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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고대 동아시아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Ⅱ. 고대 동아시아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고대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다수의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교섭과 충돌은 구체적으로 외교와 전쟁이라는 두 국면이 빈번하게 교차되면서 전개되었다. 특히 중원세력과 주변 국가 사이에 맺어진 외교관계는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책봉·조공 문제는 그동안 정치적 차원에서 동아시아를 묶는 연결고리로 주목되어온 주제이다. 「교육과정」에서도 “동아시아 외교형식인 조공·책봉 관계를 각국의 상호 필요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각국의 상호 필요라는 관점이라면 굳이 조공·책봉이라는 주제를 설정할 이유도 없으며, 국제적 역관계론(力關係論)으로 설명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책봉·조공을 통하여 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혹은 국제관계를 파악하려고 할 때에는 단순히 국가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중국 중심의 책봉·조공체제가 갖는 보편적 질서의 존재 여부나 그 성격, 그리고 실제적으로 전개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책봉·조공 체제상에 표현된 국제질서의 연관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책봉과 조공이라는 틀로 설명하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관점이 놓여있다.주 130
각주 130)
1970년대 이후 고대 동아시아 국가간의 국제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일본학계에서 책봉체제론을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책봉·조공을 중심으로 파악한 국제관계를 ‘조공관계(朝貢關係)’ ‘책봉체제(冊封體制)’ ‘봉조체제(封朝體制)’ ‘책봉조공체제’ 등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 동향을 서영수는 조공관계론, 책봉체제론, 국제적 계기론, 역학관계론으로 정리하고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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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중국과 주변 국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조공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이해이다. 즉 조공을 종주국과 종속국의 정치적 신속(臣屬) 관계로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조공외교의 이면에 담겨있는 실리외교를 강조하기도 하며, 조공을 통한 선진문화의 수용과 경제적 의미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조공이 갖는 차등적 대외 관계를 전제로 하는 중국적 천하질서(天下秩序)를 인정한 연구로서, 이 시기 국제관계의 동태적 면모나 각 국가가 갖는 주체적 성격을 간과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다음 동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설정하고 그것을 책봉·조공관계를 통하여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이 있다. 즉 중국 중심의 책봉체제에 의해 규제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이다.주 131
각주 131)
일본학계의 책봉체제론은 중국의 선진적인 정치체제와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동아시아 각국은 이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공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에 도움을 얻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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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체 규정력을 갖는 동아시아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또 책봉이 형식 이상의 실질적 규정력을 갖는다고 보기도 곤란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책봉체제론(冊封體制論)은 국제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나, 주변 여러 국가의 주체적 역할이 간과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각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여,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정책은 이들 여러 국가가 갖는 힘의 우열 및 이 힘의 우열을 조정하는 세력균형에 의해 가변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국제질서의 역관계에 의해, 또는 대외교섭을 수행하는 국가의 내부적 요인에 의해 다수 국가 간의 대외교섭의 내용도 질적인 차이가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책봉과 조공관계의 의미에는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관계론이나 국제적계기론(國際的契機論)은 동아시아에서 빈번하게 전개된 충돌과 교섭의 역사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주 132
각주 132)
역관계론이나 국제적계기론은 기본적으로 책봉체제론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국제관계가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의 국가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되, 각 국가의 역할과 입장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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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봉과 조공이라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국제관계를 어떻게 투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그리 묘안을 찾기 어렵다. 물론 책봉과 조공이라는 외교형식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중국적 세계 질서를 규정하는 양식은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책봉과 조공은 그것이 갖는 보편적인 형식에도 불구하고 각 국가별로 맺고 있는 내용성이 너무 차별적이기 때문에 책봉·조공 체제를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체제로 파악하기 곤란하다는 측면은 특히 4~6세기의 책봉·조공 체제 운영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역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여전히 제기된다. 시기별 추이를 단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동태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지만,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시기 국가간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요소를 더욱 넓게 살펴야 할 것으로 본다.
또한 7세기에 들어서 신라가 수·당과의 외교를 적극화하여 결국 나당군사동맹이 성립하고, 이 과정에서 대등한 외교관계의 한 표현에 불과하던 책봉·조공외교가 정치적 신속을 전제로 하는 차등적 외교관계로 변모하게 된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더욱 통일 이후 신라 중대(中代) 왕권이 추진한 한화(漢化)정책은 중국 중심의 명분론적 천하관을 보편화시킴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한중간의 조공관계는 비록 의례적인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관념적·실질적으로 정치적 차등질서를 전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유의된다. 이점에서 같은 책봉·조공관계라고 하더라도 7세기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일정한 성격 차이가 나타난다. 따라서 책봉·조공관계를 외교관계의 형식 속에 파악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시기적 차별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왕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책봉이 갖는 성격과 그 변화상에 대해 살펴보자.
조공은 주변 민족의 군장이 중국의 황제에게 신속하여 내조(來朝)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례적 형식이며, 책봉은 조공에 대응하여 중국의 황제가 주변 민족의 군장에게 특정의 관작과 이에 상응하는 물품을 사여함으로서 그의 자격과 지위를 공인하여 신속시키는 양식이다. 따라서 조공과 책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동질의 양식이다. 이러한 조공과 책봉은 고대 중국과 주변 민족의 관계를 규정짓는 독특한 제도적 양식으로 전개되었다.
본래 조공은 중국 서주(西周)의 종법적 봉건제도 아래에서 제후가 정기적으로 천자(天子)에게 조관(朝觀)하고 공물을 바침으로써 군신간의 의리를 밝히고 천자와 제후국 사이의 결속을 공고히하기 위하여 고안된 정치의례이다.주 133
각주 133)
서주시기의 조공은 ‘조(朝)’와 ‘공(貢)’의 의미가 달랐는데 ‘조’는 주의 봉건제도 내에서 제후가 일정기간을 두고 직접 주(周)의 천자를 배알하는 일, ‘공’은 천자에게 입조(入朝) 시에 수반하는 공물의 공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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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통일 왕조인 한(漢)왕조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 이루어지던 조공 의례는 중국과 주변 국가들 사이의 국제관계로까지 그 외연이 확장되었다.주 134
각주 134)
진(秦)의 중원 통일과 군현제(郡縣制)의 실시는 선진(先秦)시대 제후 국가간의 관계를 설정하였던 책봉조제(冊封朝制)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지만, 한 왕조 초기에는 봉건제도의 부활에 의해 책봉·조공제도가 다시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제후왕(諸侯王)을 책봉함으로서 황제 이외의 분권적 권력을 인정하였던 것이 주변국가와의 사이에 국제관계를 맺는 과정에 영향을 주어 책봉·조공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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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조는 황제 지배체제의 외양을 갖추고자 주변의 여러 민족과 관작(官爵)수여를 통한 책봉관계를 맺음으로써, 책봉·조공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하는 특수한 외교적 질서로 성립되었다.주 135
각주 135)
한(漢) 나라 초기 책봉·조공은 흉노(匈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화친조약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한은 흉노의 선례를 통하여 이민족 군주에 대한 책봉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책봉·조공을 확대하였고, 점차 외교적인 제도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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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漢)시기의 책봉·조공관계도 정치적 성격보다는 한왕조 중심의 천하에 형식적으로 귀부한다는 의미가 강조되면서 의례적 행위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漢)이 소위 조공국에 보내야했던 회사(回賜)의 양이 적지 않아 국가재정에 부담스러운 정도에까지 이르렀음을 보면, 책봉·조공제도가 형식적으로는 천자의 지배 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명분상의 표현일 뿐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제도로서 성립된 책봉·조공관계는 당대의 국제관계의 변동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다. 즉 책봉·조공관계로 나타나는 중국왕조와 주변 제국가간의 주종관계는 중국 왕조의 이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의 현실적 외교관계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당시 책봉·조공제도에 대한 책봉국가인 중국과 피책봉국가 간의 이해는 동질적이지 않았다. 즉 한 제국의 입장과 책봉·조공체제 속에 편입된 타국간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형식적이나마 신속 관계를 관철하는 것이 국가적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주변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형식적인 신속 관계의 성립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치군사상 권위의 획득이나 경제적문화적 혜택이라는 실리가 더욱 중요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책봉·조공체제는 중원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간의 유대를 확립하기 위한 형식으로 활용되었던 측면이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위진남북조시대는 책봉·조공관계에 본질적인 변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책봉의 주체가 다원화되었다는 점이다. 피책봉국도 하나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북위(北魏) 및 남조의 여러 왕조로부터 동시에 책봉을 받는 일이 빈번하였다. 천하를 분점하였던 다수의 황제의 등장으로 인해, 위진남북조 시기의 황제는 진한과 같이 실제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유일한 권력자가 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황제 지배체제와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하는 형식이었던 책봉·조공 제도도 원형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실 책봉·조공관계로 구성된 국제관계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양자 관계라는 측면이 오히려 더 강하다. 조공의 경우에도 책봉국이 강제한 납부 형식이라기보다, 오히려 조공국이 경제적 이익을 더 얻을 수 있는 자발적인 측면이 있었다.
더욱 책봉·조공관계는 여러 층위를 갖고 있었다. 어느 정도 구속력을 갖는 전형적인 조공관계뿐만 아니라 교류를 위한 형식적인 관계도 있다. 조공하는 왕조로서는 국내 지배의 정통성을 보증받는 한편, 경제적 이익과 선진문화를 흡수하는 창구로 활용할 수 있고, 때로는 외교관계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 책봉하는 왕조에서는 이적(夷狄)도 귀의하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수명천자(受命天子)의 정통성이라는 명분을 얻어 대국(大國)으로서의 위신을 세울 수 있고, 또 변경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중원왕조가 책봉호(冊封號)를 통하여 피책봉국의 국제적 지위를 규정하거나, 피책봉국의 경우에도 책봉호를 통하여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확보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자료로 볼 때 피책봉국의 군주가 이 책봉호를 국제관계에 활용하거나 실제로 책봉호가 그러한 규정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지적이 타당하다. 결국 책봉·조공은 중국 왕조와 당사국 간의 문제이지,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하나의 체제 안에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외교 질서로 보기는 어렵다.
조공이나 책봉이 효능을 발휘하려면 상대국이 그것을 인정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 필수 전제이다. 책봉을 행하는 중원왕조는 관작책봉이 동아시아 주변 국가에 ‘내신(內臣)’ 지역과 다름없이 통용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아울러 책봉된 관작의 고하(高下)가 피책봉국의 현실적인 국제적 위상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봉관작 자체가 피책봉국의 국내에서도 거의 통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원왕조의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국제관계에서도 그 효능이 의심스러우며, 더욱 책봉국 스스로가 그러한 책봉 질서에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인다면 책봉이란 피책봉국의 위상이나 실제 기능의 문제라기보다 책봉국의 희망과 이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위진남북조시기는 대외적으로 책봉·조공관계가 제도화되는 시기로 평가된다. 중국적 질서가 붕괴되어 다원화된 외교 관계가 조성 유지되어야할 필요가 절실하던 위진남북조시기에 조공·책봉제도가 정립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다원적 외교 질서 자체가 책봉·조공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봉의 주체는 여전히 중원 왕조였으므로, 책봉 칭호는 중국식의 관작이 적용되었다. 이러한 책봉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리 선명하게 설명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책봉 관작이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고 있기 때문인데, 그 변화의 원인은 중국 내에서의 관료제도의 변화와 연계되어 있다. 또한 상대 국가에 따라 칭호도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위진남북조처럼 중국의 여러 왕조가 각기 책봉을 행하였던 시기에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한(漢)대의 책봉호는 주로 작위(爵位)를 위주로 하는 것으로서 왕(王)·후(侯)·선우(單于) 등을 사용하였으며, 간혹 한의 관직을 함께 책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한 제국이 해체된 후 위진남북조라는 분열의 시기에는 책봉호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면서 점차 제도화하였는데, 그 기본적인 형태는 ‘지절(持節)·도독(都督)·장군(將軍)·자사(刺史) / 태수(太守)·공(公)왕(王)’ 등으로 구성된 칭호였다. 각각의 관작은 모두 특정한 권리와 의미를 갖는데, 그 중 장군호가 피책봉자의 위계를 표시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책봉 관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군사(諸軍事)나 사지절(使持節) 등 본래 임시적·특권적 직무가 관직화된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도독○제군사(都督某地諸軍事)’에는 특정한 행정지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책봉국의 통제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의 이미 존재하지 않는 주군명(州郡名)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변 민족의 군장들에게도 내신과 다름없는 관작이나 지방관직을 수여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즉 이 시기의 책봉호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시중(侍中)’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의 내신 관직이 제수되었는데, 이 역시 특별한 직사가 없는 가관(加官)이나 산계(散階)에 불과하며 명예직에 가까운 관직들이 많았다. 이러한 예들은 책봉호의 허구성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 책봉호가 갖는 특징은 본래 국내의 관리들에게 부여한 칭호를 외국의 군장들에게도 책봉호로 부여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이 책봉호가 허구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편으로 책봉호에는 다양한 국제관계의 성격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예컨데 삼국에게 주어진 칭호에서도 책봉국과 피책봉국과의 긴밀도를 살펴볼 수가 있다. 예를들어 남조의 양무제(梁武帝)는 고구려 및 백제의 왕에게 동시에 책봉을 하였는데, 백제왕에게는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책봉하고, 고구려왕에게는 ‘持節 督營平二州諸軍事 寧東將軍 高句麗王’을 제수하였다. 즉 고구려왕을 백제왕보다 한 등급씩 낮은 관직을 줌으로서 백제와의 우위를 표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조 양(梁)과 백제는 지리적으로도 가까울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이미 북위와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책봉 관작은 양국간의 긴밀도나 중요도에 따라 승강(昇降)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책봉·조공관계가 어디까지나 한쪽의 일방적인 권리나 의무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협력을 전제로 해서 성립되는 것임을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책봉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중국 왕조의 관작이 피책봉 국왕의 권위를 높여주어 국내 권력의 유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장군호(將軍號)의 높고 낮음, 품작(品爵)의 상하는 당시 중원왕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사회에서 비교 우열의 기준이 되었고, 특정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나라들 사이에는 중요한 관심사가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책봉의 품작은 삼국 가운데 경우 고구려가 제일 높았고, 이 점은 진(晉) 이래 중원왕조의 책봉 원칙이었던 같다. 수·당의 건국 초기에는 백제와 신라는 동등으로 하고, 고구려 다음에 병렬하였다. 즉 책봉 시에 품작의 고저가 나름으로 의미가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당 조정 내의 조례 시에 각국 사신 간의 서열과도 관련이 있었다. 각국 사신 사이에 일어난 소위 ‘쟁장(爭長)’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역대로 고구려가 받은 책봉호가 가장 최고위인 예가 많았던 면이나, 아울러 동방 사회에 대한 대외업무를 관장하던 관직인 동이교위(東夷校尉)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郞將)을 수여받은 사실은, 북중국 왕조가 책봉호를 통해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한 결과이다. 특히 북위가 동방의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면서도 고구려 외에는 일체의 책봉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 이루어지는 책봉·조공관계가 오히려 고구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공인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 각주 130)
    1970년대 이후 고대 동아시아 국가간의 국제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일본학계에서 책봉체제론을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책봉·조공을 중심으로 파악한 국제관계를 ‘조공관계(朝貢關係)’ ‘책봉체제(冊封體制)’ ‘봉조체제(封朝體制)’ ‘책봉조공체제’ 등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고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 동향을 서영수는 조공관계론, 책봉체제론, 국제적 계기론, 역학관계론으로 정리하고 있어 좋은 참고가 된다. 바로가기
  • 각주 131)
    일본학계의 책봉체제론은 중국의 선진적인 정치체제와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동아시아 각국은 이를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공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에 도움을 얻었다고 설명한다. 바로가기
  • 각주 132)
    역관계론이나 국제적계기론은 기본적으로 책봉체제론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국제관계가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의 국가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되, 각 국가의 역할과 입장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바로가기
  • 각주 133)
    서주시기의 조공은 ‘조(朝)’와 ‘공(貢)’의 의미가 달랐는데 ‘조’는 주의 봉건제도 내에서 제후가 일정기간을 두고 직접 주(周)의 천자를 배알하는 일, ‘공’은 천자에게 입조(入朝) 시에 수반하는 공물의 공여를 뜻한다. 바로가기
  • 각주 134)
    진(秦)의 중원 통일과 군현제(郡縣制)의 실시는 선진(先秦)시대 제후 국가간의 관계를 설정하였던 책봉조제(冊封朝制)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지만, 한 왕조 초기에는 봉건제도의 부활에 의해 책봉·조공제도가 다시 실시되었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제후왕(諸侯王)을 책봉함으로서 황제 이외의 분권적 권력을 인정하였던 것이 주변국가와의 사이에 국제관계를 맺는 과정에 영향을 주어 책봉·조공제도를 적용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135)
    한(漢) 나라 초기 책봉·조공은 흉노(匈奴)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화친조약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한은 흉노의 선례를 통하여 이민족 군주에 대한 책봉을 통해 변경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책봉·조공을 확대하였고, 점차 외교적인 제도로 정착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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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아시아 조공·책봉관계의 성격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