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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수용과 그 배경

1. 율령수용과 그 배경

고구려는 373년(소수림왕 3)에 율령을 반포하였고, 신라는 520년(법흥왕 7)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백제는 언제 율령을 반포하였는가를 알려주는 자료가 전하지 않는다. 율령의 반포는 형률(刑律)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더불어 관료기구의 운영에 필요한 행정법규의 정비를 전제로 한다.
3세기 중반 고구려에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家)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妻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았다.주 112
각주 112)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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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까지 사형을 선고할 정도의 중죄(重罪)에 대한 형률규정이 정비되지 않았으므로 제가들이 평의하여 처결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주서』 고려전에 모반한 사람과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재산을 관에서 몰수하였다고 전하는 것에서 6세기 중·후반 고구려에서 중죄에 대한 처벌규정이 정비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인(穢人)들이 수묘(守墓)의 법칙(法則)을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를 더 데려왔다’라거나 ‘왕께서 법제를 정하기를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말라. 만약에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능비를 건립한 5세기 전반에 왕릉을 수묘하는 법칙을 규정한 법령이 존재하였고, 아울러 교령(敎令)으로 새로운 법령을 공포하였음을 알려준다. 3세기 중반에서 5세기 전반 사이에 형율을 규정한 성문법전을 편찬하였음이 확실시되는데, 구체적으로 율령을 반포한 373년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524년(법흥왕)에 건립된 울진봉평신라비에 ‘노인법(奴人法)’이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의 주민들을 노인으로 편제하고, 그들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규정한 법령이었다. 단양적성신라비에 ‘국법(國法)’ ‘적성전사법(赤城佃舍法)’이 전하고, 남산신성비에 성을 쌓고 3년 이내에 무너지면,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령이 존재하였음을 말해주는 표현이 나온다. 520년 율령을 반포한 이후에 다양한 법령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특히 울진봉평신라비에서 죄를 지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男弥只村)에 대하여 여러 노인법에 따라 처결하라고 교시한 내용이 전하여서 524년 무렵에 범죄자를 법령에 의거하여 처벌하였음을 알려주어 주목을 끈다. 더구나 여기에 구체적으로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장형(杖刑)을 부과하였다는 내용까지 나오고 있다.
503년(지증왕 4) 무렵에 신라정부가 진이마촌(珍而麻村)에서 발생한 어떤 재물(財物)을 둘러싼 분쟁을 전세 2왕(사부지왕(실성왕)과 내지왕(눌지왕))의 교시를 판례처럼 인용하여 조정한 사례를 영일냉수리신라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쟁에서 패한 사람들에게 분쟁대상에 대하여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말도록 경고하였을 뿐이고 그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비슷한 모습은 501년(지증왕 2)에 건립된 포항중성리신라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누군가가 또는 어떤 세력집단이 어떤 대상을 빼앗아 사단이 발생하자,주 113
각주 113)
포항중성리신라비 가운데 ‘干居伐 壹斯利 蘇豆古利村 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 卜步干支 朱斤壹金知 珍伐壹昔(?)云 豆智沙干支宮 日夫智宮 奪尒 今更還 牟旦伐喙作民沙干支’ 부분을 어떻게 끊어 읽고, 또 ‘奪’의 주어를 어느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분쟁 대상과 원고 및 피고의 해석이 달라진다. 종래에 이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여기서 그것에 대하여 더 이상 자세하게 논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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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부(部)에 소속된 사람들이 모여 그것을 본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분쟁을 조정하고, 최종적으로 지절로갈문왕(只折盧葛文王: 지증왕) 등 3인이 교시를 내려 그 조정안을 추인하고 있는 모습이 전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서도 어떤 대상을 빼앗은 존재에 대한 처벌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의 내용은 지증왕대 초반에 형률에 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음을 추론케 한다. 이것은 524년 무렵에 죄를 범한 존재에 대하여 특정 법령을 적용하거나 교령에 의거하여 처벌한 것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율령을 반포한 520년 무렵에 신라에서 형법에 관계된 제반 사항을 성문법전의 형식으로 정비하였다고 보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이왕 29년(262)에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장물(臟物)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구당서』와 『신당서』 백제전에 동일한 법률규정이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의 기록은 후대의 사실을 고이왕대에 소급하여 기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주서』 백제전에서 모반하거나 전쟁에서 퇴각한 자 및 살인을 한 자, 물건을 훔친 자, 부인으로서 간음한 자 등에 대한 형벌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5방성(方城)의 하나로서 웅진성(熊津城)을 소개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된 형법조항은 사비시기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늦어도 사비시대에 형률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언제 처음 그렇게 했을 지에 대해서는 담로제의 실시 시기 및 16관등의 정비시기 등과 연관시켜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지 형률체계의 정비에 기초해서 율령을 반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과 더불어 나름대로 관료기구를 운영하기 위한 행정법규를 제정하여 율령이 모두 갖추어진 상황에서 율령의 반포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4세기 전후한 시기에 형류와 사자류의 관등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관등체계를 정비하였다.주 114
각주 114)
초기에 고구려는 다원적이고 중층적인 관등체계를 운영하였다. 『주서』 고려전에 고구려에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대형(大兄), 소형(小兄), 의사사(意俟奢), 오졸(烏拙),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사자(大使者), 소사자(小使者), 욕사(褥奢), 예속(翳屬), 선인(仙人), 욕살(褥薩) 등의 관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어느 시기엔가 사자류와 형류의 관등을 중심으로 새로이 관등체계를 정비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2세기 후반부터 대사자나 소형의 관등을 수여받은 관리가 등장한다. 반면에 『주서』에 패자나 우태 등의 관등명이 보이지 않는다. 중천왕 7년(254)에 비류(沸流) 패자 음우(陰友)가 국상(國相)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패자에 관한 마지막 사례에 해당한다. 음우는 서천왕 2년(271)에 사망하였다. 이때까지 음우의 관등은 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에 그의 아들 상루(尙婁)가 국상에 임명되었다가 봉상왕 3년(294)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남부(南部) 대주부(大主簿) 창조리(倉助利)가 국상에 임명되었다. 상루의 관등이나 소속 부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 음우의 관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아서 비류부 소속이면서 패자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추정된다. 패자란 관등이 3세기 후반까지 존재하였으므로 『주서』에 전하는 관등체계는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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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고구려에서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실현하고, 수사(守事) 또는 태수(太守), 수(守) 및 재(宰)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였다.주 115
각주 115)
광개토왕릉비에 동옥저지역인 비리성(碑利城: 함남 안변)과 동해고(東海賈)의 주민을 수묘인으로 차출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이들을 광개토왕대에 새로 약취하여온 주민, 즉 신민(新民)에 대비하여 구민(舊民)이라고 불렀다. 신민과 구민은 고구려가 개별인신적으로 지배하는 백성을 가리킨다. 3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는 동옥저의 자치적인 지배권을 인정하고 공납을 수취하였다고 전한다. 이후부터 5세기 전반 사이에 고구려가 동옥저의 자치력을 부정하고 직접 지배를 실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두루묘지에 광개토왕대에 모두루를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로 임명하였다. 중원고구려비에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가 나오고, 『삼국사기』에서 봉상왕 5년(296)에 고노자(高奴子)를 요동에 있는 신성(新城)의 태수(太守)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압록재(鴨淥宰)가 존재하였고, 봉상왕 2년(293)에 북부 소형 고노자의 관직이 신성재(新城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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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감안하건대, 고구려는 4세기 전후에 일차적으로 관료기구를 운영하기 위한 행정법규를 정비하였고, 율령이 반포되기 이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그것을 개정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여러 차례 개정된 행정법규를 체계적으로 다시금 정비하고, 중국의 율령을 참조하여 형벌에 관한 규정을 성문법전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을 기초로 373년에 율령을 공식 반포하였다고 봄이 합리적일 듯싶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유리이사금 9년(32)에 17관등을 모두 설치하였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현재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공복(公服) 색깔을 제정한 520년에 17관등을 정비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봉평비에 하간지(下干支), 일벌(一伐), 일척(一尺), 피단(彼旦) 등의 외위 관등과 아울러 일금지(一今智)가 나온다. 일금지는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도 보이는 것인데, 『삼국사기』 직관지에 언급된 외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한편 중성리비에서 모단벌훼(牟旦伐喙, 모량부)와 본파훼(本波喙, 본피부) 소속의 인물로서 일벌(壹伐)이란 관등을 수여받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 일금지 외의 다른 외위 관등은 보이지 않는다. 501년에서 524년 사이에 지방의 지배세력에게 『삼국사기』 직관지에 전하는 외위관등을 수여하는 시스템을 정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벌이란 관등을 지방의 지배세력에게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524년 이전 어느 시기이다. 17관등에 일벌이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일벌을 포함한 이른바 외위 관등을 수여하기 시작한 시기 역시 520년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 지방에 파견된 도사(道使)가 보인다. 한편 521년 양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서 획득한 정보를 기초로 기술한 『양서』 신라전에 신라의 왕도에 6탁평(啄評), 즉 6부가 있고, 지방에 52읍륵(邑勒)이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52읍륵의 실체는 도사와 나두 등이 파견된 행정촌(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지증왕 6년(505)에 왕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에 주나 군, 현을 설치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이것은 당시 행정촌(성)의 영역을 획정하고 거기에 도사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물론 냉수리비에서 보듯이 이전 시기에 이미 ‘간지’를 칭하던 촌의 지배세력에게 촌주라는 직책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520년 무렵에 17관등과 외위관등, 그리고 지방통치조직과 지방관리, 촌주 및 관리의 공복제운영 등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행정법규 등을 정비하고, 여기에다 고구려와 중국의 형률 등을 참조하여 신라의 현실에 맞게 성문화된 형식으로 형법체계를 정리한 바탕 위에서 율령을 반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고이왕 27년(260)에 6좌평과 16관등을 설치하였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주서』 백제전에 5좌평제, 16관등, 22부 등에 관한 정보가 전한다. 사비시기에 좌평제와 16관등제, 22부제가 정비되었음을 알려준다. 6세기 중반 이전 『일본서기』 기록에 솔(率)과 덕(德)류의 관등이 여럿 보인다. 그 이전에 16관등이 정비되었음이 분명하다. 5세기 후반 무렵에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 등의 하위관등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주 116
각주 116)
16관등 가운데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 등의 하위 관등은 명칭이 지극히 한화(漢化)된 표현이며, 무(武)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성왕대에 남제(南齊)에 파견된 백제 사신 장새(張塞)가 진무장군조선태수(振武將軍朝鮮太守)로 책봉되었다. 진무란 관등과 진무장군이란 명칭은 관계가 깊었을 것이다. 진무장군이란 호칭은 한대에 처음 생겨 서진과 동진 및 송 등 남조에서 사여한 장군 칭호 가운데 하나이다. 백제는 동진 및 송과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정하건대, 백제에서 진무장군이란 장군 명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백제의 관등으로 수용한 것은 송대 이전으로 소급하기 곤란할 듯싶다. 특히 개로왕대에 장군호(將軍號)의 책봉을 송나라에 요청한 점을 감안할 때, 구체적으로 5세기 후반에 진무란 관등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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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관등을 완비한 것도 그 무렵으로 봄이 옳을 듯싶다. 한편 『양서』 백제전에 백제에 22담로(檐魯)가 있고, 거기에 왕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을 나누어 웅거(雄據)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담로는 백제에서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인데, 왕(王)·후(侯)제의 실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5세기 후반 개로왕대에 왕후제를 실시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되므로주 117
각주 117)
『위서』나 『송서』 『남제서』 백제전에 백제의 왕족과 고위관리로서 불사후(弗斯侯),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팔중후(八中侯),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등을 책봉받은 인물들이 전한다. 『위서』 백제전에 개로왕이 장사(長史) 여례(餘禮)를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로 책봉하였다고 전하므로 적어도 개로왕대부터 왕족을 ‘~왕’ 및 ‘~후’로 책봉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왕과 후로 책봉받은 자와 담로에 파견된 사람의 공통점은 왕족이 대부분이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왕·후제와 담로제가 서로 연관되었음을 추론케 해주는 측면이다. 따라서 여례가 불사후로 책봉된 5세기 후반 개로왕대에 담로제를 실시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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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서 담로를 지방에 파견하여 직접 지배를 실현하기 시작한 시점도 그 무렵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에서 5세기 후반에 16관등제를 완비하고, 담로제를 실시하였으니, 당시에 분명하게 관료기구를 운영하기 위한 행정법규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럽다. 고구려와 신라의 사례를 참조하건대, 5세기 후반 개로왕대에 율령을 공식반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율령을 반포한 이후에 관등제를 새로 개편하였다. 백제는 사비시기에 6좌평제와 아울러 22부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중고기에 중앙 행정관서를 단계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에서 7세기 중반 진덕여왕대에 당의 공복제도를 수용하면서 관료제 운영상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삼국 모두 관료기구의 개편에 따라 자주 행정법규, 즉 영(令)을 개정하였을 것이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주서』와 『구당서』 및 『신당서』고려전에 전하는 형법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백제의 경우 『주서』에서 살인자를 참수하였다고 하였으나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노비 3명으로써 속죄(贖罪)하게 한다고 기술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형벌규정을 소개하였으나 『주서』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에서 시기에 따라 형벌에 관한 규정을 새로 추가하거나 개정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언제 율령을 개정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반면에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 원년(654) 5월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에게 율령을 상세하게 살펴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수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진덕여왕 3년(649)에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고, 그 다음 해에 진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색복지에 전하는 “이찬·잡찬은 금관(錦冠), 파진찬·대아찬·금하(衿荷)는 비관(緋冠), 상당(上堂)·대나마·적위(赤位)와 대사는 조영(組纓)을 착용한다”는 내용의 관제규정(冠制規程)은 진덕여왕대에 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덕여왕대에 관료제 운영상에 커다란 변동이 생겼기 때문에 율령의 개정이 불가피하였고, 이방부격의 수정은 이와 관련이 깊었을 것이다. 이밖에 문무왕은 681년 임종 직전에 내린 유조(遺詔)에서 “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 수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신문왕 즉위 이후에 율령격식에 대한 대대적인 개정이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사례 이외에도 신라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율령격식의 개정이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자료가 전하지 않아서 알기 힘들다. 고구려나 백제도 신라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각주 112)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바로가기
  • 각주 113)
    포항중성리신라비 가운데 ‘干居伐 壹斯利 蘇豆古利村 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 卜步干支 朱斤壹金知 珍伐壹昔(?)云 豆智沙干支宮 日夫智宮 奪尒 今更還 牟旦伐喙作民沙干支’ 부분을 어떻게 끊어 읽고, 또 ‘奪’의 주어를 어느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분쟁 대상과 원고 및 피고의 해석이 달라진다. 종래에 이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여기서 그것에 대하여 더 이상 자세하게 논급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114)
    초기에 고구려는 다원적이고 중층적인 관등체계를 운영하였다. 『주서』 고려전에 고구려에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대형(大兄), 소형(小兄), 의사사(意俟奢), 오졸(烏拙),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사자(大使者), 소사자(小使者), 욕사(褥奢), 예속(翳屬), 선인(仙人), 욕살(褥薩) 등의 관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어느 시기엔가 사자류와 형류의 관등을 중심으로 새로이 관등체계를 정비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2세기 후반부터 대사자나 소형의 관등을 수여받은 관리가 등장한다. 반면에 『주서』에 패자나 우태 등의 관등명이 보이지 않는다. 중천왕 7년(254)에 비류(沸流) 패자 음우(陰友)가 국상(國相)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패자에 관한 마지막 사례에 해당한다. 음우는 서천왕 2년(271)에 사망하였다. 이때까지 음우의 관등은 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에 그의 아들 상루(尙婁)가 국상에 임명되었다가 봉상왕 3년(294)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남부(南部) 대주부(大主簿) 창조리(倉助利)가 국상에 임명되었다. 상루의 관등이나 소속 부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아버지 음우의 관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보아서 비류부 소속이면서 패자의 관등을 수여받았다고 추정된다. 패자란 관등이 3세기 후반까지 존재하였으므로 『주서』에 전하는 관등체계는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115)
    광개토왕릉비에 동옥저지역인 비리성(碑利城: 함남 안변)과 동해고(東海賈)의 주민을 수묘인으로 차출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이들을 광개토왕대에 새로 약취하여온 주민, 즉 신민(新民)에 대비하여 구민(舊民)이라고 불렀다. 신민과 구민은 고구려가 개별인신적으로 지배하는 백성을 가리킨다. 3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는 동옥저의 자치적인 지배권을 인정하고 공납을 수취하였다고 전한다. 이후부터 5세기 전반 사이에 고구려가 동옥저의 자치력을 부정하고 직접 지배를 실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두루묘지에 광개토왕대에 모두루를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로 임명하였다. 중원고구려비에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가 나오고, 『삼국사기』에서 봉상왕 5년(296)에 고노자(高奴子)를 요동에 있는 신성(新城)의 태수(太守)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압록재(鴨淥宰)가 존재하였고, 봉상왕 2년(293)에 북부 소형 고노자의 관직이 신성재(新城宰)였다. 바로가기
  • 각주 116)
    16관등 가운데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克虞) 등의 하위 관등은 명칭이 지극히 한화(漢化)된 표현이며, 무(武)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성왕대에 남제(南齊)에 파견된 백제 사신 장새(張塞)가 진무장군조선태수(振武將軍朝鮮太守)로 책봉되었다. 진무란 관등과 진무장군이란 명칭은 관계가 깊었을 것이다. 진무장군이란 호칭은 한대에 처음 생겨 서진과 동진 및 송 등 남조에서 사여한 장군 칭호 가운데 하나이다. 백제는 동진 및 송과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근거로 추정하건대, 백제에서 진무장군이란 장군 명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백제의 관등으로 수용한 것은 송대 이전으로 소급하기 곤란할 듯싶다. 특히 개로왕대에 장군호(將軍號)의 책봉을 송나라에 요청한 점을 감안할 때, 구체적으로 5세기 후반에 진무란 관등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가기
  • 각주 117)
    『위서』나 『송서』 『남제서』 백제전에 백제의 왕족과 고위관리로서 불사후(弗斯侯),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팔중후(八中侯),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등을 책봉받은 인물들이 전한다. 『위서』 백제전에 개로왕이 장사(長史) 여례(餘禮)를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로 책봉하였다고 전하므로 적어도 개로왕대부터 왕족을 ‘~왕’ 및 ‘~후’로 책봉하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왕과 후로 책봉받은 자와 담로에 파견된 사람의 공통점은 왕족이 대부분이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왕·후제와 담로제가 서로 연관되었음을 추론케 해주는 측면이다. 따라서 여례가 불사후로 책봉된 5세기 후반 개로왕대에 담로제를 실시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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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수용과 그 배경 자료번호 : edeah.d_0002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