가급적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양국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며주 136
각주 136)
북위 세종(世宗)이 고구려 사신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북위가 고구려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가 대대로 해외(海外)를 제압하고 구이(九夷)를 정벌해 왔다.… 그대의 군주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로 못된 무리를 멸하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라.”(『魏書』 권100, 高句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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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번한 사신 교환과 문물교류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중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북위에 대한 견제책으로 남조 국가와도 통교하였다. 송과는 북연왕 풍홍에 대한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한차례 군사적 충돌도 있었지만, 서로 북위의 위협 때문에 곧 관계를 개선하였다. 그 후 송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에 전마를 요구하고, 이에 고구려도 439년에 말 80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가 개선된 뒤에도 북위에 대한 외교적 견제책으로 남조와의 교섭을 계속하였다.
고구려와 유연의 교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가 냉각 상태에 있었던 430년대 말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간에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 479년에 고구려와 유연이 연합하여 지두우(地豆于)의 분할을 시도한 것을 보면 이 시
이와같은 고구려의 대외정책 속에서 당시 고구려와 동아시아의 제국가 사이에는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즉 북중국의 국가와는 5세기 초에 후연과의 전쟁을 치룬 이후 598년 수와의 전쟁을 치루기까지 한차례의 전쟁도 없었고, 북방 유목국가와도 6세기 후반 돌궐과의 충돌이 일어나기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세력이나 북방 유목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가운데 고구려는 남진정책과 독자적 세력권의 구축을 추구하였다. 즉 세력권의 외곽에 거란족와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하며, 남실위(南室韋)에 철을 공급하면서 내몽고 동북부 지역에도 세력을 뻗쳤다. 또 한반도 내에서는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압박하면서 한반도 중북부 일대를 차지하였고, 신라에도 정치적·군사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송 이래 남조국가들과 외교 교섭이 잦았지만, 이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전략은 아니다. 왜냐하면 북위를 견제하려는 남조의 입장에서는 백제보다는 고구려가 훨씬 유용한 외교적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중국 내의 세력관계가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삼국 관계에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 국제정세의 주요 변수였다. 고구려의 남하에 의해 금관가야가 붕괴되면서 가야지역 내의 정세가 변화하고, 421년 이후 왜가 송과 직접 교섭함에 따라, 이제 4세기 이후에 구축된 백제 중심의 교역망과 동맹체제는 균열되었다. 이에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에 주력하였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상황이었기에, 나제동맹은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특히 고구려의 군사적 남하 위협이 커져가면서, 나제동맹도 군사동맹으로 이어졌다.
434년의 나제동맹은 그 이전의 고구려와 백제를 양축으로 형성되었던 동맹 구도를 해체시키고 새롭게 국제질서를 재편한 계기가 되었다. 이 나제동맹은 교역망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군사적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결과로서, 이제는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요인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과거 고구려·백제 중심의 교역망과 동맹체계가 해체된 데에는 신라나 왜의 국가적 성장이 주된 요인이 되었다.
한편 백제-가야-왜, 고구려-신라라는 양대 교역망이 무너지면서, 가야·왜·신라는 새로운 교역망 내지는 교섭의 루트를 찾아야만 하였다. 이에 교역망의 중간 지대를 점하고 있던 가야지역을 둘러싸고, 백제는 물론 신라와 왜의 세력까지 집중되면서 5세기 가야 지역의 정치적 변동이 격렬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5~6세기에는 만주·한반도·일본 지역의 국제관계가 중국의 남북조나 북방 유목세력의 국제관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개되어 왔다. 물론 양 권역이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세력변동의 연관성이 미약하였다.
한편 양 권역의 여러 국가 간의 교섭을 매개하는 외교형식은 주로 책봉·조공관계였다. 고구려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 교섭관계를 맺는 한편으로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남조와의 교섭을 적극 모색하였다. 북위 역시 배후의 안정이라는 면에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 남조의 입장도 북위를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고구려와 외교적 이해가 일치하고 있었다. 백제도 남조와 교섭하고 있으나 그 성격은 고구려와 전혀 다르며, 오히려 백제는 대고구려전략을 위해 왜나 신라와의 교섭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왜 역시 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 외에 남조와 직접 교섭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 이외에 신라·가야·왜 등의 국가적 성장으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더욱 다원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북아에서 중국의 책봉·조공체제가 갖는 국제질서 상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 등 동북아의 제국가가 중국의 제왕조와 맺고 있는 책봉·조공관계는 외교 관계의 한 형식으로서 일정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면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봉이나 조공이 갖는 현실적인 기능도 서로 다르고, 이에 따라 책봉·조공관계에 대한 서로의 인식도 차별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적 인식을 전제로 남북조시기의 책봉·조공이란 외교형식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은 피책봉국의 자립성과 독자성에 대한 남북조 왕조의 용인이었다. 남북조시기는 중원 왕조가 분열됨으로써 주변의 제국가, 즉 피책봉국이자 조공국의 주체적 입장이 책봉·조공관계에서 보다 강하게 드러나는 시기였다.

  • 각주 136)
    북위 세종(世宗)이 고구려 사신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북위가 고구려 세력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가 대대로 해외(海外)를 제압하고 구이(九夷)를 정벌해 왔다.… 그대의 군주에게 짐의 뜻을 전하여 위엄과 회유로 못된 무리를 멸하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라.”(『魏書』 권100, 高句麗傳)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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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국제관계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