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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제에서 관료제사회로

2. 귀족제에서 관료제사회로

한대(漢代)에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이라는 천거제도를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였다.주 106
각주 106)
향리(鄕里)의 여론을 참작하여 효행과 청렴 등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며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자사(刺史) 등이 추천하는 것을 수재라고 부르고, 군(郡)과 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것을 효렴이라고 일컫는다. 천거를 받은 사람들은 책문(策問)과 사책(射策) 등의 시험을 치르고 기가관(起家官)인 낭중(郎中) 등에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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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기에 외척과 환관이 자신의 당파와 빈객을 지방관으로 임용하고 뇌물거래로 천거가 이루어지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관료와 태학의 학생들이 유교적 관리등용법인 향거제도(鄕擧制度)의 부패에 반발하여 청류파(淸流派), 즉 청의지사(淸議之士)를 형성하였다. 환관들은 이들을 파당을 이루는 ‘당인(黨人)’으로 몰아 탄압하였는데, 이를 ‘당고(黨固)의 화(禍)’라고 부른다. 환관들의 탄압 이후 청류파는 향리로 돌아가 몰락 소농민을 기반으로 반정부적인 여론을 주도하였다. 청류파는 대체로 수도 낙양을 비롯하여 여남(汝南), 영천(穎川), 북해(北海) 등 하남성(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 북부에 기반을 둔 호족이자 사대부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후한이 혼란에 빠지고, 곧 이어 삼국으로 분열되자, 청류파는 위(魏)와 촉(蜀), 오(吳)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앙의 귀족으로 전화하였다.
청류파의 후예들이 위진남조(魏晉南朝)에서 세습적으로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9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었다. 이것은 위(魏)에서 능력 위주의 관인선발과 후한 이래 성행하였던 인물 품평의 풍조를 결합시켜 제정한 관인등용법이다. 각 군현에 파견된 중정(中正)이 향리의 여론을 들어 군현의 사대부들을 9품으로 등급을 나누고, 그 결과를 이부(吏部)에 올리면,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두어 관품을 수여하여 관리로 채용하는 내용이다. 중정이 매긴 등급을 향품(鄕品)이라고 부르며, 이부에서는 대체로 향품에 비하여 4단계 아래의 관품(官品)을 부과하여 관리로 등용하였다.
9품중정법은 본래 현명하고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기 위한 취지에서 실시한 관인등용법이었지만, 그러나 위나라 말기에 주(州)에도 중정을 파견하면서부터 본래의 취지가 변질되었다. 주는 광역의 행정단위였으므로 주의 중정은 향론을 참작하기 보다는 중앙의 의견을 반영하는 경향이 짙었다. 여기에다 점차 주의 중정이 군과 현의 중정을 감독하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성이 더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부조(父祖)의 관위에 비례해서 자제의 향품이 주어지게 되는 현상이 일상화되었고, 여기에다 점차 기득권이 고정되어 오직 재위자(在位者)를 존중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면서 중정은 문벌을 위주로 향품을 매겼고, 중정보다는 명가(名家)의 경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중앙의 상서(尙書)가 인사권을 장악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향품이 문벌귀족에 의하여 결정되고, 그러한 관행이 고정화되면서 가문의 격차(지위)를 지칭하는 문지(門地)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리고 최고의 향품인 2품을 으레 받게 되는 가문이 나타났는데, 이를 문지이품가(門地二品家)라고 불렀다. 귀족의 자제들은 대체로 향품 2품을 받고, 관품 6품의 저작랑(著作郞)과 비서랑(秘書郞)으로 기가(起家)하였다. 이들 관직은 청요관(淸要官)으로 인식되어 고관이 되려면 반드시 거치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이 때문에 저작랑과 비서랑에 취임하기 위하여 귀족자제들이 심하게 경쟁하였으므로 수십 일이 지나면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9품중정제가 중앙 고관들의 정치적 지위를 세습적으로 보장해주는 제도로 변질되면서 소위 문벌귀족 가문이 여럿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가문이 동진대에 남방으로 이주한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가문이었다. 두 가문은 남조의 전 시기를 통하여 여러 차례 정국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문벌을 계속 유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밖에 강남 토착호족인 주(朱), 장(張), 고(顧), 육씨(陸氏) 등이 남조에서 문벌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송(宋) 이후의 남조에서 낮은 가문 출신의 창업자가 배출됨에 따라 군주와 귀족은 별개로 움직였다. 귀족들은 국가와 군주의 안위에 무관심하고 오직 가문의 안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나아가 그들이 복잡한 국가행정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등한시 여기자, 황제는 서족(庶族)인 한문(寒門)과 한인(寒人)을 등용하여 귀족을 견제하고 황제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위진남조에서 법률상의 신분으로 양인과 천민만이 존재하였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사족(士族: 귀족)과 서족(庶族)의 차별이 더 강조되었다. 귀족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하고, 그들끼리 신분적 내혼(內婚)을 통하여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향유하는 한편, 서족의 정치적 진출을 제한하고 사회적으로 차별 대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송대에 ‘사서(士庶)의 차이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송과 제, 양 등에서 황제의 신임을 받은 한문과 한인의 실권이 증대되면서 자연히 사서의 차별을 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고, 그 결과 그들이 위진남조의 귀족제를 몰락으로 이끌고 간 사회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양나라 말기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때에 귀족들이 대량 살육됨으로써 남조의 귀족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북조에서도 9품중정제를 시행하여 관리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문벌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9품중정제를 통하여 귀족제가 강고하게 유지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선비족 왕조의 지배 아래에서 한인 귀족이 중앙의 고관을 대대로 역임하기 어려운 특수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북위와 북제, 북주에서 수재와 효렴을 통한 관리선발이 장려되었다. 문벌을 제쳐두고 능력이 뛰어난 자를 관리로 등용하여 군주권을 신장시키려는 의향이 반영된 것이다. 특히 북주에서는 위진이래의 타락한 귀족제도를 배척하고 주대(周代)의 옛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주례』를 모방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관에 청탁(淸濁)을 두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수립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수(隋) 문제는 개황(開皇) 연간에 아예 9품중정제와 중정을 폐지하고 시험에 의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과거제도는 당나라에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과거에 등제(登第)하는 것이 관리로 나아가는 핵심통로가 되었다. 수재과와 명경과(明經科)진사과(進士科)를 설행하고 국자감의 학생, 즉 생도(生徒)와 각 주현에서 추천된 향공(鄕貢)이 거기에 응시하는 형식으로 과거제도를 운영하였다. 이 가운데 수재과는 고종 초에 폐지되고 이후 명경과와 진사과를 중심으로 과거를 운영하였다. 초기에 두 시험과목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나 점차 경학을 경시하고 문장을 숭상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후자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띠었다. 과거제도의 실시로 관리선발에서 귀족의 기득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비록 귀족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관계로 그들의 후예가 과거에 합격하는 비율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특정 문벌가문이 세습적으로 고관을 역임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과거제도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귀족제는 몰락하고 능력 위주로 관리를 선발하는 관료제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수·당대에서 귀족과 서족이 아니라 양인(良人)과 천민(賤民)의 신분 차별이 사회적으로 크게 강조되었고, 양천으로 구성된 신분구조는 율령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 각주 106)
    향리(鄕里)의 여론을 참작하여 효행과 청렴 등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며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자사(刺史) 등이 추천하는 것을 수재라고 부르고, 군(郡)과 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것을 효렴이라고 일컫는다. 천거를 받은 사람들은 책문(策問)과 사책(射策) 등의 시험을 치르고 기가관(起家官)인 낭중(郎中) 등에 등용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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