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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국제관계

1. 1~3세기 국제관계

4세기 이전 즉 한반도의 제종족과 국가들이 일련의 통합 과정을 거쳐 삼국과 가야로 정립되기 이전에는 중국 군현과 제국가간의 교섭과 충돌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한(漢)은 중국 군현을 매개로 하여 소국에 대한 기미외교정책을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며, 이에 대해 삼국은 중국 군현과의 항쟁을 통해 각각 소국의 통합을 달성하여 집권적 국가체제를 형성해 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국 군현의 퇴출과 삼국의 정립으로 나타났다. 물론 삼국은 국가형성기의 여러 조건에 의하여 발전 단계를 달리하였으며, 이에 따라 고구려가 가장 일찍부터 중국 군현과 빈번한 충돌·교섭 관계를 가졌으며, 신라의 경우에는 4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중원 왕조와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중국 군현을 매개로 한 중국의 동방 정책은 한반도·만주의 다수 소국에 대한 개별적인 의책(衣幘)·인수(印綬)의 사여를 통한 분리정책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 기원 전후 시기부터 이러한 군현의 분열 정책을 극복하고 중앙권력을 강화시켜, 태조왕 대에는 중국 군현 및 요동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태조왕대의 대중 교섭이 문헌사료에는 ‘조공’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는 조공관계라기 보다는 요동진출에 따른 실리 확보를 위한 군사 외교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후 공손씨 정권의 요동 장악으로 중단되었던 고구려의 대중 외교는 동천왕대에 들어 중국의 삼국분립기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을 배경으로 그 활동 폭이 확대되었다.
즉 위(魏)와의 교섭을 통해 공손씨 세력을 제거하고, 한편으로는 오(吳)와의 통교로 위의 요동 진출에 따른 위협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 뒤 동천왕대에 중국 군현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관구검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지만, 미천왕대에는 북방 유목족의 남하 및 진(晉) 세력의 후퇴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마침내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을 퇴출 시키는데 성공하게 된다.
삼한(三韓)의 경우는 3세기까지도 중원왕조의 분열 정책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마한의 주변 소국을 통합해 간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 군현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 백제는 요동의 모용씨 세력 및 동진과 통교하는 등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신라는 중국 군현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섭의 양상도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기 보다는 조공 무역의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세기 말 진한(辰韓) 제소국의 통합에 성공한 이후에는 서진(西晋)과 통교하는 등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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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국제관계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